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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네즈미코조 지로키치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4.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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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나

 어느 초가을 늦은 저녁이었다.
 시오도메의 선박장 이토야의 2층에선 한량으로 보이는 두 남자가 마주하여 술잔을 주고받고 있었다.
 한 명은 까무잡잡하고 살짝 통통히 살이 오른 남자로 홀옷에 핫탄 히라쿠게 오비를 묶고 있는데 위로 걸친 코와타리 토잔 반텐과 함께 옹골찬 남자 다움을 한 층 더 돋보이게 하는 정취가 있었다. 다른 한 명은 색이 하얗고 마주 앉은 남자보다는 체격이 작은 남자로, 손목까지 새긴 문신이 눈에 띈다. 풀이 떨어진 벤케이지마 홀옷에 주판 삼 척을 둥글둥글 감고 있는 것도 꽤나 방정맞게 보였다. 그뿐 아니라 이 남자는 처지가 비굴한지 상대 남자를 부를 때도 시종 형님 소리를 했다. 하지만 연배는 엇비슷해 보이는 만큼, 일반적인 형님 아우님하는 사이보다는 마음을 턴 교우 관계란 걸 알 수 있었다.
 초가을 늦저녁라지만 저 너머서 보이는 카라츠풍의 나마코카베에는 아직 붉은 햇살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햇살을 받은 버드나무 한 그루가 봉긋 나뭇잎을 드리우는 것도 지나간지 얼마 안 된 잔서의 추억을 새롭게 하는데 충분했다. 그러니 이 산박장 2층에도 갈대발문을 당지로 바꿔놨으나 에도에 미련을 둔 여름은 손잡이에 걸려 있는 이오발이나 어느 틈엔가 마루에 깔린 검은 폭포 그림이나 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그릇 위 조개 따위에 여러 흔적을 남겨두고 있었다. 실제로 거리를 하나 둔 수로의 맑은 물 위에서 이따금 이곳을 향해 불어 오는 산들 바람이 살짝 취한 두 남자에겐 상투 머리를 왼쪽으로 살짝 튼 살쩍을 흔들 적에도 시원함은 느낄지언정 가을으 추위를 느끼는 법은 없었다. 특히 색이 하얀 남자 쪽은 차가워 보이는 부적의 은사슬이 잘그락 정도로 가슴을 펴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종까지 물린 채 잠시 무어라 밀담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이윽고 그것도 일단락 되었는지 까무잡잡하고 통통한 남자는 건성으로 잔을 상대에게 건네고는 무릎 아래의 담배를 들어 올리며
 "그런 연유로 나도 삼 년만에 겨우 에도로 다시 돌아 온 셈이지."
 "어쩐지 너무 늦게 오신다 했죠. 그래도 뭐, 이렇게 돌아오셨으니 이 아우만 아니라 에도 사람 모두가 기뻐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게 말해주는 건 너 하나다."
 "헤헤, 겸손 떠시기는."
 색이 하얗고 몸집이 작은 남자는 일부러 상대를 노려보며 히죽 웃어 보이더니
 "코하나 누님께 한 번 물어보시죠."
 "그건 아니지."
 형님이라 불린 남자는 죠신카타 담뱃대를 문 채로 쓴웃음을 드리웠으나 곧 진지하게
 "그나저나 자리 비운 삼 년 동안 에도도 많이 변했구만."
 "네, 변했습죠. 오카바쇼 같은 곳이 한적해진 걸 보면 꼭 거짓말 같다니까요."
 "참, 늙은이 흉내 내는 건 아니지만 옛날이 그립다니까."
 "변하지 않는 건 우리뿐이죠. 헤헤, 한사코 무일푼이니까요."
 벤케이지마 유카타를 입은 남자는 받은 잔을 쭉 들이키고는 그 손으로 입가의 방을을 닦더니 스스로를 비웃듯이 눈썹을 움직였다.
 "이제 와서 보면 삼 년 전은 극락이나 다를 바 없었어요. 안 그렇습니까 형님? 형님이 에도를 떠나실 적엔 도둑도 그 네즈미코조처럼 이시카와 고에몽까진 못 가도 조금은 봐줄 만한 녀석이 있지 않았습니까."
 "웃기는 소리를 하네. 세상 누가 나랑 도둑을 한데 묶냐."
 토잔 반텐을 걸친 남자는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저도 모르게 또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불과 같은 상대는 조금도 아랑곳 않고 직접 잔을 따라 들이키더니 
 "그런데 요즘은 어떻습니까. 잔돈이나 버는 녀석은 빗자루를 털 만큼 나와도 그만한 대도둑은 도무지 듣지를 못 하죠."
 "못 들으면 또 어떠냐. 나라에 도적, 집에 쥐라잖아. 대도둑 따위 없는 게 낫지."
 "그야 없는 게 낫죠. 없는 게 나은 건 확실하지만요."
 색이 하얗고 몸집이 작은 남자는 문신이 새겨진 팔뚝을 뻗어 형님에게 잔을 건네며
 "그때 일을 생각하면 헤헤, 묘하게 도둑이라도 그리워져서 말입니다. 그야 없는 게 나은 건 확실하지만 그 네즈미코조란 녀석은 마음 가짐이 기쁘단 말이죠. 안 그렇습니까, 형님."
 "그렇긴 하지. 도둑의 후원자론 도박꾼이 딱이니까."
 "헤헤, 그거 참 무섭구만요."
 그렇게 말하며 벤케이지마의 어깨를 떨구나 곧 기운을 찾은 목소리로
 "우리라고 반드시 도둑편을 든다는 건 아니지만 그 녀석은 품이 뜨뜻한 부자의 집에 숨어 들어서는 돈을 훔쳐 하루 벌어 하루 사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베풀어준다지요. 확실히 이 세상이란 게 선과 악 둘로 나뉜다지만 기왕 훔친다면 그 음험한 돈을 훔치는 게 맞다. 뭐,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가. 듣고 보니 이해는 가는군. 이거 참, 네즈미코조란 녀석도 가이다이마치의 하다카마츠가 편들어줄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 할 거야. 그렇게 생각해 보면 복 많은 도둑이군."
 색이 까무잡잡하고 통통한 남자는 상대에게 잔을 돌려주며 의외로 와닿는다는 양 말했으나 이윽고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몸을 앞으로 빼며 불쑥 맑게 개인 웃음을 지었다.
 "그럼 들어봐라. 나도 그 네즈미코조의 촌극을 본 적이 있어서 말야. 지금도 생각날 때마다 뱃가죽이 늘어나는 기분이야."
 형님이라 불린 남자는 그렇게 운을 떼고는 또 유유히 담뱃대를 물고서 저녁노을 속으로 사라져 가는 둥근 담배 연기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딱 지금으로부터 삼 년 전, 내가 도박에 져서 에도를 떠났을 때의 일이야.
 토카이도에는 눈이 있으니 길은 나빠도 코슈카이도로 갈 수밖에 없었지. 그렇게 미노부까지 간 셈이니 잊을 수도 없어. 십이 월 십일 일, 요츠야의 아라키쵸를 지나 그나마 잠시 쉴 수 있었지만 너도 알다시피 유키츠무기 하나에 잇본돗코의 핫타 오비, 도중에 구한 갈색 한캇파에 삿갓이 전부였지. 애당초 짐짝 하나 말고는 동행자도 없는 길이야. 각반이나 짚신 같은 건 가볍기만 하지 당시처럼 햇살도 제대로 들지 않는 날에는 도무지 마음이 편치 않더군. 좀 고풍스러운 말이긴 하지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질질 끌려가는 기분이었어.
 그날은 또 날이 안 좋아서 아주 지독히 추웠지. 하물며 코슈카이도는 어디 산인지는 몰라도 눈이 한 가득 쌓여서 마른 잎 하나 없는 뽕밭 위로 병풍을 펼쳐 놓더라고. 그 뽕나무 가지를 쥔 닭도 추위에 목이라도 아픈 건지 소리 한 번 내지 않는 맹추위였지. 더군다나 이따금 몸을 가르는 듯한 칼바람이 불어 캇파를 흔들더라고. 이렇게 된 이상 여행에 익숙하지 않은 에도 사람은 아무리 허세를 부려봐도 도리가 없지 않겠어? 나는 삿갓 테두리에 손을 얹고는 요츠야서 신주쿠를 지나 온 에도 방향을 몇 번이나 돌아봤는지 몰라.
 그런 마당이니 지나가는 사람이 보기에도 내 모습이 안타까웠던 거겠지. 도중에 들른 가게서 나오자 착실해 보이는 젊은 남자 하나가 내 뒤를 따라 오면서 열심히 말을 걸지 뭐야. 남색  캇파에 삿갓을 쓴 그야말로 여행복의 정석을 하고 있었지. 또 색이 바란 토잔 보자기를 목에 걸치고 가로 줄무늬에 벗겨진 코쿠라 오비, 오른쪽 관자놀이는 벗겨지고 턱이 갈라진 게 설사 바람 불지 않더라도 품이 쓸쓸해 보이는 인상이었지. 하지만 겉보기보단 사람이 좋은지 가는 길의 명소 같은 걸 친절히 가르쳐주더라고. 나는 마침 길동무가 필요한 참이었고.
 "댁은 어디 가나?"
 "저는 코후까지 갑니다. 나리는 또 어디로 가십니까."
 "나는 미노부 가고 있어."
 "그런데 나리께선 에도서 오셨지요? 에도 어느 부근에서 지내셨습니까."
 "카야바쵸 우에키다나야. 그쪽도 에도서 왔나?"
 "그렇죠. 저는 후카가와 로쿠켄보리서 왔습니다. 이름은 에치고야 쥬키치라 하고 잡화점에서 일했습죠."
 뭐, 그런 식이었지. 같은 에도 출신이니 추억도 나누면서 서로 좋은 길동무라도 발견한 거 같았어. 그렇게 함께 길을 서두르고 있자니 슬슬 히노쥬쿠에 이틀쯤 되었을까. 하얀 게 살랑살랑 내리더군. 혼자 걷고 있었어 봐. 시각은 이래저래 저녁이 되어가지, 하늘을 올려다보면 강가의 새소리라도 스며 드는 거 같지. 히노서 하룻밤 보내고 갔을 테지만 아무리 품은 추워도 옆에 에치고야 쥬키치란 양반이 같이 있는 참이었잖아?
 "나리, 눈이 이렇게 내려서야 내일은 길을 걷기도 쉽지 않을 텐데 오늘 중에 하치오지까지 가면 어떨까요?"
 그런 말을 들으니 그러고 싶어져서 말야. 눈 내리는 와중에 하치오지까지 걸었지. 하늘은 어두워진지 오래고 하얗게 물든 길 양옆의 지붕이 밤눈에도 발자국이 보이는 가도에 서로 밀어 붙이듯이 겹쳐지고――그 아래선 행등이 붉게 빛나고 귀가가 늦어진 말의 종소리가 점점 가까워졌지. 그야말로 눈앞에 펼쳐진 우키요에의 눈 풍경이었어. 그러자 에치고야 쥬키치란 녀석이 앞서서 눈을 밟으며
 "나리, 오늘 밤 같이 보내시지 않겠습니까?"
 하고 몇 번이나 시끄럽게 부탁을 하는 거야. 뭐 나도 딱히 내키지 않는 건 아니었지.
 "그럼 나도 쓸쓸하지 않아 좋지. 하지만 나는 아쉽게도 처음으로 하치오지에 온 참이라서 말야. 머물 곳을 잘 모르는데."
 "무얼, 저 야마진이란 곳이 제가 자주 가는 여관입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를 끌고 간 곳은 역시나 행등이 걸려 있는 여관이었지. 입구의 도마가 넓고 그 안쪽은 곧장 주방으로 이어지는 구조였던 걸로 기억해. 우리 둘이 안으로 들어가니 계산대 앞의 시가미 화로에 앉아 있던 직원이 아직 "어서 오십쇼"하고 말하기도 전에 밥 냄새니 국물 냄새가 증기와 하나가 되어 물씬 코를 찌르더라고. 그렇게 곧현관의 행등을 내린 여자와 함께 2층방으로 올랐지. 일단 목욕물도 데워야 하고 무엇보다 몸을 데워야 하니 말이야. 뜨겁게 데운 술 두세 잔을 나누니 에치고야 쥬키치 녀석이 아주 기분이 좋아져서 말야. 안 그래도 말이 많은 녀석이 아주 입을 쉬는 법이 없더라고.
 "나리, 이 술이라면 입에 맞으실 겁니다. 이제 코슈지에 올라봐야. 어디서도 이런 술은 못 마실 걸요. 헤헤. 오래된 농담이지만 요에몬의 여주인이 저하고――"
 그런 말을 하는 동안엔 차라리 나았지. 하지만 병이 두세 개 늘어지니 눈꼬리를 낮추고 콧기름을 빛내며 푹 파인 턱을 흔들더니
 "술은 원한을 많이 산다지요. 저도 나리 앞에서나 하는 말인데 술이 잘 도는 탓에 몸을 망쳤습니다. 아, 이타고서 헤매이는"
 그렇게 떨리는 목소리로 우타를 시작하잖아. 도무지 받아주기가 힘들어서 말이지. 이 녀석은 재울 수밖에 없다 싶어서 틈을 봐 저녁을 먹고선
 "자, 내일은 일찍 일어나야 하잖아. 어서 자자고."
 그렇게 말해서 아직도 술병에 미련을 가진 녀석을 눕혔지. 그렇게 소란을 떨던 녀석도 베개에 머리를 붙이자마자 도리 없이 술 냄새나는 하품을 한 번 쩍 하더니
 "아아, 아타고서 헤매이는."
 그렇게 다시 한 번 꺼림칙한 목소리를 냈지만 그걸 끝으로 코를 쿨쿨 골더군. 그 후론 아무리 쥐가 소란을 떨어도 뒤척이는 법 한 번 없었어.
 단지 내 입장에선 재난이지. 안 그러겠어? 에도를 나와 처음 자는 밤이니까. 그 코고는 소리가 귀에 들어와 주위가 조용해질 수록 묘하게 잠이 안 오는 거야. 밖에서는 아직 눈이 그칠 줄이 모르고 이따금 빈지문에 쌓이 눈이 날아가는 소리도 들리는 듯했지. 옆에서 자는 주정뱅이는 꿈속에서도 콧노래를 부르고 있을지 몰라도 에도에선 내가 모습을 감춰 하나나 둘쯤은 밤에 잠도 못 자고 찾고 있을 거라 생각하면――이거 무슨 저주 같은 건 아니겠지――하찮은 생각을 하고 있자니 더욱 눈이 떠져서 말야. 빨리 날이 밝았으면 좋겠다, 온통 그 생각뿐이었어.
 그렇게 날이 바뀌고 새벽 두 시가 될 때까지 가만히 누워 있었지. 그 사이에 잠이 오기 시작한 건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한 듯했어. 하지만 이윽고 문득 눈이 뜨이니 쥐가 심지라도 건드렸는지 머리맡의 등에 불이 들어와 있더라고. 그런 데다가 옆에서 자는 녀석은 방금 전까지 그리 코를 골더니 이제는 마치 죽은 것처럼 숨소리 한 번 안 내잖아. 이거 참 웃긴 광경이군.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이번엔 내 이불 속으로 사람 손이 들어오잖아. 그것도 벌벌 떨면서 허리춤의 전대를 더듬는 거야. 이거 참, 사람은 겉보기랑 다르군. 그렇게나 여자를 찾는 녀석이 좀도둑이라니 뻔한 이야기가 따로 없군――그렇게 그만 웃음을 터트릴 뻔했는데 그 좀도둑하고 이제까지 술을 마신 걸 생각하니 이거야 원 성이 나기 시작해서 말야. 그 자식의 손이 허리춤에 닿자마자 반대로 잡아끌어서는 비틀어 올렸지. 좀도둑 녀석, 얼마나 놀랐는지 손을 뿌리치려는 걸 머리 위로 이불을 던지고 그 위로 올라타줬지. 그러니 그 기개 없는 녀석은 이불 아래로 고개만 빼꼼 내밀고는 "사, 사람 죽일 셈이야?"하고 오골계 목을 비틀 때에도 못 들을 기이한 소리를 내지 뭐야. 지가 먼저 도둑질을 했으니 사람을 부를 수도 없지. 삐뚤어진 녀석이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남자다움이 없는 녀석인 걸 아니 불쑥 화가 나더라고. 눈앞에 있던 베개를 잡아서 그 얼굴을 퍽퍽 때려줬다고.
 그런 소란이 들린 거겠지. 인근 손님들도 잠에서 깨고 주인이나 종업원들도 무슨 일 생겼나 하는 얼굴로 불을 들고 황급히 2층으로 올라오더라고. 그렇게 보니 내 발밑서 그 좀도둑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괴상한 면상을 내밀고 있는 참이야. 누가 봐도 웃을 일 아니겠냐고.
 "이봐, 주인장. 엄청난 벼룩 자식을 만나서 말이야. 소란을 피워서 미안하군. 이봐, 다른 손님껜 네가 잘 사과해야지."
 그게 전부야. 그 후엔 변명할 도리가 없지. 종업원이 곧장 그 녀석을 실로 둘둘 묶어서 마치 생포한 갓파라도 되는 것처럼 2층에서 질질 끌고 갔지.
 그 후에 주인장이 내 앞에 자세를 낮추고는
 "이번에는 정말 큰일을 겪으셨습니다. 많이 놀라셨겠지요. 그래도 달리 분실물이 없는 건 불행 중 다행입니다. 저 녀석은 제가 날이 밝는대로 당장 관청에 끌고 가겠습니다.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것밖에 없으니 부디 화를 거두어주시지요."
 그렇게 몇 번이나 사과하기에
 "뭐, 좀도둑인 것도 모르고 동행자로 삼은 내 잘못이지. 주인장이 사과할 건 없네. 대신 이번에 신세진 사람들에게 뜨끈한 국수라도 한 그릇 말아주게나."
 그렇게 덕담을 해주고 돌려보냈지만 혼자 남아 생각해 보니 여관 여자도 안 받아줄 거 같고 한사코 앉아서 팔짱만 끼고 있자니 마땅히 떠오르는 것도 없더라고. 그렇다고 날도 밝아 오니 잘 수도 없고 이래서야 조금 길이 어두워도 이틈에 빨리 나가는 게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어서 준비를 했지. 계산하고 나가자 싶어 다른 손님에게 민폐가 안 되도록 조용히 사다리를 내려가니, 종업원들이 아직 안 자고 있는지 무어라 이야기하는 게 들리잖아? 심지어 어떻게 된 건지 방금 전 네가 이야기한 네즈미코조란 이름이 나오더라고. 묘하다 싶어서 짐을 내려두고 아래를 바라보자니 그 에치고야 쥬키치란 괴짜가 넓은 토마 기둥에 묶인 채로 거창하게도 앉아 있더군. 그 주위선 또 젊은 녀석을 포함해 종업원 세 명 가량이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잖아. 그중에서도 나이 많은 종업원이 한 손에 주판을 들고 머리서 증기를 내뿜으며 이가 갈린다는 양 말하는 걸 듣기를.
 "정말이지, 이런 좀도둑이라도 그냥 풀어두면 네즈미코조 같은 대도둑이 될지도 모르지. 그렇게 되면 이 녀석 탓에 가도의 여관이란 여관의 노렌은 전부 너덜너덜해질 거야. 그런 걸 생각하면 이틈에 죽여두는 게 세상을 위한 일이지."
 그렇게 말하는 옆에서 영감마냥 수염을 기른 마부가 좀도둑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형님 정도 되는 사람이 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네. 이런 얼간이가 네즈미코조 역할을 할 수 있겠어? 대체로 드센 좀도둑은 얼굴만 봐도 아는 법이야."
 "그건 그렇지. 네즈미코조는 고사하고 이타치족제비코조 쯤 되지 않겠어?"
 이건 히부키다케를 든 여관의 젊은 녀석이 한 말이었지.
 "누가 아니래. 듣고 보면 이 야생 원숭이 같은 녀석은 남의 물건도 훔치기 전에 제 훈도시 안에 있는 걸 도둑질 당할 면상이니까."
 "어중간하게 길에서 돈 벌 궁리하느니 막대기 끝에 풀이라도 발라서 아이랑 같이 세전함이라도 뒤지는 게 낫겠군."
 "아니, 그보다도 허수아비 대신에 밭에 세워두는 게 나을 거 같군."
 다들 그렇게 떠들고 있으니 그 에치고야 쥬키치 녀석은 잠시 분하다는 양 눈만 번뜩이고 있었지. 하지만 이윽고 젊은 종업원이 히부키다케를 턱 아래에 얹고 쭉 얼굴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혀가 잘 돌더니
 "이것들 좀 보소, 어처구니가 없네. 내가 누군지를 알고 헛소리들 하시나. 이 형님이 이래 봬도 온 일본에 걸쳐 얼굴 좀 팔아 온 도둑이시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하찮은 백성 주제에 그럴싸한 말만 늘어놓는군."
 그 말에는 모두가 놀랐을 게 분명하지. 사실 사다리를 내려가던 나도 녀석의 성미가 대단해서 도중에서 발을 멈추고 다시 어떻게 되는지 지켜봤단 말이야. 하물며 사람 좋아 보이는 종업원은 주판까지 가지고 온 걸 잊은 것처럼 황당하단 얼굴로 그 녀석을 바라보았지. 하지만 드센 마부만큼은 수염을 쓰다듬으면서 아무렇지 않단 얼굴로
 "웃기고 있네. 삼 년 전 비내리는 밤에 뇌수를 잡은 요코야마쥬쿠의 칸타가 바로 나다. 내가 몸짓 한 번 하면 너 같은 좀도둑은 밟혀 죽는 것도 모르냐."
 그렇게 겁을 주었지만 좀도둑은 실실 웃으며
 "흥, 로쿠쥬로쿠보의 타테야마 이야기도 아니고 되는대로 협박한다 들을 거 같으냐. 그래, 잠 깨우는데 쓰기엔 좀 아깝지만 내 정체를 들려줄 테니 귓구멍 파고 잘 듣거라."
 그렇게 목소리는 사납고 발음도 좋지 않은, 어딘가 내지르는 듯한 기세는 좋았지. 근데 면상을 보면 그렇지도 않은지 물기 많은 콧물이 코 아래서 빛나더라고. 더군다나 내가 때린 곳이 관자놀이부터 하관에 걸쳐 마치 얼굴이 일그러진 것처럼 부풀어 올라 있잖아. 그래도 시골 촌뜨기에겐 그 기세가 통용된 걸 테지. 녀석이 몸을 뒤로 빼며 아귀일 적부터 해왔다는 나쁜 짓을 늘어놓고 있자니 뇌수를 잡았다는 마부마저도 서서히 그 좀도둑에게 뭐라 못하게 되더군. 그걸 본 녀석은 턱을 흔들며 세 녀석을 둘러보더니
 "하, 이 사람들 보소. 겁을 제대로 먹었구만. 내가 헛소리하는 줄 알았나? 아니, 단순한 좀도둑이라 생각하면 오산이야. 너희도 기억할 텐데. 작년 가을바람 부는 밤에 이곳 촌장 집에 숨어 들어서 돈을 전부 끌어온 게 다름 아닌 나다 이거야." 
 "네가 촌장님 댁에――"
 그렇게 말하는 건 나이 많은 직원만이 아니었어. 히부키다케를 든 젊은 녀석도 오싹해졌는지 저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더니 두세 걸음 뒤로 물러나더군.
 "거 봐, 이렇게 놀라는 걸 보니 세상 물정 모른다는 소리를 듣지. 잘 들으라고. 요전 번에 코보토케토게에서 카네비캬쿠 둘이 죽었지? 그거 누가 했을 거 같나?"
 그 녀석은 물기 많은 콧물을 훌쩍 마시고는 후츄에서 도조를 박살 냈네, 히노쥬쿠에 불을 질렀네, 아츠기카이도에서 순례 중인 여자를 덮쳤네 하고 점점 밑도 끝도 없는 나쁜 짓을 늘어 놓기 시작했지. 묘하게도 나이 많은 직원을 시작으로 남은 둘까지 어느 틈엔가 그 녀석에게 은근히 태도가 낮아지지 뭐야. 개중에서도 몸이 큰 마부가 힘이 넘쳐 보이는 팔로 팔짱을 끼고는 그 녀석을 바라보면서
 "거 정말 무시무시한 악당이셨군."
 그렇게 앓듯이 소리를 내지 뭐야. 내가 정말 웃겨서웃겨서 자칫하면 뿜을 뻔했다. 하물며 그 좀도둑 녀석 취해 있었잖아. 참 추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이빨도 시종 덜덜덜덜 떨리는데 그런 와중에 입만 살아서는
 "그래, 이제 좀 알겠냐? 하지만 내 관록은 겨우 그 정도가 아니라고. 나는 비상금이 탐나서 둘도 없는 어머니를 내 손으로 졸라 죽였다. 그게 얼마 전 에도를 뒤흔든 사건의 진상이야."
 그렇게 크게 허세를 부릴 적에는 세 사람 모두 숨을 삼키잖아. 어지간히 대단한 배우라도 보는 것처럼 얼굴 옆이 부풀어 오른 녀석의 얼굴을 머뭇머뭇 보기나 하고 말이야. 나는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서 더는 못 보겠단 생각에 사다리를 두세 개 가량 더 내려갔는데, 그때 나이 많은 직원은 무슨 생각인지 손뼉을 치더니 
 "그래, 알겠다. 이제 알겠다. 그 네즈미코조란 게 네 별명이구나."
 그런 황당한 소리를 하기에 나는 또 마음이 바뀌어서 저 녀석이 뭐라고 말할지 듣고 싶어졌지. 다시 한 번 어두운 사다리 중단에 발을 멈춘 거야. 그러자 그 좀도둑 녀석, 나이 많은 점원을 노려보면서
 "들켰으면 방법이 없나. 그래, 에도서 이름 높은 네즈미코조가 바로 나다 이거야."
 그렇게 거창하게 웃음을 터트리더군.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몸을 한 번 떨더니 연이어 힘없는 재채기를 하니 모처럼 노려보는 것도 다 무슨 소용이야. 그래도 세 종업원은 대단한 사람의 이름이라도 들은 것처럼 그 얼빠진 쥬키치 녀석을 띄어주는 걸로 모자라
 "나도 그런 줄 알았지. 삼 년 전 뇌수님을 잡은 요코야마쥬쿠의 칸타라면 우는 아이도 그친다지. 그런 사람을 앞에 두고 움찔도 안 하는 게 이상하다 했어."
 "아무렴. 그러고 보면 눈 어딘가에 날카로운 면이 있다 했어."
 "누가 아니라. 그래서 나는 처음부터 이 사람은 한 사람의 대도둑이 될 거라 말한 거야. 정말이야. 오늘 밤은 어쩌다 실수한 거지. 원숭이도 나무서 떨어진다잖아. 떨어졌지만 이게 또 떨어지지 않은 것처럼도 보이는걸. 2층의 손님은 전라나 다름 없었어."
 줄이야 풀지 않았지만 입을 모아 떠드는 거야. 그랬더니 좀도둑 녀석이 또 어깨가 으쓱해서는
 "그래, 이 네즈미코조가 여관에 묵었으니 여기 주인도 운이 좋은 거지. 그런 내가 입만 잘 놀리면 이런 여관이 무너지는 건 어렵지도 않지. 되라도 좋으니 술 좀 한 오 합 가량 내놔봐."
 그렇게 말하는 녀석도 뻔뻔하지만 그걸 또 순순히 들어주는 점원도 정말 얼간이 같지 않냐? 나는 불빛 아래서 민머리 점원이 그 주정뱅이 좀도둑에게 되로 술을 먹이는 걸 보면 이 야마진의 종업원 뿐 아니라 온 세상 사람들이 바보처럼 느껴지더라고. 그게 또 웃기고 웃겨서 참을 수가 없었지. 안 그래? 같은 악당이라 해도 강도에 소매치기, 방화범보단 그냥 옆자리 사람 주머니나 훔치려던 게 차라리 죄가 가볍잖아. 그럼 세간도 대도둑보다 잔챙이 도둑을 연민해야 마련이지. 그런데 사람은 그렇지가 않아. 양아치에겐 깐깐해도 금칠된 악당한테는 고개를 숙이지. 네즈미코조라면 술도 먹여주지만 단순한 좀도둑은 묶어서 때려눕혀. 그런 마당이니 나도 도둑이 되면 잔챙이는 되고 싶지 않더라고――뭐 나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한사코 이런 촌극을 볼 수도 없으니 일부러 소리를 내며 사다리를 내렸지. 입구에 짐을 내던지고는
 "이봐, 일찍 나가고 싶으니까 계산 좀 해줘."
 하고 말했지. 참, 나이 많은 민머리 점원 녀석은 부끄러운지도 않은지 황급히 되를 마부에게 건네더니 몇 번이나 옆머리에 손을 얹으며
 "이거 참, 일찍 나가시는군요――네네, 부디 화를 거두어주시고――또 방금 전에는 네, 저희에게 마음을 써주셔서――마침 눈도 그친 모양이고――"
 그런 영문 모를 소리를 하기에 나도 또 우스워져서
 "지금 내려오며 주워 들었는데 저 좀도둑이 그 유명한 네즈미코조인 모양이더군."
 "네, 그런 모양입니다――이봐, 어서 신발 가져와. 삿갓하고 캇파는 여기 있으니까――듣자하니 대단한 도둑이라죠――네, 지금 계산해드립죠."
 나이 많은 점원은 부끄러운 걸 숨기기라도 하듯이 젊은 점원을 혼내면서 격자 안으로 기어 들어가선 붓을 들고 계산을 하기 시작했지. 나는 그 사이에 신발을 신고 숨을 돌렸는데 돌아보니 그 좀도둑은 벌써 술기운이 돌았는지 벗겨진 옆얼굴을 붉히고 있더라고. 녀석도 살짝 부끄럽긴 한지 되도록 내 방향을 보지 않고 곁눈질만 하는 거야. 그 꼴사나운 모습을 보자니 나는 새삼스레 그 녀석이 불쌍해졌어.
 "이봐, 에치고 씨. 아니, 쥬키치 씨. 하찮은 농담은 그만하자고. 댁이 네즈미코조니 뭐니 하면 사람 좋은 시골 사람들은 정말 믿고 말잖아. 미안하지도 않아?"
 그렇게 친절히 말해주니 그 녀석도 보통 바보가 아닌지 아직도 연기를 계속하더라고.
 "뭐, 내가 네즈미코조가 아냐? 뭘 안다고 그런 소리를 하시나. 나리나리하면서 띄어줬더니――"
 "이거야. 그렇게 한껏 성을 내면 여기 있는 마부나 젊은 녀석은 너한테 굽신 거리겠지. 근데 그것도 벌써 꽤 해먹지 않았나? 이제 슬슬 질렸을걸. 애당초 네가 틀림없는 일본 제일의 대도둑이라면 뭐가 좋아서 도움도 안 되는 과거의 나쁜 짓을 주절주절 늘어놓지? 가만히 들어보니 말이야, 그래 네가 뭐 정말 네즈미코조라고 강짜 부린다 치자. 높으신 분도 네가 네즈미코조라 여길지도 모르지. 근데 그때는 가벼워도 감옥이요 무거우면 책형은 확실할 테지. 그래도 네가 네즈미코조라 묻는다면――그래, 어떻게 말할지 들어나 보자."
 그렇게 한 번 찔러주니 그 얼빠진 녀석은 입술마저 파랗게 질리더니
 "헤헤, 죄송하게 됐습니다. 실은 네즈미코조도 뭣도 아니고 그냥 좀도둑입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단지 불을 질렀내 부쉈네 하는 걸 보면 댁도 어지간한 악당이구만. 어차피 목은 날아갈 거야."
 문앞에서 담배불을 붙이며 진지하게 말하자 그 녀석도 술이 깼는지 또 축축한 콧물을 훌쩍이면서 울 거 같은 목소리로
 "아뇨, 그것도 전부 거짓말입죠. 저는 나리께 말씀 드린 것처럼 에치고야 쥬키치란 장사치로 한 해에 한두 번은 반드시 이 길을 올랐다 내렸다 하니까요. 그러니 좋은 소문도 나쁜 소문도 듣기 마련이니 그만 입에서 나오는 대로 툭툭 뱉은 셈입니다――"
 "이봐, 방금 전에 좀도둑이라고 말했잖아. 도둑이 장사치를 하다니 별소리를 다 듣는군."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건 또 오늘 밤이 처음입니다. 요 가을에 여자가 도망치고 그 후로 안 좋은 일만 생겨서요. 왜 가난하면 둔해진단 말도 있지 않습니까. 갑작스러운 충동에 실례되는 짓을 했습니다." 
 나는 아무리 얼간이라도 일단은 좀도둑이라 생각했으니 그런 말을 들었을 땐 담배를 문 채로 황당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지. 뭐, 나는 황당했을 뿐이지만 마부나 젊은 종업원은 보통 화난 게 아니었지. 내가 말리려던 차에 대뜸 그 녀석을 끌고 나와서는
 "이 자식, 사람을 바보 만들고."
 "뺨을 때려주마."
 그런 소란 아래서는 히부키다케가 날고 되가 떨어졌지. 불쌍한 에치고야 쥬키치는 옆얼굴이 퉁퉁 부풀어 오른 걸로 모자라 눈덩이마저 두 배가 돼버리더라고……

       셋

 "뭐 그런 이야기야."
 까무잡잡하고 살짝 통통한 남자는 그런 이야기를 마치고는 이제까지 멀리하던 상 위의 잔을 들어 올렸다.
 건너편서 보이는 카라츠식 나마코카베에는 어느 틈엔가 햇살이 닿지 않고 있었다. 수로에 인접한 버드나무에도 어두운 색이 짙어지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산엔잔 조죠지의 종소리가 바다 내음 섞인 바깥공기를 조용히 흔들며 새삼스레 가을을 두 사람의 가슴에 스며들게 했다. 바람에 움직이는 이요발, 하마고텐 숲의 까마귀 우는소리, 그리고 두 사람 사이에 놓인 잔에 담긴 물이 내뿜는 차가운 빛――곧 여종이 옮기는 촛불빛이 붉은 끝자락을 나부끼며 계단 아래서 나타날 것도 틀림 없다.
 벤케이지마 홀옷을 입은 남자는 상대가 잔을 들어 올리는 걸 보고 곧장 병을 들어 올리며.
 "이거 참, 엄청난 얼간이가 또 있군요. 일본 도둑의 수호신, 우리가 사랑하는 네즈미코조를 뭘로 여기는 걸까요. 형님이라면 몰라도 저라면 그 자식을 반쯤 죽여놨을 겁니다."
 "뭐 그렇게 성낼 건 없잖아. 그런 얼간이라도 네즈미코조란 이름 하나만으로도 거창하게 굴었다면 네즈미코조도 마냥 싫진 않겠지."
 "하지만 형님, 그런 신출내기 좀도둑이 네즈미코조의 이름을 가져가면――"
 문신을 새긴 몸집이 작은 남자는 여전히 성을 낼 기미를 보였으나 색이 까무잡잡하고 토잔 반텐을 입은 남자는 유유히 미소를 머금으며
 "글쎄, 내가 하는 말이니 좋은 거 아니겠어? 너한테는 아직 밝히지 않았지만 삼 년 전에 네즈미코조라며 에도를 들썩인 건――"
 그렇게 말하곤 잔을 든 채로 주위를 날카롭게 바라보며
 "이 이즈미야 지로키치를 말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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