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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벽견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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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림

 이 몇 편의 문장은 누군가의 사람들을 논한 것이다. 아니, 그러한 사람들을 향한 내 호오를 표현한 것이다.
 이 몇 편의 문장 속에 시대를 뛰어 넘는 명확한 답을 추구하는 건 물론 굉장히 위험한 일이다. 나는 내 비판이 공평함을 조금도 자랑할 생각이 없다. 또 아쉽게도 나는 공평이란 개념에 축복받지 못했다――오히려 축복받는 걸 곱게 여기지 않는 미덕을 지니고 있다.
 이 몇 편의 문장 속에 겸양 정신을 요구하는 것 역시 굉장히 잘못된 생각이다. 갖은 비판 예술은 겸양 정신과 양립하지 않는다. 특히 내 문장은 자부와 허영심을 빨아 들이는 펌프와 같다.
 이 몇 편의 문장 속에서 경망함을 바라는 건 가장 이해력이 부족한 행위이다. 나는 마감에 늦지 않도록 바쁘게 펜을 움직여야 한다. 그런 사정 아래에서 경망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건 큰 역량을 지닌 사람뿐이다.
 이 몇 편의 문장은 내 호오를 드러내는데 이외에 그 어떤 가치도 지니고 있지 않다. 나는 단지 내 호오를 되도록 정직하게 드러내려 했다. 만약 장점에 가까운 걸 꼽자면 나 스스로를 꾸미는 일을 구태여 하지 않았다는 점뿐이다.
 진서예기는 "정월 모임, 백수통을 정원에 두고 통 뚜껑 위에 하얀 동물을 두고 만약 솜씨 좋게 직언을 하는 자 있다면 이 통을 열어 술을 주라"고 적혀 있다. 나는 이 몇 편의 문장 속에 직언 즉, 벽견僻見, 편향된 견해를 헌정한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백수통을 열어 한 국자 술을 주지 않겠는가? 적어도 내 벽견에 찬동하여 벽견의 권위를 위해 힘을 빌려주지 않겠는가?


       사이토 모키치

 사이토 모키치는 결코 가볍게 논할 수 없다. 적어도 내게는 다른 사람보다도 더 어렵다. 왜냐면 사이토 모키치는 어느 틈엔가 내 마음의 일각에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나는 고등학생 시절 우연히 '적광'의 초판을 읽었다. '적광'은 서서히 내 앞에 새로운 세계를 드러냈다. 그 후로 나는 모키치와 함께 올챙이의 목숨을 사랑하고 낮은 띠가 살랑이는 걸 사랑하고 아오야마 묘지를 사랑하고 미야케자카를 사랑하고 오후의 전등불을 사랑하고 여자의 손등 위 정맥을 사랑했다. 그런 모키치를 냉정히 보는 건 나 자신을 냉정히 보는 일이다. 나 자신을 냉정히 보는 건――아니, 나는 남들이 보지 못하는 일기를 적을 때마저 반드시 제삼자를 예상하고 허영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도무지 길거리 행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 자신을 보는 건 불가능하다.
 시가詩歌를 보는 내 눈은 다른 누구도 아닌 사이토 모키치에게 받은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십수 년도 더 전, 토야마노하라에 가까운 셋집 2층서 '적광'의 한 권을 읽지 않았다면 나는 아직도 지렁이처럼 위대한 시가의 햇살을 보지 못했으리라. 하이네, 베를렌, 휘트먼――그런 서양 시인의 시를 손이 닿는 대로 읽던 것도 이 시절이다. 하지만 내 어학 소양은 그들의 내진에 발을 들이기엔 물론 얄팍하기 짝이 없었다. 그뿐 아니라 내게 우에다 빙과 쿠리야가와 하쿠손을 한데 뭉친 어학 소양을 주더라도 과연 그들의 피와 살을 뜯어 먹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나는 지금도 그들의 시 속 음악적 효과를 이해하지 못한다. 희소하게 이해했다 생각하는 것마저 손으로 꼽아보면 두 자리 밖에 되지 않는다.) 때문에 당시 그들의 시를 전혀 읽지 않았더라도 후회하진 않았으리라. 하지만 만에 하나 모종의 기회에 '적광'의 한 권을 읽지 않았다면――이 또한 사실 생각해 보면 의외로 후회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신 행복한 비평가처럼 자신의 색맹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우타는 결코 문단의 중심 세력이 될 수 없다' 허세를 부렸을 건 분명하다.

 또 모키치는 시가에 대한 눈만 준 게 아니다. 갖은 문예상의 형식미를 보는 눈을 뜨는 것또한 도와주었다. 눈을?――혹은 귀라 해야 할지 모르겠다. 나는 이 귀를 얻지 못했다면 '볼품 없이 느껴지는 봄비' 소리에도 무관심하게 지나갔으리라. 하지만 은혜를 받은 건 눈이든 귀든 상관 없다. 어느 쪽이든 나는 지금도 이 눈으로 만요수를 보고 있다. 이 눈으로 사루미노를 보고 있다. 이 눈으로 '적광'이나 '옥돌 광석'을 ――만약 정직히 말하자면 이 눈으로 '적광'이나 '옥돌 광석' 속 몇몇 나쁜 우타마저 보고 있다.
 이상으로 이유로 적어도 내가 사이토 모키치를 논하는 건 남들보다 쉽지 않다. 또 모키치의 우타의 가치를 논하고 가단에 대한 공적을 논하고 단카사상의 위치를 논하는 건 저절로 나올 터이다.(설령 지금은 없더라도 백 년 뒤엔 한 명 정도 반드시 모키치를 찬미하거나 혹은 모키치를 도살하거나 어느 쪽이든 진지하게 '적광'의 작가를 상대하는 사람이 나오리라.) 따라서 엄연한 객관의 무대서 사이토 모키치를 바라보는 건 잠시 다른 사람한테 양보해야 한다. 내가 여기서 논하고 싶은 건 왜 모키치는 후배인 내 정신적 자서전을 좌우했는가, 왜 나는 카진 모키치에게 예술상 인도자를 발견했는가. 왜 우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한 가닥 핏줄을 함께 흐르게 했는가――요컨대 왜 당시의 내가 모키치를 좋아하게 되었는가, 뿐이다.
 하지만 이 '왜인가?'도 대답하는 건 묻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다. 그게 꼭 답을 찾을 수 없단 건 아니다. 오히려 답이 너무 많아서 정신이 아득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텐마의 카미야지헤이에게 왜 그가 소네자키의 하쿠진 코하루를 사랑했는가를 묻는다 생각해 보자. 지헤이는 곧장 주판을 한 손에 들고 머릿결이 좋다느니 눈이 좋다느니 혹은 또 손발이 부드러운 게 좋다느니 여러 특색을 늘어 놓으리라. 나의 모키치 또한 역시나 이 사례와 마찬가지다. 모키치의 특색을 설명하기 시작하면 그것만으로도 몇 페이지에 이를지 모른다. 모키치는 '오히로' 연작 속에서 잘 생긴 남자의 연애를 노래하였다. '죽어가는 어머니' 연작서 사바계의 생사를 이야기했다. '휘파람' 연작서는 무엇도 거리끼지 않는 취재의 대담함을 자랑한다. '건초' 연작서 이제까지 없던 감각의 날카로움을 뽐냈다. '이 마을에 오오야마 대장이 살기에 우리의 마음은 기쁩니다'에서 우스꽝스러움을 전해주었다. '둥글둥글 동그란 고욤에 작은 새 부리 꽃네'서 소박한 그림을 떠올리게 한다. '이렇게이렇게', '심신'의 Onomatope서 새로운 붐결을 내뿜는다. '부모소생', '해차안'엔 불어의 생생한 핏줄이 흐르고 있다……
 이런 특색은 조금이나마一一"왜인가?"에 대답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부를 가르쳐준다 한들 완전히는 "왜인가?"에 다댑할 수 없다. 확실히 코하루의 눈이나 머릿결은 제각기의 특색을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지헤이가 사랑하는 건 코하루란 한 명의 여인이다. 눈이나 머릿결의 특색을 가진 것도 사실은 코하루란 한 여인을 구현해내기 위함이다. 그럼 코하루란 사람을 완벽히 알지 못하는 이상 완전히 "왜인가?"에 대답할 수는 없다. 또 코하루란 사람을 아는 건――지헤이 본인도 완벽할지는 오래된 의문이다. 적어도 완벽히 알게 된 결과를 문장으로 적지는 않은 듯하다. 하지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모키치를 말하기 위해선 한 편의 문장을 적어야만 한다. 설령 완벽히 아는 건 인간에겐 불가능하더라도 일단은 눈코만은 밝혀내고 기고의 약속도 다 해야만 한다. 때문에 나는 다시 한 번 갖은 모치키의 특색에 "왜인가?"하는 같은 의문을 던지는 바이다.
 '빛은 동쪽에서 온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근대 일본에 이 말은 통용되지 않는다. 적어도 예술에 한해서는 거듭 서쪽에서 오는 듯하다. 예술――그렇게 거창하게 말할 건 없다. 문예만 생각해 보아도 근대 일본은 아무리 둘러보아도 대부분 근대 서양의 은혜를 입은 듯하다. 혹은 근대 서양의 모방을 꾀하는 듯하다. 물론 모방 같은 말을 쓰면 곧장 비난을 받을지 모른다. 실제로 '모방에 탁월하다'는 말은 일본 국민에게 주는 악명 대신 쓰이고 있다. 하지만 모방하기 위해서는 대상을 이해해야만 한다. 설령 깊고 얕단 차이는 있더라도 어찌 됐든 대상을 이해해야만 한다. 그 이해가 얄팍한 사례는 소위 사람 흉내 내는 원숭이가 된다.(선량한 원숭이는 인간의 깊은 업을 이해하면 두 번 다시 사람 흉내를 안 낼지도 모른다.) 그 이해가 깊은 사례는 예술가의 모방이 된다. 요컨대 모방의 선악은 모방 그 자체에 있는 게 아니다. 이해의 얕고 깊음에 있을 터이다. 또 얄팍한 이해라도 이해가 없는 것보다는 뛰어나다 해야 하리라. 원숭이가 공작이나 뱀보다 진화의 계단 위에 유유히 앉아 있는 게 이 사실을 분명히 가르쳐주고 있다. '모방에 탁월하다'는 말이 꼭 우리 일본인의 면모만을 형용하는 건 아니다.
 예술상 모방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깊은 이해에 뿌리내리고 있다. 하물며 이 이해를 투철할 때엔 모방은 거의 모방이 아니다. 이를테면 이제는 고전이 된 쿠니키다 돗포의 '정직한 사람'은 모파상의 모방이다. 하지만 '정직한 사람'을 모방이라 부르는 건 나폴레옹의 업적을 알렉산더의 업적의 모방이라 부르는 것과 다를 바 없다. 확실히 돗포는 인생을 모파상처럼 보았으리라. 하지만 그건 돗포 본인도 모파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혹온 돗포 본인 속에서 미묘한 돗포 모파상 조합이 성립되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또 경구를 건드리면 인생 또한 모사파상을 모방하고 있기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다. '인생은 예술을 모방한다'고 말한 명성 높은 와일드의 경구는 이런 사례를 이야기하고 있다. 인생?――자연이라 말해도 지장은 없으리라. 와일드는 인생파가 태어나기 전엔 런던 시내에 감도는 아름다운 다갈색 안개는 존재하지 않았다 말한다. 파랗게 빛나는 사이프레스 또한 역시 고흐가 태어나기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게 분명하다. 적어도 윤기 도는 미미카쿠시 그림자에 옅은 붉은 뺨을 빛내는 소녀가 긴자 거리를 걷는 건 확실히 르누아르가 태어난 후――아주 근래의 일이다.
 편의상 다시 한 번 반복하자면 예술상 이해를 투철할 때에는 모방은 거의 모방이 아니다. 되려 자타가 융합되어 자연스레 꽃이 핀 창조이다. 모방의 흔적을 쫓다보면 어떠한 고금 작품도 전혀 새로운 건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또 독자성의 지반을 쫓아가면 어떠한 고금의 작품도 전혀 낡지 않다. '정직한 사람'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돗포 모파상 조합의 제품이다. 이게 꼭 서명만 돗포라는 뜻은 아니다. 전편에 돗포의 독자성이 섞여 있다는 말이다. 그럼 돗포가 본 인생이 꼭 시종 모파상을 모방하기만 한 건 아니다. 이는 와일드마저도 인생이 예술을 모방하는 정도를 엄밀히 규정하지 않았을 터이다. 또 와일드의 경구를 응용하자면 자연이나 인생은 굉장히 부정확하게 복제된 삼색판이라 해야만 한다. 그 중에서도 긴자 거리의 소녀 따위는 가장 볼품 없는 삼색판이다.
 근대 일본 문예는 가로론 서양을 모방하면서 세로론 일본의 땅에 뿌리내린 독자성 표현에 뜻을 두고 있다. 일본에서 삶을 향유한 이상, 사이토 모키치도 이 사례서 벗어나지 않는다. 아니, 모키치는 이 가로세로 양면을 최고도로 갖춘 카진이다. 마사오카 시키의 '대나무 마을 우타'에 드러난 '아라라기'의 전통을 아는 사람은 '아라라기'의 동인 중 한 명인 모키치의 일본인 기질을 의심하지 않으리라. 모키치는 "우리의 혈맥 아네은 선조의 피가 뛰고 있다. 선조의 마음이 담겨 나오는 문장이 선조의 분신인 우리에게 친근하지 않다는 건 거짓이다. 생각하기에 그대에게도 거짓임이 분명하다"고 천하에 호소한 일본인이다. 하지만 그런 일본인 중에도 때로는 저 멀리 만 리의 바다에 있는 선조들의 그림자에 서게 되리라.

붉게 빛나며 길게 뻗은 외길은 가야 마땅할 생명의 시작이며 또한 끝이로구나 

빛이 감도는 한 줄기 길 너머는 한없이 멀고 거센 바람마저도 불어 오고 있구나

들판 안에서 빛나는 한 줄기 길 주위를 보라 이곳저곳 떨어진 목숨들이 있구나

 고흐의 태양은 몇 번이고 일본 화가의 캔버스를 비추었다. 하지만 '외길' 연작만큼 비통한 풍경을 비추지는 않았으리라.

바람을 맞는 느티나무 큰 나무 햇살 너머에 투명하고 푸른 잎 희미하게 비추네.

한 면 가득히 부풀어 올라버린 둥근 조밭 위 질풍 하나 지나면 파도 하나 부느냐.

곱게 물오른 호박아 굴러굴러 향하는 길이 기껏해야 농부의 눈앞에 발밑이랴.

 이러한 우타는 마치 후기 인상파의 전시회 따위를 보는 듯하다. 그런가 하면 인물화도 없진 않다. 

광인의 향기 풍기는 복도 아래 우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걸음을 옮긴다

투명히 비쳐 낮게 불타 오르는 해변 불꽃에 어린 아이는 젖어 밖으로 나오는가

 그뿐 아니라 이런 그림은 그린 화가 자신의 모습마저 묘사하고 있다.

겨울 들판에 그림 그리는 남자 홀로 찾아와 움직이는 연기를 헤짚기 시작하네

 행복한 몇몇 시인들은 어떤 이는 장미를 노래하며 어떤 이는 다이너마이트를 노래하며 그들의 서양을 자랑한다. 하지만 그들의 서양을 모키치의 서양과 비교해보라. 모키치의 서양은 저절로 깊은 곳에 자리한 아름다움으로 충만하다. 이건 그들의 서양처럼 감수성만으로 이뤄진 게 아니다. 솔직히 자기자신을 찾아내고 괴롭힌 혼의 산물이다. 나는 꼭 위에 열거한 우타가 모키치 평생의 걸작이라 말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안에 충만한 모키치의 굉장한 심열이 느껴지게 하는 건 사실이다. 또 동시에 그런 용광로 밑바닥에 불을 지른 서양을 느끼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근대 일본 문예는 가로론 서양을 모방하면서 세로론 일본의 땅에 뿌리내린 독자성 표현에 뜻을 두고 있다." 나는 또 이렇게도 말했다. "모키치는 이 가로세로 양면을 최고도로 갖춘 카진이다". 모키치보다 우수한 우타가 많은 카진도 넓은 천하에는 반드시 있으리라. 하지만 '적광'의 작가처럼 근대 일본 문예에 대해――적어도 내게 생명을 준 동시대 일본 문예에 대한 상징적인 지위에 선 카진은 한 명도 없는 건 분명하다. 카진?――비단 카진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두세 개의 예외를 제외하면 갖은 예술의 땅에서도 모키치만큼 시대를 상징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해야 하리라. 이건 단순히 위대한 카진이란 것보다 좀 더 장대한 무언가가 있다. 좀 더 넓은 인생을 뒤흔들기에 충분한 무언가다. 내가 모키치를 좋아한 것도 필시 이런 이유 때문이지 않았을까

우리 어머니 나를 낳으셨다니 젊으면서도 애처로운 힘마저 느끼고 마는구나

 변변치 못한 재주를 가진 나도 이따금 나를 낳은 어머니의 힘을――근대 일본의 '젊으면서도 애처로운 힘'을 느끼고 있다. 내가 카진인 사이토 모키치에게 예술상의 인도자를 발견한 건 나 자신에겐 조금도 우연히 아니다.

       이와미 쥬타로

 이와미 쥬타로란 호걸은 후에 스스키다 하야토노 쇼가네스케라 자칭하게 된다. 물론 이는 코단시 이외에 보증하는 학자가 없는 걸 보면 혹은 사실은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사실이 아니라 해도 이와미 쥬타로를 경멸하는 건 지극히 경중을 잃은 일이다.
 애당초 이와미 쥬타로는 역사에 실존한 인물보다도 더욱 생명으로 풍부한 인간이다. 그 증거로 같은 시대의 인물――이를테면 오사카 오봉행 중 한 명, 나가츠카 오쿠라노 소유마사이에를 이와미 쥬타로와 비교해보라. 무사 수행의 여행을 떠난 쥬타로 모습은 눈앞에 고스란히 떠오른다. 하지만 마사이에는 몸집이 작았는지 컸는지도 우리는 알 수 없다. 또 그런 관계상 쥬타로는 마사이에의 열 배 정도 우리의 감정을 지배하고 있다. 우리는 신문지 한 구석에서 '나가츠카 마사이에, 오랜 병투와 싸우나 약은 효과가 들지 않고'하는 광고를 보아도 별로 유감이라 여기지 않으리라. 하지만 쥬타로의 죽음을 알리는 호외가 나오면 희곡 '이와미 쥬타로' 속에서 이 호걸을 가지고 논 무정한 키쿠치 칸이라도 낙심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뿐 아니라 쥬타로는 감정 이상으로 우리의 의지를 지배하고 있다. 전쟁놀이를 하는 초등학생이 쥬타로를 흉내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나마저도 논전을 할 때는 곧장 오로치를 퇴치하는 쥬타로를 마음 먹곤 한다.
 둘째로 이와미 쥬타로는 현대 공기를 흡입하는 인물――이를테면 고토 자작보다도 생명으로 풍부한 인간이다. 확실히 자작은 일본이 낳은 정치적 호걸 중 한 명일지 모른다. 하지만 아무리 호걸이라 한들 자작 고토 신페이는 풍채가 좋고 코안경을 걸쳐 이따금 웃음을 터트리는――어찌 됐든 제한 속에 담겨 있는 사람이다. 갑이 본 자작은 을이 본 자작보다 눈이 하나 더 많다거나 하진 않다. 그만큼 더할 나위 없이 정확하다. 또 굉장히 지루하기도 하다. 만약 갑이 코끼리 체중을 이상적인 체중으로 여긴다면 코끼리보다 가벼운 자작은 물론 갑의 요를 충분히 만족하지 못하리라. 또 만약 을은 기린의 키를 이상적인 키로 여긴다면 기린보다 키가 작은 자작은 역시 을의 불평을 각오해야만 한다. 하지만 이와미 쥬타로는――이와미 쥬타로 또한 무사수행을 떠난 호걸이란 제한을 받기는 한다. 하지만 이 제한은 고무줄처럼 늘었다 줄었다 한다. 갑을 둘이 보는 쥬타로가 꼭 동일인물이라곤 할 수 없다. 그만큼 굉장히 부정확하다. 동시에 또 한없이 자유롭다. 코끼리 체중을 좋아하는 갑은 쥬타로의 체중이 코끼리와 맞먹는다는 걸 승인하리라. 기린의 키를 찬가하는 을 또한 역시 쥬타로의 키가 기린에 필적함을 발견할 터이다. 이는 육체상의 제한만이 아니다. 정신상의 제한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용기와 같은 미덕도 고토 자작은 우리와 마찬가지로 열마나 용맹해질까를 평생의 문제로 삼아야만 한다. 하지만 천하의 용맹한 사람은 얼마나 쥬타로가 될 수 있을지를 평생의 문제로 삼고 있다. 때문에 쥬타로는 고토 후작보다도 한 층 더 우리의 정 위에 커다란 영향을 주기 쉽다. 우리는 하늘의 다리서 적과 싸우는 쥬타로에게 진심의 불안을 금할 수 없다. 하지만 의원회 연단서 적과 싸우는 고토 자작에겐 지극히 냉담해질 수밖에 없다.
 이와미 쥬타로를 경멸할 수 없는 이유는 갖은 가공 인물을 경멸할 수 없는 이유와 같다. 가공 인물이란 말은 전설적 인물만 가리키는 게 아니다. 소위 예술가라 칭해지는 근대적 전설 제조업자에가 만든 가공의 인물도 포함된다. 카이젤 빌헬름을 경멸하는 건 좋다. 하지만 한 줄기 불 아래서 연금술 책을 읽는 파우스트를 경멸하는 건 잘못된 일이다. 파우스트가 쓴 차용증 따위는 어떤 도서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오늘도 베를린의 카페 한 구석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다. 로이드 조지를 경멸하는 건 좋다. 하지만 세 마녀 앞에서 운명을 묻는 맥베스를 경멸하는 건 잘못되었다. 멕베스가 찬 단검은 어떤 박물관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맥베스는 여전히 런던 클럽의 한 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다. 그들은 과거 인물은 물론 현재 인물보다도 방심할 수가 없다. 아니, 그들은 그들을 만든 천재보다도 더 목숨이 길다. 예수 기원 삼천 년의 유럽은 입센의 명성도 잊어버리리라. 하지만 용맹한 페르 귄트는 역시 여명의 협만을 내려보고 있을 게 분명하다. 실제로 오래되고 괴귀한 한산습득은 어두컴컴한 산봉우리를 헤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을 만든 천재는――풍간이 탄 호랑이의 흔적도 천태산의 낙옆 속에 진작 사라졌으리라.
 나는 상하이 프랑스 거리서 장태염 선생님을 방문했을 때, 박제 악어가 걸린 서재서 선생님과 일중 관계를 논했다. 그때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내 귀에 울리고 있다――"내가 가장 혐오하는 일본인은 오니가시마를 정벌한 모모타로일세. 모모타로를 사랑하는 일본 국민에게도 조금의 반감을 품을 수밖에 없어." 선생님은 정말로 현자시다. 나는 번번히 외국인이 야마가타 공작을 비웃고 카츠시카 호쿠사이를 떠받들고 시부사와 자작을 매도하는 걸 들었다. 하지만 아직 어떠한 일본통도 우리 장태염 선생님처럼 복숭아서 태어난 모모타로에게 한 방을 먹였다는 건 듣지 못했다. 그뿐 아니라 선생님의 이 한 방은 갖은 일본통의 웅변보다 훨씬 진리를 품고 있다. 모모타로 또한 역시 오래 가리라. 만약 오래 간다면 어둡고 칙칙한 오니가시마의 물줄기서 오니 대여섯 마리가 쓸쓸히 아무도 알지 못한 조국의 옛날을 한탄하는 것도――하지만 나는 일본 정부의 식민정책을 논하기 전에 이와미 쥬타로를 논해야만 한다.
 앞서 말한 바를 반복하자면 이와미 쥬타로는 옛된 사람은 물론이요 현대 사람보다 생명으로 풍부한 경멸할 수 없는 인간이다. 확실히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와미 쥬타로에 비해 조금도 손색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명백히 그림책 태합기의 주인공인 전설적 인물의 힘이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역사를 무대로 대연극을 꾸민 도쿠가와 이에야스도 역시나 도요토미 히데요시처럼 광채를 내뿜어야 한다. 또 지금도 순수한 영웅 숭배의 대상이 되는 존재는 대부분 그들의 머리 위에 가공의 원광을 두르고 있다. 넓은 세상 속에는 고금왕래 그런 원강의 제조 업자가 많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이를테면 로맹 롤랑전을 쓴 선량한 슈테판 츠바이크는 그야말로 그들을 대표하는 자이다.
 내가 이와미 쥬타로에게 경멸을 느끼는 건 사실이다. 쥬타로도 국수회 장사처럼 사색은 잘 하지 않은 듯하다. 이를테면 가련한 여동생 오츠지가 옥내에서 죽고 나서야 그제야 감옥을 부수러 가고, 묘하게 꿈 속 예지를 믿거나 중요한 일을 앞둔 주제에 비비 퇴치나 오로치 퇴치 등에 힘을 주는 등 항상 무분별한 행동만 하고 있다. 그 점은 키쿠치 칸에게 놀아나는 것도 도리가 없다. 하지만 이와미 쥬타로는 어떠한 악덕도 갚을 수 있을 정도로 커다란 미덕을 지니고 있다. 아니, 꼭 미덕이라곤 할 수 없다. 오히려 선악의 기로에 선 유일무이한 특색이다. 이와미 쥬타로는 인간 이상으로 강하다. (물론 쥬타로의 동류인 한 무리 호걸은 예외이다.) 쥬타로의 분노를 내뿜으면 두꺼운 철격자도 모시풀처럼 둘로 쪼개지고 만다. 비비나 오로치도 일격에 마지막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천 근의 바위를 굴리는 것도 식은 죽 먹기다. 유라 해변가의 해적은 천 명 가량이 단숨에 물 위에 떠올랐다. 하늘의 다리서 싸울 때는 이천오백 명의 대군을 모조리 베어버렸다. 어찌 되었든 쥬타로의 강함은 천하무적이라 해야만 한다. 그런 강용은 그 자체로 우리 말세의 중생의 마음에 대환희를 주는 특색이다.
 소심한 정신적 관군은 얼마든지 비난하라지. 하늘의 봉우리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야마토시마네를 이룬 이후로 우리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건 이런 강용의 소유자이다. 항상 이 선악의 개념을 다리 아래서 유린하는 호걸이다. 우리의 마음은 이제까지 죄악의 의식서 벗어나지 못했다. 아오니 요시 나라의 시민은 계란을 먹는 걸 죄악으로 여겼다. 그런가 하면 현대 도쿄 시민은 계란을 먹지 않는 게 죄악이다. 이는 물론 계란뿐일까. '우리가'에 대한 신앙이 얄팍하여 영원한 겁쟁이인 우리는 우리 안에 있는 자연에게도 죄의식을 품고 있다. 하지만 호걸은 우리처럼 죄의식에 번뇌하지 않는다. 실천윤리 교과서는 물론이요 천지신명의 굽어살핌마저 일소하고 만다. 일소하고 마는 건 '나'에 대한 신앙이 강한 결과이다. 이를테면 신화 시절의 호걸 스사노오노미코토는 어떨까. 스사노오는 치쿠라오키도의 형별을 받았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형별을 받았다 한들 죄의식은 스사노오를 조금도 번거롭게 하지 않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스사노오는 타카마가하라 밖에서 형어의 모습을 보자마자 그렇게 쾌활하게 우케모치의 신을 벨 용기는 낼 수 없었으리라. 우리는 그런 왕성한 '나'에 대한 우리의 마음을 따스히 대워줄 생명의 불꽃을 느낀다. 혹은 우리에게 도달하려는 초인의 얼굴을 느낀다.
 우리는 정말 열렬히 이와미 쥬타로를 사랑한다. 그뿐 아니라 사랑하는 건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사랑을 소위 강자를 향한 사랑으로만 해석한다면 그건 우리를 속이는 일이다. 확실히 몇 명의 정치가나 부호는 선악의 기로에 서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기로에 선 걸 항상 비밀로 삼는다. 또 그들은 그 비밀에 대한 죄의식서 벗어날 수 없다. 비밀은 반드시 나무라야 할 일이 아니다. 실제로 고대 호걸 또한 가축에 닮은 우리를 없애기 위해 이따금 가면을 활용한 듯하다. 하지만 죄의식에 괴로워하는 건 필시 호걸이 할 일이 아니다. 그들은 강하다기 보다 되려 병적인 욕망에 지배될 정도로 약하다. 만약 거짓말이라 생각한다면 시험삼아 그들을 삼 년 가량 감옥 안에 가둬 보아라. 그들은 반드시 니체 대신에 신란을 발견하리라. 우리가 사랑하는 호걸은 그들과 가장 먼 존재이다. 만약 그들에 비한다면 활동사진 속 호걸마저 훨씬 초인의 면모를 가지고 있다 해야 하리라. 실제로 우리는 그들보다 활동사진 속 호걸을 사랑한다. 허리케인 해치가 근대적 부호에게 쓰러지는 광경은 보고 견디기 힘들다. 하지만 근대적 부호가 허리케인 해치에게――허리케인 해치마저 쓰러질 정도로 겁많은 그들의 일단에 관심을 가질지는 의문이다.
 이와미 쥬타로의 무용전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바는 이미 앞서 말한 바 있다. 하지만 쥬타로의 모험은 하나 같이 말세의 우리에게 같은 흥미를 주는 건 아니다. 그중 가장 흥미로운 건 감옥 부수기와 비비 퇴치 둘이다. 한 나라의 감옥을 부수는 건 국법을 부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비비도 단순히 비비라기 보다 매년 인신 공양을 받아 온 우두명신이라 칭해지는 요신이다. 그럼 쥬타로는 감옥을 부수는 것과 동시에 인간의 법률을 유린하고 더욱이 또 비비 퇴치와 동시에 신이란 우상의 법률을 유린했다 말해야 하리라. 이는 쥬타로 한 사람에 국한되지 않고 위로는 스사노오부터 아래론 미카엘 바쿠닌에 이르는 호걸의 평생을 상징한다. 아니, 더욱이 한 발 나아가자면 단독 행보하는 갖은 사람의 사상적 평생을 상징한다. 그들은 모두 인간의 허위와 신의 허위를 유린해 왔다. 장래에도 또 갖은 허위를 유린하는 걸 멈추지 않으리라. 쥬타로가 퇴치한 비비의 자손은 지금도 인신 공양을 받아 먹고 있다. 감옥도――감옥은 공간으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죄인이란 것조차 알아차리지 못하는 신시대의 복장을 한 죄수 부부는 끝없이 긴자 거리를 걷고 있다. 
 인간의 진보는 느리다. 어쩌면 달팽이 걸음보다 더 느릴지 모르다. 하지만 아무리 느리다 한들 아나톨 프랑스가 말한 것처럼 "천천히 현인이 꿈꾼 흔적을 실현한다"는 건 사실이다. 과거 중국의 현인은 거열형을 바라보거나 우귀사신상을 바라보면서 요순의 치세를 꿈꿨다. (장래를 과거서 찾는 건 우리가 항상 하는 일이다. 우리의 심안은 이야기 속 개구리 눈과 조금은 닮은 듯하다.) 요순의 치세는 오늘도 구름과 연기 너머에 누워 있다. 하지만 수레는 과거처럼 거열형에 사용되지 않는다. 우귀사신상도 골동품점이나 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는 게 고작이다. 또 이러한 변화를 진보라 할 수 없을지언정 인간 문명은 유사 이후로 수천 년이 지났을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얼음 아래에 인간 문명을 묻은 건 육백만 년 후의 일이라 한다. 인간도 유구한 육백만 년 이내엔 현저한 진보를 이룰지 모른다. 적어도 그 가능성을 믿는 게헛소리라곤 할 수 없으리라. 만약 이런 확신이 사실이라면 인간의 장래는 우리가 사랑하는 이와미 쥬타로의 손에 떨어져야만 한다. 감옥을 박살내고 비비를 죽인 초인의 손에 떨어져야만 한다.
 내가 이와미 쥬타로를 안 건 혼죠 오타케쿠라에 위치한 책 대여점이었다. 이와미 쥬타로만이 아니다. 하가이 잇신사이를 안 것도 달기를 안 것도 쿠니사다 츄지를 안 것도 유텐을 안 것도 야오야오시치를 안 것도 카미유이 신자를 안 것도 하라다 카이를 안 것도 사노 지로자에몬을 안 것도――여항무명의 천재가 만든 전설적 인물을 안 건 전부 이 대여점 덕이다. 나는 이렇게 말하는 동안에도 여름의 서쪽 햇살이 스며든 좁고 갑갑한 가게를 잊을 수 없다. 가게 현관에는 유리 풍경 하나가 탄자쿠를 내걸고 있다. 또 벽에는 몇 백인지 알 수 없는 코단 속기본이 담겨 있다. 마지막으로 낡은 갈대발 문 뒤에선 우메보시를 단 할머니 한 명이 꽃비녀를 차고 있다――아아, 나는 그 대여점에 얼마나 큰 그리움을 느끼는가. 내게 문예를 가르친 건 대학도 아니고 도서관도 아니다. 실로 그 단조롭고 쓸쓸한 대여점이다. 나는 그곳에 줄지은 책에서 아마 평생을 들여도 얻지 못할 교훈을 배웠다. 초인이라 불리는 아나키스트의 존엄을 배운 것도 그 중 하나이다. 확실히 초인이란 말은 니체의 책을 읽은 후에야 겨우 내 어휘가 됐을지 모른다. 하지만 초인 그 자체는――위대한 이와미 쥬타로는 전가의 보도를 허리에 찬 채로 천하를 노려보는 그 모습은 진작 내 어린 마음에 결연히 산에서 내려 온 짜라투스트라의 대업을 가르쳐주었다. 그 대여점은 진작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으리라. 하지만 이와미 쥬타로는 오늘도 내 안에 발랄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 항상 인생의 십자로서 유유히 부채질 하면서.

       키무라 손사이

 올해 봄, 나는 1년만에 교토 박물관을 구경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평소부터 과다기미인 위산이 한 층 더 나를 괴롭혔다. 소를 듣고 고기맛을 잊는 건 성인聖人에게나 가능한 위업이다. 나는 낙타 셔츠 아래에 벼룩이라도 기는 것처럼 느낀 끝에 설령 사카다 토쥬로가 연기하는 '토쥬로의 사랑'을 보더라도 도무지 마음 편히 무대 위를 주목할 여유를 잃고 말았다. 하물며 위를 덮친 위산은 갖은 향락을 불가능하게 했다. 심지어 당시의 진열품 중에선 대단한 걸작도 없었던 거 같다. 나는 먼저 불화부터 도자기, 불상, 오래된 묵적 등에서 하나하나 나쁜 작품을 발견했다. 특히 쿄한센인지의 족자에 두터운 글자가 치덕치덕 그려져 있는 건 거의 우리 위병 환자에게 자살 유혹을 주기 위해 붓을 휘두른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그러는 사이 나는 난가만이 걸린 진열실로 흘려 들었다. 그 방도 도통 볼품 없었다. 무엇보다 테츠오의 연산은 가벼운 돌처럼 이끼 투성이였다. 둘째로 후지모토 테츠세키의 수목은 녹슨 나이프처럼 살기를 두르고 있었다. 셋째로 우라가미 교쿠도의 폭포는 류큐의 포성처럼 푹푹 찌고 있었다. 넷째로――어찌 됐든 난가란 난가는 대부분 내 신경을 짜증나게 할 뿐이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커다란 유리 선반이 줄지은 방을 순교자처럼 걸어 갔다. 그러자 내 눈앞에 기적보다도 더 뜬금 없이 나타난 건 조그마한 종이 안의 산수山水였다. 이 산수는 얼핏 보기엔 필묵종횡 같은 정취는 없다. 되려 어딘가 아마추어 같이 무작정 붓을 놀린 모습마저 두르고 있다. 그것만 잘라내 보면 교쿠도나 테츠오는 물론이요 이를테면 코무로 스이운에게도 몇 걸음 밀릴지 모른다. 하지만 돌 이끼의 푸른색이나 살구꽃이 내쁨는 경색은 정묘한 코무로 스이운은 물론이요 교쿠도나 테츠오도 몰랐을 정도로 참으로 화창하게 개어 있다. 나는 이 산수를 바라보았을 때, 곧장 두터운 유리 너머로 생기 넘치는 봄바람이 전해지는 걸 느꼈고 또 더욱이 위에서 일렁이는 위산이 썰물처럼 가시는 걸 느꼈다. 키무라 손사이, 통칭 아키치. 겐카도라 불린 오사카 쵸닌이 이 산수를 그린 아마추어 작가이다.
 손사이의 이름은 코쿄, 자는 세숙세이슈쿠이라 하며 오사카 호리에에 살던 주조장 자식이다. 손사이 본인은 "어릴 적부터 빈약했다. 보육에 전념했다." 그렇게 말하는 걸 보면 일단 몸은 약했던 듯하다. 하지만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대부분 건전한 정신은 불건전한 육체에 깃드는 것처럼 손사이의 정신 또한 어릴 적부터 듬직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거기에 행복한 부르주아 가정은 교양의 기회를 주는 걸 조금도 아끼지 않았다. 손사이 자신이 이야기한 전기 일부분을 발췌하자면――
 "나는 어릴 적부터 빈약하여 보육에 전념했다. 아버지가 나를 불쌍히 여겨 풀, 나무, 꽃 등을 심는 걸 허락해주셨다. 친족 중에 약을 파는 자가 있어서 토산물을 잘 안다 이야기하니 토 쟈쿠스이, 마츠오카 겐다츠의 이야기를 들었다. 열두세 살이 되었을 적 교토서 마츠오카의 문인 츠시마 츠네노신이 토산물을 잘 아는 걸 알아, 아버지가 교토로 가실 적에 처음으로 츠시마 선생님을 뵈어 풀과 나무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해 열다섯 살, 아버지를 잃고 열여섯 살 봄에 어머니를 따라 교토로 향해 다시 츠시마 씨 밑에서 문인이 되는 기회를 얻었다." 
 "나는 열다섯 살부터 그림을 알았는데 우리 고향의 오오카 슌보쿠가 카리노류 그림으로 명성을 알렸다. 따라서 그 밑에서 배웠다. 슌보쿠는 가이시엔카덴을 따라 명나라 사람의 그림을 모사하여 "명조자견"이란 색채의 그림책을 만들어냈다. 나는 이를 보고 처음으로 중국 그림을 꿈꾸게 되었다. 이때 아버지의 친구, 와쇼코호리야마 야나기자와콘타이후(요컨대 류리쿄이다.)가 매일 같이 집을 찾아왔다. 따라서 야나기자와의 그림을 배웠다.(중략) 열두 살 적에 나가사키에 카쿠테이란 사람이 있었다. 나니와에서 손님이 왔는데 나가사키진다이진자에몬(요컨대 유우히이다)의 문인이었다. 키나이서 난빈류가 퍼지기 시작한 것도 이 사람의 기점이다. 따라서 나는 꽃과 새를 배우고 이케노 슌헤이(요컨대 타이가이다)를 따라 산수를 배웠다."
 "내가 열한살일 때 친척 중에 코다마시카타야마츄조(요컨대 홋카이이다)의 문인이 있어서 나를 불러 이름을 청했다. 나는 이름은 코, 자는 센리라 칭했다. 그후 카타야마 씨는 교토서 살았다. 내가 열아홉살일 적에 카타야마는 다시 나니와로 내려가 이타치보리서 살았다. 나는 그 아래서 시를 읽고 사서육경과 한문 등을 읽는 걸 깨우쳤다."
 이런 몇 문장이 말해주는 것처럼 손사이가 학예에 뜻을 둔 건 약관도 되지 않았을 때이며 손사이가 스승으로 둔 학자나 화가도 대부분 당대의 명인이다. 그뿐일까. 남만의 향이 풍기는 새로운 지식으로 풍부한 토산물 공부로 경도한 것은 물론, '명조자견'을 보고 곧 장강의 갈대와 물억새 사이서 자란 남송파의 화법에 심취한 것도 소년 다운 정열을 말해주고 있다.
 이 총명한 주조사 자제는 이런 축복 받은 환경을 바탕으로 서서히 자아를 완성했다. 그 자아는 타이가처럼 순수한 예술가는 아니다. 되려 열여섯 방면의 스승이 되었다 전해지는 류리쿄에 가까운 딜레탕트호사가이다. 하지만 류리쿄의 딜레탕티즘은 평범함을 뛰어넘은 재능을 등에 업고 있는 동시에 데카당스퇴폐의 향기도 풍기고 있다. 적어도 수필 '홀로 자다' 속에 남자가 쌓은 평생의 학문을 경국지색의 속옷으로 바꾸려 한 화루계 사람의 기질이 담겨 있음은 사실이라고 해야만 한다. 하지만 손사이의 딜레탕티즘은 변환자재의 묘가 없는 대신에 참으로 사람 좋은 독서가 다운 청아한 품격을 갖추고 있다. 류리쿄는 거지의 차를 마시거나 말 위에서 맹인 여자의 샤미센을 연주하는 듯 갖은 기행을 저질렀다. 혹은 저질렀다 전해진다. 하지만 손사이에 얽힌 전설은 하나 같이 상식선에 들어온다. 가장 세상 사람을 놀래킨 것도 "에도의 붓 공예꾼 호치도가 어느 날 나니와에 놀러 와 겐카도를 찾으니 잠시 기다리라며 그 동안 심심풀이로 쓰라 첩 하나를 내밀었다. 뭔가 싶어 내용물을 열어보니 에도 붓 공예꾼의 가호를 적은 명함을 한 장도 빠짐 없이 모은 것이었다."(야마자키 비세이) 정도의 이야기 밖에 나오지 않는다. 물론 이 이야기도 '얼마나 호사스러운지 상상해보라'란 경우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손사이는 확연히 호치도의 주인에게 무언의 인사를 건넨 것이다. 더욱이 편한 말로 바꿔보자면 앨범에 가득한 공예꾼들의 명함을 "멋있지?"하고 내민 셈이다. 이는 물론 신랄한 창끝을 보여준 것임에 분명하다. 하지만 류리쿄에 비하면――특히 "홀로 자다"의 작가인 류리쿄에 비하면 훨씬 온건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분명하다.
 "나는 어릴 적부터 내가 모르는 일, 고가쿠, 관현, 사루가쿠, 조쿠요, 바둑, 도박, 기관, 목소리 장난 등 갖은 취미를 끝내 알 기회가 없었다. 하물며 소년 시절부턴 일이 많아져 그럴 새가 없어졌다. 도박을 좋아하지 않는 건 내게 보양의 뜻이 있기 때문이다."
 손사이가 소위 오락에 조금도 관심이 없었던 건 이 한 줄만 봐도 알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건 전적으로 희귀한 책에 있다. 명물다식이란 그러한 화첩에 있다. 나는 미력하나 요 몇 년 동안 돈을 써왔기에 장서에 부족함은 없다. 지나치다 해야 하리라. 그 외에도 일본의 오래된 서화, 근대 문인들의 시문, 중국의 진품 서화, 일본 각 지방의 지도, 중국의 변방 지도, 풀과 나무, 금과 돌, 옥, 새와 동물, 오래된 동전과 그릇, 중국 물건, 변방의 괴이한 물건 등 갖은 게 있는데 모두 고색에 쓴다. 달리 장식품은 없다."
 손사이는 이러한 컬렉션을 사랑하고 겐카도를 찾는 번 손님들에게 이러한 컬렉션을 보여주는 걸 사랑했다. 아니, 컬렉션이라기 보다 어엿한 박물관이다. 어린 시절부터 친구였던 타노무라 치쿠덴이 '소장한 법서, 명화, 금석, 이정 밑 변방의 기이한 물건들이 한없이 쌓여 있다"고 말한 것도 꼭 과장은 아니었던 셈이다. 손사이는 이러한 컬렉션을 "모두 고색에 사용했다"고 말했다. 중국 변방 지도 중에는 유럽이나 아메리카 대륙도 그려진 게 있었을 터이다. 아니, 변방의 기이한 물건 중에는 사라사니 동판화, 돋보기, "다라아카"라는 용알 알콜 조림이나 혹은 또 클레오파트라의 금발 따위도(이는 물론 가품이다) 섞여 있을 게 분명하다. 이러한 컬렉션을 "고색했다"는 총명한 딜레당트는 불가사의한 문명의 씨앗들을 앞에 두고 어떠한 감개를 품었을까? 적어도 세계의 크기 앞에서 어떤꿈을 꾸었을까?
 "나니와의 땅, 고대부터 예술로 명성 높은 자들을 배출하여 그 이름들을 듣는 자 적지 않으나 그 정통함이 겐카도만한 자는 얼마 되지 않는다.(중략) 과거에 나가사키를 유량할 때에 중국의 풍속을 물을 생각에 황보산에 살았다는 다이죠 선사를 찾아 중국 풍속을 묻는 자가 있었다. 겐카도 또한 이 선사와 같은 사람으로, 이는 굳이 말할 바가 못된다. 선사는 본래 중국 사람으로 황보산에 살았었다."(야마자키 비세이)
 "이는 굳이 말할 바가 못 된다"란 말이 찬사인지는 의문이다. 혹은 평생의 대업 이외에도 수많은 걸 사랑하는 딜레당트에게 가하는 일격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일격을 가했다 한들 손사이가 얼마나 중국에 정통했는지는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이다. 손사이는 말하자면 중국에 관한 최대 권위자 중 한 명이었다. 중국 그림을 사랑하고, 중국 문예를 사랑하고, 중국 철학을 사랑한 시대에 이런 겐카도 주인의 다식함에 명성이 돌아 오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과연 일본의 문인이나 묵객은 손사이가 명성을 올림과 함께 속속 그 문에 모여 들었다. 시바노 리츠잔, 히도 지슈, 코가 세이리, 라이 슌스이, 쿠와야마 교쿠슈, 쿠시로 운젠, 타치바라 스이켄, 노로 카이세키, 타노무라 치쿠덴 등이 그 친구이다. 특히 타노무라 치쿠덴은………위대한 예술가보다 더 좋은 예술가였던 치쿠덴은 이 늙은 딜레당트 앞에서 가장 아름다운 경의를 표현했다. "나는 처음으로 에도서 벗어나 오사카를 지나 모쿠세이슈쿠(요컨대 손사이다)를 찾았다. 사람들이 나를 데리고 텐노데라의 부도에 오르려 했다. 왈, 토요토미 미노미코가 이 장소를 만들어 세월이 흐르기를 약 천 년, 노나라의 운광이 의연히 남아 있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이슈쿠를 본다. 다음 해 다시 찾으니 세이슈쿠는 이미 죽었고 부도 또한 사라져 있었다."
 손사이는 이러한 명성 속에서 유유히 예순의 평생을 마쳤다. 이 예순의 평생은 순박한 우상숭배자에겐 평범하게 보일지 모른다. 손사이가 후대에 전한 건 명성 높은 겐카도 컬렉션을 제외하면 몇 권의 시문집과 수첩의 산수뿐이다. 하지만 다이쇼의 오늘날마저 제국대학 도서관의 장서를 아무렇지 않게 잿더미로 바꾼 쾌담무욕한 우리 조국은 물론 겐카도 컬렉션 또한 비참하게 산화시키고 말았다. 다라아카는 어디로 갔는가? 타이가나 류리쿄의 그림은 어디로 갔는가? 클레오파트라의 금발은――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하지만 필경 겐카도 주인은 삭막한 저서와 그림 이외엔 아무것도 남기지 못했다 말해야만 한다.
 아무것도?――아니, 비단 '아무것도'는 아니다. 풍부한 겐카도 컬렉션은――특히 그 수많은 장서는 당대 학자나 예술가에게 크고 많은 선례를 보여주었다. 그러한 선례가 그들을 고무하고 그들을 신세계로 비약하게 한 건 마치 로댕이나 톨스토이, 혹은 세잔느가 우리를 자극한 것과 마찬가지다. 이 후원자 겸 수집가 키무라 손사이의 은혜도 역시나 후대에 전해진 유산――근엄한 선인의 판단에 따르면 최대의 유산으로 꼽아야 하리라. 하지만 냉혹히 말하자면 그건 마루젠 주식회사가 우리에게 준 은혜와 오십 보 백 보의 차이다. 적어도 소위 취미로 풍부한 부호 혹은 후호의 자제가 우리에게 주는 은혜와 오십 보 백 보 차이다. 나는 그러한 은혜 앞에 감사의 뜻을 표하지 말란 게 아니다. 하지만 단지 그것만으로 겐카도 주인을 찬미하는 건――애당초 천하의 후원자란 자아도취하는 것만으로도 유해하지 않은가!
 다시 한 번 편의상 반복하자면 손사이가 후대에 전한 건 몇 권의 시문집과 몇 첩의 산수뿐이다. 만약 겐카도 컬렉션을 당대에 베푼 은혜 이외에 손사이의 진가를 찾자면 도리 없이 그러한 작품에――적어도 앞서 말한 한 폭의 춘산도로 귀결되어야 한다. 그 그림 속에서 넘치는 봄은 이를테면 위대한 타이가처럼 조화를 자신의 냄비 속에 녹인 더할 나위 없는 감칠미로 풍부하지는 않다. 하지만 또 부손처럼 독특하고 절묘한 식칼을 천지에 가한 상쾌한 바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도 평범하진 않다. 마치 큰 미소와 닮은 밝고 일렁이는 무언가가 저절로 종이 위에서 넘치고 있다. 나는 그 모든 것에서 겐카도 주인의 진면모를――조용히 인생을 즐기는 딜레당트의 혼을 발견했다. 설령 겐카도 컬렉션은 당대 학자나 예술가에게 조금의 은혜를 주었다 한들 그건 내가 고려해야 할 일은 아니다. 나는 단지 이 딜레당트가――얼마나 낙막한 인생을 향락했는지 알고 있다. 풍류무쌍의 오사카 쵸닌에게 친근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파스칼이 말한 것처럼 무언가를 생각하는 갈대이다. 하지만 실은 그뿐이 아니다. 한 면으론 무언가를 생각하는 동시에 또 다른 면으론 줄곧 무언가를 느끼는 갈대이다. 물론 느낀다고 단언하지 않아도 바람에 잎이 살랑이는 건 그 바람을 느끼는 것과 닮아 있으리라. 하지만 우리가 느끼는 건 그만큼 기계적이지 않다. 아니, 황혼의 미풍 속에서 만리의 무역풍을 느끼는 일도 적지 않은 건 사실이다. 이를테면 한 그루 사이프러스는 미풍보다 사람을 움직이지 못할지 모른다. 하지만 천재로 불타던 고흐는 그 한 그루 사이프러스서도 굉장한 생명을 느꼈다. 때문에 낙막한 인생을 충분히 향락하기 위해서는 미묘한 걸 생각하는 동시에 미묘한 것을 느껴야만 한다. 혹은 뇌수를 갖춘 동시에 신경을 갖춰야 한다. 과연 옛 딜레당트는 다소의 학자인 동시에 다소의 예술가이기 마련이었다. 토산물의 공부를 쫓음과 동시에 그림에 뜻을 둔 손사이도 그런 사람 중 하나이다. 미묘한 걸 생각하는 동시에 미묘한 걸 느끼는 갈대――그러고 보면 손사이는 신기하게도 겐카蒹葭, 갈대도 주인이라 칭해졌다!

 하지만 가시가 없는 장미는 있어도 괴로움을 동반하지 않는 향락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묘한 걸 생각하는 동시에 미묘한 걸 느끼는 갈대는 요컨대 미묘하게 괴로워하는 갈대이다. 때문에 총명한 딜레당트는 지옥의 업화를 피하기 위해 천당의 장엄함을 버려야만 한다. 더욱이 짧게 말하자면 갖은 나쁜 철저함을 피해야만 한다. 순박한 우상숭배자는 물론 이러한 딜레당트의 태도를 미온적이라 비웃으리라. 하지만 미온적으로 사는가의 여부는 향락적 태도의 여부이다. 항락적 태도를 부정한다면――고대부터 이어진 어떠한 철학도 인간의 사명을 밝히는데 성공하지 못한 건 사실이다. 과거엔 그 사실이 불가능함을 알고 아무리 인을 설파한 공자마저 미온적 중용을 사랑하였다. 아직은 카페에 출몰하는 것 이외에 어떤 일도 성취하지 않은 소년마저도 작열적인 철저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건 어찌 되었든 욕심 깊게 환희를 추구하는 건 향락의 온전한 방법이 아니다. 손사이도 이 예외서 벗어나지 않아서 항상 중용을 사랑하였다. 손사이 자신의 행적을 기록한 한 권의 "겐카도 잡록"은 마음의 천칭을 얼마나 균형 잡게 유지했나를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빈부의 로맨티시즘만큼 문인이나 묵객을 사로 잡은 건 없다. 그들은 대부분 청빈을 과시하거나 혹은 호화함을 과시한다. 하지만 손사이만은 홀로 검소에 머물러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내게 돈을 주는데 인색하셔서 매해 받는 돈은 삼십 금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친구의 동정을 얻기 위해 조금 문아에 젖는 일도 있었다. 그렇게 매사에 검소하지 않았다면 나는 오늘의 업을 이루지 못했으리라. 세상 사람들은 나의 진실을 알지 못하고 좋은 집에서 잘 누린 사람으로 여긴다. 이는 내 본의가 아니다."
 1년에 30량의 수입이라면 한 달에 2량 2분의 수입이다. 아무리 호레키 메이와의 과거라 한들 한 달에 2량 2분의 수입은 많은 돈이라 할 수 없으리라. 그럼에도 문아에 젖는 걸로 모자라 겐카도 컬렉션마저 남긴 건 그 자체로 호화의 속악함을 보여주는 거라 해야만 하리라.(아쉽게도 나는 지금 여행 중이라 참고할 서적을 지니고 있지 않다. 하지만 호레키메이와는 쌀 한 석에 은 육십 몬메에 해당한다. 가령 금 1량을 은 40 몬메 정도로 생각하여 쌀가격을 표준으로 환산하면 당시 1년에 30량은 오늘의 천 엔 미만이리라. 물론 이는 추측일 뿐으로 믿을 수 있는 계산은 아니다.)
 "호레키 6년, 내가 스물한 살일 적에 모리 씨를 아내로 들였다. 평생 빈약했던 나는 병을 자주 앓았다. 하물며 십 년이 지났음에도 아이 하나 가지지 못햇다. 때문에 어머니가 이를 애처로워 했다. 메이와 2년에 아내와 상담해 야마나카 씨를 아내로 맞이했다.(중략) 3년이 지나 모리 씨 메이와 5년 겨울에 여자아이 하나를 낳았다. 또 메이와 8년에 여자 아이 하나를 낳았다. 야마나키 씨에게 도움을 받아 두 아이를 아겼다. 때문에 처첩의 반감이나 혐오는 없이 화기애애했다."
 검소를 고수한 손사이가 편애를 피한 건 당연하다. 아마 처첩이 질투하지 않은 건 정숙함 때문만은 아니리라.
 "나는 약관부터 장세까지 시문에 몰두했다. 들어 오는 게 많아 줄 게 없어 곤란했다. 하물며 재능이 볼품 없어 재빠르진 못 했다. 이는 크게 아쉬운 일이다. 가깝되 먼 관계이다. 다행히 부족한 재능이라도 쥐어 짜내면 운 좋게 좋은 작품을 만날 때 있어 즐겁곤 하다."
 손사이는 시문을 사랑했다. 심지어 손사이는 그 시문에마저 허투루 재능을 필력하지 않았다. 비록 주고 받는 의리는 다 하지 못해도 좋은 구를 담담히 품에 넣는 즐거움은 고수하고 있다. 이러한 태도가 보이는 게 비단 위에서 꼽은 몇 구절에만 국한된 건 아니다. 손사이의 평생을 지배하는 건 실로 이 미묘한 절제이다. 이 자신을 억누르는 동시에 자신을 풀어 놓은 고삐 조절이다. 겐카도 주인이 청복 속에서 육십 년 평생을 마친 것도 우연이라고는 못 하리라.
 앞서도 말한 춘산도는 노목이나 거암 옆에 난 한 줄기 외길로 통해 있다. 그 외길이 이어진 곳은 백 년설에 묻힌 사람 없는 언덕임에 분명하다. 세상이 천재라 부르는 자들은 그러한 언덕을 오르는 걸 주저하지 않는 용맹과감한 외로운 손님이다. 백년설을 답파하는 건 물론 오랜 위업이리라. 하지만 언덕 위에 꽃이 핀 걸 보고 물줄기 흐르는 걸 들으며 구름과 같이 왕래하는 것 역시 평생의 즐거움이다. 내가 사랑하는 겐카도 주인은 이 삭막한 봄산서 홀로 당나귀를 끌었다. 춘산도가 정취로 풍부한 것오 의아한 일은 아닐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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