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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928

미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내가 대학을 졸업한 해의 여름, 쿠메 마사오와 함께 가즈사 이치노미야의 해안가에 놀러 갔다. 놀러 간다고 해도 책을 읽거나 원고를 쓴 건 매한가지였지만, 뭐 바다에 들어가고 산책을 하는 게 하루의 대부분이었다. 어느 저녁. 우리는 이치노미야의 거리를 산책하여 사람 얼굴도 보이지 않게 됐을 적에 터덜터덜 숙소로 돌아왔다. 숙소에 이르기 위해서는 통보리사초나 방풍 등이 자란 모래산 하나를 넘어야 했다. 마침 그 모래산 위에 올랐을 때, 쿠메가 무어라 외치더니 모래산을 달려 내려갔다. 나는 왜 저러나 싶었지만 어찌 되었든 무언가 달려야 하는 이유라도 있겠지 싶어 역시나 그 뒤를 따라 달렸다. 인기척 없는 모래산 위에 홀로 남겨지는 게 꺼림칙했단 사실도 등을 떠밀었을 게 분명하다. 하지만 쿠메는 중학생 때 야구.. 2021. 2. 23.
히라타 선생님의 번역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국민 문고 간행회의 '세계 명작 대관'의 제1부 16권의――말하고 보니 조금 길다. 어찌 되었든 국민 문고 간행회의 '세계 명작 대관'의 제1부 16권의 대다수는 히라타 토쿠보쿠 선생님이 번역을 맡으셨다. 히라타 선생님은 아직 한 번 밖에 뵙지 못 했다. 하지만 호탕하고, 상냥하며, 아름다운 목소리를 지녔는데――요컨대 참으로 왕년의 '문학계' 사람다운, 아직도 산뜻한 선생님이시다. 이런 산뜻한 선생님께서 국민 문고 간행회의 '세계 명작 대관'의 제1부 16권의 대다수를 번역했단 사실은 적어도 내게는 신비하게 비쳤다. 본래 산뜻하단 말에서는 저력을 떠올리기 어렵다. 하지만 히라타 선생님의 번역을 보면 디킨스, 새커리, 램, 메러디스, 제임스, 하디, 와일드, 콘래드 등을 망라하고 있다. 나는 번역은 고사하.. 2021. 2. 23.
눈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중앙선 기차의 창밖 너머로 산맥 하나를 바라보았다. 산맥은 물론 새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건 눈보다도 산맥의 피부에 가까운 색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산맥을 바라보며 문득 어떤 작은 사건을 떠올렸다. 벌써 4, 5년은 된 역시나 어느 겨울날 오후. 나는 어떤 친구의 작업실에서――허름한 철제 스토브 앞에서 친구나 그의 모델과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작업실에는 그의 유화 말고는 어떤 장식도 되어 있지 않았다. 담배를 물고 있던 단발 모델도――모델은 혼혈아 같은 일종의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인지 자연스레 자랄 속눈썹을 한 올도 남김없이 뽑고 있었다. 대화는 어느 틈엔가 그쯤의 험악한 추위로 옮겨가 있었다. 친구는 정원의 흙이 어떻게 계절을 느끼는지 이.. 2021. 2. 23.
게와 원숭이의 싸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게의 주먹밥을 빼앗은 원숭이는 기어코 게의 손에 죽고 말았다. 게는 절구, 벌, 계란과 함께 원망스러운 원숭이를 죽였다.――새삼 그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으리라. 단지 원숭이를 죽인 후, 게를 시작한 동지들은 어떤 운명에 이르렀는가. 그걸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동화는 이 이야기를 전혀 언급하지 않기에. 아니, 이야기하지 않는 건 고사하고 마치 게는 구멍 속에서, 절구는 부엌의 구석에서, 벌은 제 벌집에서, 계란은 겉겨 속에서 무사태평한 일생을 보낸 것처럼 포장하고 있다. 하지만 그건 거짓이다. 그들은 원수를 갚은 후, 모조리 경관에 체포되어 수감되었다. 심지어 재판을 거듭한 결과 주범인 게는 사형, 절구, 벌, 계란과 같은 공범은 무기징역의 선고를 받았다. 동화밖에 알지 못 하는 독자는 이런 그들의 운.. 2021. 2. 23.
'가면' 사람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학창 시절의 나는 제3차 및 제4차 '신사조' 동인 사람들과 가장 친밀히 왕래했다. 본래 작가 지망생이 아니었던 내가 기어코 작가가 되어버린 건 전부 그들의 악영향이다. 전부?――물론 전부인지는 의문일지 모르겠다. 당시의 나는 그들 이외에도 와세다 사람들과 교제했다. 그 사람들 또한 역시 청정한 내게 악영향을 끼친 건 분명하다. 그 사람들이란 동인잡지 '가면'을 내던 히나츠 코노스케, 사이조 야소, 모리구치 다리 제군이다. 나는 한두 번 산구 마코토 군과 함께 붉은 초립 전등이 들어온 사이조 군의 객간에 놀러 갔다. 히나츠 군이나 모리구치 군은 물론, 선생격인 요시에 코간 씨와 만나게 된 것도 그 객간이다. 당시에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는 거의 기억나지 않는다. 단지 언젠가 괴담을 나눈 밤, 사람 하나 지.. 2021. 2. 23.
형 같은 느낌 ――키쿠치 칸 씨의 인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나는 키쿠치 칸과 함께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어색함을 느낀 적이 없다. 동시에 지루함을 느낀 기억도 전무하다. 키쿠치하고라면 하루 종일 돌아다녀도 질리는 법이 없겠지 싶다.(물론 키쿠치는 질릴지 몰라도.) 왜냐하면, 키쿠치와 함께 있으면 언제나 형과 함께 있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내 좋은 점은 물론 이해해주고, 부주의한 점을 드러내도 동정해주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면 그렇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다. 단지 동생이라 해야 마땅할 내가 이따금 키쿠치의 호의에 기대어 있을 수 없는 일방적인 열을 내뿜을 때도 있지만, 내 입장에서는 그마저도 키쿠치가 형처럼 느껴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이렇게 형처럼 느껴지는 이유의 일부는 물론 키쿠치의 학식이 뛰어나기 때문.. 2021.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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