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현대 대중극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 나카무라 마사츠네에게 답한다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7. 15.
728x90
반응형
SMALL

 

 새로운 '신파新派'――현대대중극――가 왜 일어나지 않는가. 그 첫 번째 이유는 그런 파도가 현재의 일본에 결여되어 있음을 극단 사람들이 문제로 삼지 않고 대중도 그런 연극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일 겁니다.

 실제로 오늘날까지의 신극은 얼핏 그런 방향을 취했어도 문제가 없었지만 신극 당사자는 항상 서양의 "비대중극"――바꿔 말하자면 '전위파'의 운동을 쫓았기에 일반 관객의 관극욕을 직접 자극하지 못하였고 또 그런 걸 자극할 만한 '무대적 매력'을 등한시하며 심지어는 그런 걸 무언가 불순한 거라고 여기기도 했습니다.

 단지 일부 사람들은 그 정도로 청교도적이지 않고 말하자면 관객 본위의 연극에 뜻을 두었습니다만 그때는 이미 소위 '신극적'인 색채서 벗어나 이상하리만치 '구극적이면서 신파적인'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신극'이란 게 배우의 연기 방면에서 조금도 근거 있는 연구가 이뤄지지 않았으니까요. 말하자면 견본을 삼을 게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 정세 속에서 한편 구극이나 신파 배우에게 '현대극'을 연기시키는 모순이 만들어져 구극이나 신파의 배우가 연기하는 '이상한 현대 희곡'이 필요에 따라 자연스레 만들어지고 있죠.

 극작가란 결국 그 시대 배우에 걸맞은 각본 밖에 쓰지 못합니다. 현재의 무대는 안중에 없다 호언하는 극작가라도 확실히 내용이나 형식 같은 부분에선 '혁명적이고 고고할지'모르나 그 희곡을 희곡으로 만드는 본질적 생명에선 역시나 그 시대 배우의 표현 능력을 크게 능가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여기서 실제 문제로 들어가자면 그럼 새로운 극술을 가진 현대 대중극은 어떻게 해야 만들어지는가. 그건 처음부터 그 지점을 목표로 둔 극단이 서양극의 전통부터 배우술까지 닥치는 대로 배워서 이를 일본인의 생활 표현에 적용하여 일종의 자유로우면서도 동시에 합리적인 연기 정신을 터득하고 더욱이 상연 목록의 선정에 있어서도 외국의 '연극 다운 연극'을 충분히 일본화하는 번역을 거치면서도 일본화하기 위해 '신파조'가 되는 걸 피하면서 번안이라고 '줄거리'만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 원작의 연극적 리듬을 살려 '연극의 새로운 재미'를 갱신하여 대중을 납득시키는 마음가짐이 필요합니다. 그런 걸 거듭하는 사이에 분명 일본에도 그걸 모방하거나 내지는 그로부터 암시를 터득한 '재미난 대중 현대 희곡'이 나타나겠지요. 그게 흥행 가치를 가지려면 먼저 '구극이나 신파'와 대립하여 훌륭히 상업 극장의 무대를 점령해야 할 겁니다. 그 후론 배우의 실력에 달렸지요. 그런 방면에서 천재가 나타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습니다.

 그럼 진정한 '신극운동'――요컨대 예술로서의 연극 순화 운동은 그 이후에 이뤄져야만 할 듯합니다.

 나카무라 군도 그전까진 희곡을 쓸 생각이 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리 길지는 않겠지요.(1933년 2월)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