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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쿠치 칸

아쿠타가와 - 키쿠치 칸

by noh0058 2022. 8.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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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쿠타가와의 죽음에 관해 많은 걸 쓸 수 있을 듯, 막상 쓰기 시작하면 아무것도 쓸 수 없다.
 사인은 우리도 확실히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기보다는 결국 세상 사람들이 수긍할만한 구체적인 원인은 없다고 해야 하리라. 결국 아쿠타가와 본인이 말한 것처럼 주된 원인은 "막연한 불안"이리라.
 게다가 2, 3년간의 신체적 피로, 신경쇠약, 번거로운 세속적 고생 같은 것이 그의 절망적 인생관을 더욱 깊게 만들어 그런 결과를 만들었지 싶다.
 작년, 그의 병은 그의 심신을 꽤나 갉아먹었다. 신경쇠약에서 오는 불면증, 망가진 위장, 지병인 치병 등이 서로 뒤엉켜서 그의 생활력을 뺏어간 듯하다. 이런 병에 고민하다 서서히 자살을 결심한 것이리라.
 그런 데다가 요 2, 3년간 그의 세속적 고생은 끊이지 않았다. 우리 안에서 가장 초연하며 세상 일을 피한 아쿠타가와가 가장 세속적 고생을 했다는 건 무슨 아이러니일까.
 그 사례 중 하나로 코분샤에서 낸 "근대 일본 문예 독본"이다. 이 독본은 철두철미한 아쿠타가와가 심혈을 기울여 편집한 책으로, 갖은 문인에게 불평이 없도록 되도록 많은 작가의 작품을 수록했다. 아쿠타가와 입장에서는 누구도 경의를 잃지 않게 하기 위한 배려였다. 덕분에 수록된 작가수는 백이십, 백삼십에 이르렀다. 하지만 너무 철두철미했고, 너무 문예적이었기에 많이 팔리지는 못 했다. 그리고 그 인세 또한 편집을 도운 두, 세 곳으로 갈렸기에 아쿠타가와는 그 노력의 십 분지 일의 보상도 받지 못 했을 정도이다.

 그렇 건만 어찌 된 영문인지 "아쿠타가와는 그 독본으로 돈을 벌어 서재를 세웠다"는 낭설이 만들어졌다. 개중에는 "우리 빈곤한 작가의 작품을 모아 혼자 벌다니 지독한 녀석이다"하고 불평하는 작가마저 있었다. 이러한 낭설을 아쿠타가와가 얼마나 신경 썼던가. 아쿠타가와로선 막막한 소문임이 분명했다. 아쿠타가와는 견디지 못 했는지 "앞으로 그 책 인세는 전부 문예가 협회에 기부하려고"하고 내게 말했다. 나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문예가 협회에 기부하면 되려 문제가 커질 뿐이다. 그런 건 무시해라. 책은 팔리지 않았고, 너도 그렇게나 고생하지 않았나, 질척거리는 녀석들은 떠둘게 두라. 나는 입이 닳도록 그에게 말했다.

 그가 많은 작가를 넣은 각 작가에게 건네는 찬사였 건만 되려 그런 불평을 낳는 씨앗이 되었다. 아쿠타가와로선 황당했으리라. 내가 문예가 협회 운운에 반대하자 그는 인세를 그 안에 담긴 각 작가들에게 분배하겠단 소리를 했다. 나는 그 생각에도 반대했다. 교과서를 비롯한 독본류는 무단 수록하는 게 기본이다. 그렇 건만 정중히 허가까지 받지 않았나. 대단한 수익을 올린 거면 모를까 별로 팔리지 않은 마당에 그럴 필요는 없다고 말한 것이다. 하물며 백이십, 백삼십 명에게 분배하여 한 사람에게 십 엔 씩 줘본들 무엇이 달라지냐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그 자리에선 알아들은 거 같더니, 역시나 끝내는 미츠코시의 십 엔 수표인지 뭔지를 각 작가에게 이야기도 없이 보냈다고 한다. 나는 그런 걸 그렇게나 신경 쓰는 아쿠타가와가 슬펐다. 하지만 그의 결벽증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을 전후로, 이에 연관된 번거로운 일이 서너 개 가량 있었다. 나 같으면 "멋대로 떠들라지"하고 내칠 걸, 아쿠타가와는 마지막까지 신경 쓴 듯하다. 그게 하나같이 세속적 사건이었는지라 아쿠타가와의 신경을 긁어냈을 터이다.

 그런 데다가 의형의 자살이나 의지하던 부인의 동생이 발병하는 등, 가족 관계에서도 여러 불행이 있었다.

 그런 게 수 년 동안 싹 터 온 그의 염세적 인생관을 끝끝내 실제적인 걸로 만들어, 그의 병과 맞물려 자살의 시기를 앞당긴 듯하다.

 그런 점에서 그의 '수기'는 있는 그대로 믿어도 좋으며 그 이상으로 억측하려 하는 건 죽은 사람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그 안에 나오는 여인이 후미코 부인이 아닐지라도, 그 여인하고 연애 문제 따위가 어느 정도 이상 존재할 리도 없으며 단지 그러한 여인도 있으면 좋겠다는 정도이리라. 그 "여인 운운"에 얽혀서 내 앞으로 된 유서에는 그 소식이 적혀 있다느니 하는 기묘한 낭설마저 돌고 있는데, 그런 낭설을 믿는 사람에게는 언제라도 내게 온 유서를 보여줄 수 있다. 내 앞으로 된 유서에는 내게 하는 사별 인사 이외에 다른 불만은 조금도 적혀 있지 않았다.

 아쿠타가와의 '수기'를 읽으면 아쿠타가와의 본인의 심정이나 한없이 침착하여 결코 날 것이 원인으로 죽은 게 아니란 건 머리 좋은 사람이라면 바로 알 수 있을 터이다. 아쿠타가와는 자살로 세상 사람을 놀래키는 일마저 피하고 싶어 했다. 병사로 꾸미고 싶었으리라.

 

 아쿠타가와 나는 12, 3년가량 교우했다. 제일고등학교 시절, 아쿠타가와는 츠네토 군과 가장 친했다. 제일고등학교 시절엔 둘이서 조를 짰는데 아쿠타가와의 파트너는 츠네토 군이었다. 이 두 사람의 수재성은 심상치 않았다. 우리는 우리 대로 쿠메, 사노, 마츠오카와 같이 그룹을 이루어 날뛰고 다니었는데, 나는 아쿠타가와와 교제하지 않았다.

 내가 아쿠타가와와 교제를 시작한 건 제일고등학교를 나온 이후이다. 고등학교를 나와 교토에 갔다, 여름방학에 상경했을 적에 처음으로 아쿠타가와와 가까워졌다. 그 후, 내가 지지신보에 있을 적부터 친해져 다이쇼 8년 아쿠타가와의 소개로 오사카 마이니치의 객원이 된 후로 본격적으로 왕래하게 되었다. 최근엔 내가 속된 일로 바빠져 한 달에 한 번 정도 밖에 만나지 못 했다. 요즘 가장 친하게 왕래한 사람은 오아나 류이치 군이리라. 아쿠타가와는 오아나 군에게 배우고 있었기에 매일 같이 만나야 하는 사이였다.

 아쿠타가와와 나는 취미나 성질도 정반대였다. 또 나는 아쿠타가와의 취미에 의리로도 공명하지 않았고, 내가 하는 일 또한 아쿠타가와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경우가 많았으리라. 하지만 십 년 동안 한 번도 감정의 벽을 둔 적이 없었다. 나는 무언가에 화가 나면 곧장 속달을 보내기에 한 때 "키쿠치의 속달"로 지기 사이에 알려지고는 했는데 아쿠타가와에게 만큼은 한 번도 이 속달을 보낸 적이 없다.

 나와 아쿠타가와 사이선 내가 아쿠타가와에게 민폐를 끼쳤던 일이 많지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쿠타가와는 내가 말하는 억지는 대부분 들어주었다. 얼마 전의 "초등학생 전집" 공동 편집도 자살을 결심한 그로서는 싫었을 터인데 내 요청을 거부하여 나를 불쾌하게 할 수는 없다며 마지막 교우로서 승낙해주었으리라 믿는다. 그가 내 앞으로 쓴 유서의 일자는 4월 16일이었으니 그 시기엔 이미 결심도 무르익었을 즘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는 아쿠타가와에게 아무것도 해주지 못 했지만, 그는 은근히 내 생활을 이래저래 걱정해준 듯하다. 작년 10월 쿠게누마에 있었을 때, 내게 있던 어떤 사건을 걱정하여 주의를 해주고 만약 자기가 할 수 있는 게 있으면 상경할 테니 전보를 주라는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나는 그런 사건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때문에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요지의 대답을 했지만, 아쿠타가와가 신경쇠약에 고민하면서도 나를 그렇게나 생각해준 게 기뻤다. 그는 요즘 들어 내가 조금도 창작하지 않는 게 꽤나 걱정이었는지, 언젠가도 "'분케이순쥬'를 번성하기 위해서도 네가 작가로서 좋은 걸 써야 하지 않나."하고 말해주었다.

 나는 그에 "아니,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작가인 나와 편집자의 나는 또 별개야. 편집자로서 전력을 다하고 있지 않으니까, 그쪽으로 전력을 다 하면 잡지는 좀 더 발전할 수 있을 거야."하고 아쿠타가와의 생각에 승복하지 않았지만, 아쿠타가와의 진의는 내가 창작을 조금도 발표하지 않는 걸 걱정해준 거지 싶다.

 내가 가장 유감스러운 건 아쿠타가와가 죽기 전에 한 달 넘게 그와 만나지 못 한 일이다. 요전 번에도 '분케이순쥬 좌담회' 자리에서 두 번 만났지만, 두 번 모두 다른 사람이 있어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 했다. 게다가 "초등학생 전집"이 그런 일이 일어나 아쿠타가와와 직면하는 게 조금 겸연쩍어서, 좌담회가 끝난 후에도 출석자를 같은 차로 보낼 필요도 있어 아쿠타가와와 남아 이야기할 기회를 만들려 하지 않았다. 단지 만세이바시의 효테이에서 좌담회가 열렸을 때, 그는 자동차를 타려 하는 나를 힐끔 보았는데 그 눈에 이상한 빛이 있었다. 아, 아쿠타가와가 할 이야기가 있구나, 그런 생각은 했지만 이미 차가 움직이는 탓에 그대로 헤어지고 말았다. 아쿠타가와는 그럴 때 희망을 드러내는 남자가 아니지만, 그때의 눈초리만은 나와 좀 더 남아 이야기하고 싶은 갈망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눈초리가 궁금했지만 이전에도 말한 듯이 아쿠타가와를 보는 게 겸연쩍어져서 당시의 용무는 대부분 사람을 통해 해결하고 있었다.

 사후에 알게 된 건데, 그는 7월 초순에 두 번이나 분케이순쥬를 찾았다고 한다. 두 번 모두 나는 없었다. 이 또한 나중에 알게 된 건데, 한 번은 아쿠타가와가 응접실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고 한다. 심지어 당시 사원 중 누구도 내게 아쿠타가와가 온 걸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아쿠타가와가 내가 없을 때 찾으면 그 다음날 반드시 찾고는 했는데, 아쿠타가와의 방문을 알지 못 했던 나는 바쁜 나머지 그를 찾지 못 했다. 이게 내가 그의 죽음에 남긴 유감스러움이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효테이 앞에서 나를 보던 그의 눈초리는 평생 내게 후회의 씨앗이 되지 싶다.

 그가 나를 듬직하다 생각한 건 나의 현세적 생활력 때문이리라. 그런 점이 가장 부족한 그는 나를 친구로 둔 걸 조금이나마 든든하게 여겼을 게 분명하다. 그런 의미에서는 내가 그와 좀 더 왕래하며 그의 생활력을 자극했어야지 싶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작가 아쿠타가와가 문학사에 어떠한 위치를 가질지는 공평한 제삼자에 맡기더라도, 나라도 아래와 같은 말은 할 수 있으리라. 그만큼 높은 교양과 우수한 정취, 일본, 중국, 서양의 학문을 겸비한 작가는 앞으로도 찾아 볼 수 없으리라. 일본과 중국의 오랜 전통 및 정취, 유럽의 학문을 한 몸에 겸비했단 의미에선 과도기 일본의 대표적 작가이리라. 우리의 다음 시대에서는 일본과 중국의 정통한 전통과 청취가 문예에 드러나는 일은 거의 없으리라.

 그는 문학상 독자란 면에선 당대에 비할 사람이 없지 싶다. 화장터에서 돌아올 때, 츠네토 군이 그 수기 안에 적힌 마인랜더에 관해 물었다.

 "자네, 마인랜더가 뭔지 알아?"

 "모르지. 자네는?"

 "나도 몰라. 사람 이름이려나."

 야마모토 유조, 이쿠미 세이지, 도쿠시마 토시오 같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도 알지 못 했다. 그 수기를 읽고 나서야 마인랜더를 알게 된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2, 3일 지나 츠네토 군이 찾아와 이야기하길, 독일의 철학자이며 쇼펜하우어의 영향을 받아 염세 사상을 기르고 결국 자살이 최선의 길임을 소리 높인 학자라고 한다.

 아쿠타가와는 여러 방면에서 많은 마인랜더를 읽은 남자임이 분명했다.

 수 년 전, 쇼를 독파하여 쇼에게 기울어지고, 쇼가 어떤 사회주의자보다도 마르크스를 이해했음에 감탄하며 사화과학 방면의 독서 또한 어지간한 프로 문학자보다도 깊게 이해했으리라. 아쿠타가와가 이따금 한 이야기에 따르면 "막연한 불안" 속에 Social unrest에 관한 불만도 어느 정도 들어 있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자기 주위에 울타리 하나를 둘러 싫어하는 인간은 결코 그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믿을만한 모종의 미점을 인정한 인간에게는 꽤나 친절했다. 그리고 자주 돌봐주었다. 또 한 번 그 안에 들인 인간은 아무리 민폐더라도 간단히 내치지 않았다.

 뚝심이 있고 총명하였지만 실생활 상에선 모랄리스트였으며 친절했다. 그가 좀 더 나쁜 사람이었다면 그런 하찮은 것에 고집하지 않고 좀 더 편하게 살다 갔으리라.

 "주간 아사히"에 실린 여종의 수기에 따르면 그는 죽기 조금 전에 짜증을 내며 꽃병을 깼다고 한다. 그게 거짓인지 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좀 더 평생 꽃병을 깨고 다녔다면 그런 일은 없었으리라 믿는다. 너무나도 도심 사람 같은 기품 좋은 참을성을 품고 있었지 싶다.

 아쿠타가와가 "분케이순쥬"에 보내준 호의에는 감사할 수밖에 없다. 그 호의에 보답하기 위해, 또 이 사람을 영구히 기념하고 싶기에 '미천한 사람의 말'란은 사후에도 본지가 이어지는 한 존속되리라 믿는다. 미발표 원고도 있는 모양이고 서간도 있으니 당분간 소재는 부족하지 않을 터이고, 소재가 떨어지면 그에 관한 여러 문장을 실어도 되겠지 싶다. 아쿠타가와와 가장 가까웠던 오아나 류이치 군에게 편집을 맡길 생각이다. 오오마츠 케이게츠 씨를 기념하기 위해 '케이게츠'란 잡지마저 있으니 본지 한두 칸에 '미천한 자의 말'을 두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지 싶다.

 또 잠깐 첨언하자면 그가 최근에 쓴 문장 중 한 구절에 "누구나 용서하고, 누구보다도 용서 받지 못 할 일을 원한다"는 구절이 있었다. 문단 사람 및 그 외에 고인과 조금이라도 벽을 두었던 사람이라면 고인의 마음을 받아주어 마음을 좀 내려놓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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