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수업에 관해 말해달라"는 화제는 나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취직 수험을 받으러 갔더니 초등학교 수학 문제가 나와 크게 당황한 모습과 닮았다. 원의 면적을 산출하는 공식도 동물 다리를 통한 계산도 차라리 π나 미지수 문자를 쓸 수 있으면 편할 텐데. 그런 한탄을 내뱉는 것과 살짝 비슷하다.
이래저래 복잡하게 간질이는 통에 나는 부끄러울 따름이다.
스타트 라인에 줄지어 아직 출발 신호를 알리는 총이 울리기도 전에 뛰쳐나가 심판의 제지도 듣지 않고 열심히 달려 도착한 백 미터. 득의양양히 골에 뛰어들어 자, 기자들의 플래시를 기다려볼까 하고 활짝 웃어 보이나 좀 상황이 이상하다. 갈채는 전혀 없고 주위 모든 사람들이 안타깝다는 양 그 선수의 얼굴을 본다. 선수는 비로소 자신의 실수를 깨달아 부끄럽고 괴로워 도무지 말로 다 하지 못한다.
나는 다시 기운 없이 출발점으로 돌아가 지쳐서 숨을 헐떡이면서도 스타트 라인에 섰다. 부정 출발의 벌로 다른 선수보다 1 미터 뒤에서 달려야 한다. "준비!" 심판의 냉혹한 목소리가 다시 들린다.
나는 착각을 했다. 이 레이스는 백 미터 달리기가 아니었다. 천 미터, 오천 미터. 아니, 좀 더 긴 마라톤이었다.
이기고 싶다. 지독히 초조해져 온 힘을 다해 이렇게 지쳐버렸다. 하지만 나는 선수다. 이기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단순한 선수다. 누가 이 장래성 부족한 선수를 위해 성원을 보내줄 고매한 사람은 없을까.
재작년 쯤 나는 내 평생에 마침표를 찍었다. 죽을 줄 알았다. 믿고 있었다. 그렇게 될 숙명을 믿었다. 스스로의 평생을 스스로 예언했다. 신을 모독하였다.
죽을 줄 알았던 건 나뿐이 아니었다. 의사도 그렇게 생각했다. 아내도 그런 줄 알았다. 친구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나는 죽지 않았다. 나는 신에게 어지간한 총애를 받는 게 분명하다. 바란 죽음은 주어지지 않았고 대신 현세의 엄숙한 고통을 받았다. 나는 퉁퉁 살이 올랐다. 애교도 차가움도 없는 그저 둥글고 크기만 한 추악한 서른에 지나지 않았다. 신은 이 남자를 세상의 조소와 손가락질과 경멸과 경계와 비난과 유린과 묵살의 화염 속에 던졌다. 남자는 그 화염 속에서 한동안 꼼지락거렸다. 고통의 외침은 세상의 비웃음을 더 크게만 할 뿐이었기에 남자는 갖은 표정과 말을 죽인 채 단지 벌레처럼 꼼지락거렸다. 재미있게도 남자는 이윽고 튼튼해졌고 조금도 귀엽지 않게 되었다.
진지해졌다. 괜히 진지해지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 출발점에 섰다. 이 선수에겐 장래성이 있다. 경쟁은 마라톤이다. 백 미터, 이백 미터의 단거리 레이스가 아니다. 이제 이 선수에겐 장래성이 전혀 없다. 발이 너무 무겁다. 보라, 저 둔중함을. 소와 같은 풍채를.
바꾸면 바뀌는 법이다. 오십 미터 레이스라면 일단 이번 세기서 그의 기록을 깰 수 없으리라. 팬은 그렇게 속삭이고 선수 자신도 조용히 이를 인정했다. 그 민첩한 다자이 오사무란 젊은 작가가 이렇게 다시 태어났는가. 머리는 나쁘고 문장은 글렀다. 학문도 부족하다. 전부 쓸모가 없다. 곰손이면서 풍채도 나쁘다. 단지 장점이라곤 몸이 튼튼한 것뿐이었다.
의외로 오래 살지 않을까.
이런 바보 같은 짓으론 끝이 없다. 무언가 하나 도움이 될만한 이야기라도 해볼까. 도움이 된다. 되지 않는다도 이상해서 과거에 발전기를 발명하여 의기양양해 하고 있자니 한 귀부인이 그런데 박사님, 그 전기란 게 만들어져 뭐가 어떻게 되는 건가요? 하고 물으니 박사는 어안이 벙벙하여 부인, 이제 막 태어난 갓난 아이에게 넌 뭘 건설할 거니? 하고 물어보시죠, 하고 대답했단 이야기가 있다. 하지만 몇 천만 년 전의 세계엔 어떤 동물이 있었고 일억 년 후엔 어떤 세계가 되는가. 그런 이야기가 정말 도움이 될까. 나는 도움이 되리라 본다만.
허영심. 그 강인함을 얕봐선 안 된다. 허영은 어디에나 있다. 승방에도 있다. 감옥 안에도 있다. 묘지에마저 있다. 이런 걸 보고서 못 본 체해서는 안 된다. 똑바로 마주하여 자신의 허영심과 대화해보아라. 나는 사람의 허영심을 비난하려는 게 아니다. 단지 자신의 허영심을 거울에 비추어 잘 보라는 말이다. 본 결과는 억지로 남에게 말하지 않아도 된다. 말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한 번은 또렷이 거울에 마주해 지켜볼 필요가 있다. 한 번 본 사람은 생각이 깊어지리라. 겸손해지리라. 신의 문제를 생각하게 되리라.
거듭 말한다. 나는 허영심을 나쁘게 말하는 게 아니다. 그건 어떤 경우엔 생활 의욕과 이어진다. 높은 리얼리티하고도 이어진다. 애정으로도 이어진다. 나는 수많은 사상가들이 신앙이나 종교를 논해도 한 걸음 앞에 자리한 현세의 허영심에 솔직히 닿으려 하지 않는 걸 신기할 뿐이다. 파스칼은 조금 닿았을까.
허영심은 불쌍하다. 그립기도 하다. 그만큼 곤란하다.
길다. 큰 마라톤이다. 지금 당장 한 번에 모든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라. 천천히 자리하고 하루하루를 후회 없이 보내라. 행복은 삼 년 뒤늦게 온다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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