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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다자이 오사무

재미가 아닌 - 다자이 오사무

by noh0058 2022. 3.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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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의 말로를 생각해 오싹해져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밤에는 지팡이를 질질 끌며 아파트서 나와 우에노 공원까지 걷는다. 내 하얀 유카타도 이젠 계절감을 잃어서 아마 하얗게 눈에 띄겠지 싶었다. 더욱 슬퍼져 사는 게 싫어졌다. 시노아즈이케를 스치며 부는 바람은 미적지근하고 비린내가 섞여 있었다. 연못의 연꽃도 자란 채로 썩어서 비참한 추태를 드러내고 줄지어서 저녁의 선선한 바람을 쐬는 사람들도 얼빠진 얼굴을 한 채로 피로의 색이 짙으니 세상의 종말을 떠올리게 했다.
 우에노역까지 와버렸다. 무수한 검은색 여행객이 이 동양에서 제일 크다는 정차장서 우글우글 꿈틀거리고 있었다. 모두 떨거지 같은 처지다. 내게는 그렇게 밖에 보이지 않는다. 여기는 토호쿠 농촌의 마의 입구라 불린다. 여기를 지나 도심으로 나서고 너덜너덜 패해서 다시 이곳을 지나 좀먹은 몸 하나에 누더기를 두른 채 고향으로 돌아간다. 필시 맞는 말이다. 나는 대기실 벤치에 앉아 히죽 웃었다. 그러니 말하지 않았나. 도쿄에 와도 안 된다고 그렇게나 충고하지 않았나. 소녀도 어른도 청년도 모두 생기를 잃은 채 멍하니 앉아 둔하고 탁한 눈으로 대체 어디를 보고 있는가. 공중에 떠오른 환상의 꽃을 쫓고 있다. 주마등처럼 여러 색이, 실패의 역사서가 공중에 떠올라 있는 걸 테지.
 나는 일어서 대기실에서 도망쳤다. 개찰구를 향해 걸었다. 일곱 시 오 분 도착하는 급행열차가 플랫폼에 이르러 검은색 거미가 서로를 밀치고 당기며 또 혹은 넘어지 듯이 개찰구를 향해 이른다. 손에는 트렁크. 바구니도 힐끔힐끔 보인다. 아아, 신겐부쿠로는 아직 이 세상에 존재했는가. 고향서 쫓겨나 왔는가.
 청년들은 꽤나 세련되었다. 그리고 예외 없이 긴장하여 조마조마해 하고 있다. 불쌍하다. 무지하다. 아버지와 싸우고 나온 걸 테지. 멍청한 자식.
 나는 한 청년을 보았다. 영화를 보고 배웠는지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꽤나 폼을 재고 있다. 외국 배우라도 흉내내는 게 분명하다. 소형 트렁크 하나를 끌며 개찰구서 나오니 바로 한쪽 눈썹을 높이며 주위를 둘러본다. 역시나 배우 흉내이다. 양복도 목깃이 굉장히 넓고 화려한 체크가 새겨져 있으며 바지는 한참 길어 목 아래서 바로 바지가 보일 정도다. 백마로 된 헌팅 모자와 붉은 가죽 단화. 입을 꾹 다문 채 씩씩히 걷는다. 너무나 우아하며 우스웠다. 놀리고 싶어졌다. 나는 당시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것이다.
 "이봐, 타키야." 트렁크에 타키야라 이름이 적혀 있었기에 그렇게 불렀다. "잠시 와봐."
 나는 상대의 얼굴도 보지 않고 척척 걸었다. 운명적으로 끌리기라도 하듯이, 그 청년은 내 뒤를 쫓았다. 나는 남의 심리에는 조금 자신이 있다. 남이 멍하니 있을 때엔 단지 압도적으로 명령하면 된다. 상대를 뜻대로 다룰 수 있다. 허투루 자연스러움을 꾸미거나 괜한 말로 상대를 이해시키고 안심시키는 노력은 되려 해선 안 된다.
 우에노야마에 올랐다. 천천히천천히 돌계단을 오르며.
 "조금은 아버지 기분도 치하해주는 게 좋을 거야."
 "하아." 청년은 딱딱하게 굳어 대답했다.
 사이고 씨의 동상 아래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멈춰 서 소매서 담배를 꺼냈다. 성냥불로 청년 얼굴을 힐끔 보니, 청년은 마치 아이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불만스레 서있었다. 놀리는 것도 이쯤 해둬야지 싶었다.
 "몇 살이야?"
 "스물셋이요." 시골의 억양이 담겨 있었다.
 "젊은걸." 나도 모르게 탄식했다. "이제 됐어. 돌아가도 돼." 단지 너를 놀려보고 싶은 거야. 그렇게 말하려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놀리고 싶은걸. 그런 바람기와 비슷한 심정에
 "돈 있어?"
 머뭇거리다 "있습니다."
 "이십 엔, 두고 가." 나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진짜 꺼냈다.
 "가도 되나요?"
 바보, 농담이야. 놀려본 거뿐이야. 도쿄는 이렇게 무서운 곳이니까 어서 고향으로 돌아가 부모님을 안심시켜 드려. 나는 폭소하며 말해야 했을지 모르나 애당초 재미로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나는 아파트 방값을 내야 한다.
 "고마워. 너를 잊지 않을게."
 내 자살은 한 달 뒤로 밀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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