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노는 걸 굉장히 좋아하여 집에서 일을 하면서도 멀리서 친구가 찾아올 걸 남 몰래 기대하곤 한다. 그때 현관이 덜컹 열리면 눈살을 찌푸리고 입에 힘을 주다가도 실은 가슴이 뛰어 쓰다 만 원고용지를 정리하고는 그 손님을 맞이한다.
"아, 작업 중이셨나요."
"아뇨 뭘."
그리고 그 손님과 함께 놀러 나간다.
하지만 그래서야 도무지 일이 되지 않으니 어떤 곳에 비밀의 작업실을 마련하였다. 작업실이 어디 있는가. 이는 가족도 알지 못한다. 매일 아침 아홉 시면 나는 집사람에게 도시락을 부탁하여 작업실로 출근한다. 비밀 작업실을 찾는 사람도 없기에 일도 대개 예정대로 진행된다. 하지만 오후 세 시쯤 되면 피로도 찾아오고 사람이 그리워지며 무엇보다 놀고 싶어서 적당히 일을 마무리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가는 길에 오뎅가게에 끌려 심야나 되어야 돌아갈 때도 있다.
작업실.
하지만 그 방은 어떤 여자의 방이다. 젊은 여자가 아침 일찍 니혼바시에 자리한 한 은행으로 출근한다. 그 후 내가 가서 네다섯 시간 동안 일을 하고 여자가 귀가하기 전에 물러난다.
정부 같은 건 아니다. 내가 그 사람의 어머니를 알고 있는데, 그 어머니는 어떤 사정으로 그 딸과 헤어져 이제는 토호쿠 쪽에 살고 있다. 또 이따금 내게 편지를 써서 딸의 혼담 등으로 내 의견을 구하기도 한다. 나도 그 후보자 청년과 만나 그 사람이라면 좋은 남편이 될 테죠. 찬성입니다 하고 무어라 대단한 사람마냥 글을 써 보낸 적도 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머니보다 딸 쪽이 더 나를 믿는 게 아닐까. 나는 그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키쿠, 요전 번에 네 미래의 남편하고 만났어."
"그래요? 어떤가요? 조오금 건들거리지? 그렇지?"
"뭐 그런 게 좋은 거야. 나 같은 거에 비하면 어떤 남자라도 바보처럼 보이겠지. 참아봐."
"그야 그렇지."
딸은 그 청년과 결혼할 생각인 듯했다.
지난 밤 나는 거창하게 술을 마셨다. 아니, 거창하게 마시는 건 매일 있는 일이라 딱히 특이할 일도 아니다. 단지 작업실에서 귀가하는 길의 역 앞에서 간만에 친구를 만나 내가 자주 찾는 오뎅가게로 안내했다. 거나하게 마셔 슬슬 마시는 게 괴로워진 참에 잡지사 편집자가 여기 있을 줄 알았어요, 하고 말하며 위스키를 든 채 나타나 그 편집자를 상대로 또 위스키 한 병을 비웠다. 이젠 토하겠는데, 어쩌지. 그렇게 겁이 나 그만 마시고 싶었으나 친구가 이번에는 자기가 내게 해달라며 전철을 타고 친구가 자주 찾는 선술집에 끌려 가 다시 일본주를 마셔야 했다. 둘과 헤어졌을 때엔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자고 갈게. 집까지 걸어갈 수 없어. 이대로 자버릴 거야. 부탁 좀 할게."
나는 코타츠에 두 발을 꽂고 옷도 벗지 않은 채 그대로 잠들었다.
밤중에 눈이 떠졌다. 새까맸다. 몇 초 동안 집에서 자고 있는 줄 알았다. 다리를 살짝 움직여 내가 양말을 신은 채로 잠든 걸 깨달아 놀랐다. 망했다! 일났네!
아아, 이런 경험을 이제까지 몇 백 번, 몇 번 번 반복했던가.
나는 신음했다.
"춥지 않으세요?"
키쿠가 어둠 속에서 말했다.
나와 직각으로 코타츠에 다리를 넣은 채 자고 있었나 보다.
"아니, 춥지 않아."
나는 상반신을 일으켜
"창문으로 소변 좀 봐도 돼?"
그렇게 말했다.
"그러세요. 그게 편하니까."
"키쿠도 가끔 하는 거 아냐?"
나는 일어서 전등불 스위치를 당겼다. 불이 들어오지 않는다.
"정전 중이에요."
키쿠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손을 더듬어 창문 쪽으로 다가가다 키쿠의 몸 위로 넘어졌다. 키쿠는 가만히 있었다.
"이런, 실수."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나는 겨우 잡은 창문 커튼을 밀어 창문을 열고는 물 흐르는 소리를 냈다.
"네 책상 위에 클레브 공작부인이란 책이 있었지."
나는 이전처럼 몸을 옆으로 눕힌 채 말했다.
"그 시절 귀부인은 말야, 궁전 정원이나 복도 계단 아래 어두운 곳에서 아무렇지 않게 소변을 봤어. 창문으로 소변을 보는 일도 원래는 귀족적인 거지."
"술 드실 거면 있어요. 귀족은 자면서 마신다죠?"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마시면 위험할 거 같았다.
"아니, 귀족은 어두운 걸 싫어해. 원래 겁쟁이들이니까 말야. 어두우면 무서워지지. 초 없어? 촛불 붙이면 마셔도 되고."
키쿠는 조용히 일어났다.
그리고 초에 불을 붙였다. 나는 안도했다. 이걸로 오늘 밤은 아무 일도 없겠지 싶었다.
"어디에 둘까요?"
"촛대는 높이 두어라. 성경에도 그런 구절이 있으니까 높은 곳이 좋지. 저 책상자 위는 어때."
"술은요? 컵으로 마실까요?"
"심야의 술은 컵에 부어라. 역시 성경에 나오는 말이지."
나는 거짓말했다.
키쿠는 히죽히죽 웃으며 커다란 컵에 술을 따라 가지고 왔다.
"아직 한 잔 정도 더 남아 있어요."
"아냐, 이거면 됐어."
나는 컵을 받아 쭉쭉 삼켜 드러누웠다.
"자, 한숨 더 자자. 키쿠도 잘 자."
키쿠도 나와 직각으로 드러누워 속눈썹이 긴 눈을 종일 깜빡거렸다. 잠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조용히 책상자 위의 촛불을 보았다. 불은 생물처럼 종일 뻗었다 줄었다 움직이고 있다. 보는 사이 나는 문득 어떤 생각을 떠올려 겁을 먹었다.
"이 초는 짧은걸. 금세 꺼지겠어. 좀 더 긴 건 없어?"
"그게 다예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하늘에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 촛불이 꺼지기 전에 내가 잠들던가 아니면 컵 한 잔의 취기가 가셔야 한다. 아니면 키쿠가 위험해진다.
화염은 작게 타오르며 조금씩 또 조금씩 짧아지지만 나는 도무지 잠에 들 수 없었다. 또 한 잔의 취기도 가시기는 고사하고 온몸을 뜨겁게 만들며 서서히 나를 대담하게 할 뿐이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양말이라도 벗지 그래요?"
"왜?"
"그래야 따듯하니까."
나는 그 말을 따라 양말을 벗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촛불이 꺼지면 끝이다.
나는 각오를 굳혔다.
불꽃은 어두워지고 몸부림치 듯이 좌로 우로 움직여 순간 크게 밝아지더니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점점 작아지다 사라졌다.
그때 동이 트기 시작했다.
방은 희미하게 밝아서 더는 어둠이라 할 수 없었다.
나는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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