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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도조문답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0.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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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텐노지 별당, 도묘 아자리는 홀로 슬쩍 마루서 빠져나와 경상經床 앞에 앉더니 그 위에 놓인 법화경 8권을 등불 아래에 펼쳤다.

 등불의 불은 꽃과 같은 모양을 맺으며 나전 경상을 밝게 비추고 있다. 귀에 들어오는 건 키쵸 너머에 누워 있는 이즈미 시키부의 숨소리리라. 봄밤의 조시는 마냥 조용해서 쥐 우는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아자리는 하얀 비단 테두리를 두른 방석에 앉아 시키부가 잠에서 깨지 않도록 작은 소리로 조용히 법화경을 읽었다.
 그게 이 남자의 습관이었다. 다이나곤 후지와라노미치츠나의 아이로 태어나 텐다이자스 지에 대승정의 제자로 자랐지만 삼업의 수행도 하지 않았고 오계도 지녀 본 적이 없다. 아니 되려 "하늘이 내려준 건 호색 밖에 없다"는 Dandy 계급에 속할 법한 생활마저 계속하고 있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그런 생활 틈틈이 반드시 홀로 법화경을 읽고 있다. 심지어 아자리 본인은 그런 걸 조금도 모순으로 여기지 않는다.
 실제로 오늘도 이즈미 시키부를 찾은 것도 수도자로서 찾아온 게 아니었다. 단지 이 여자의 수많은 정인 중 한 명으로서 봄밤의 지루함을 위로받기 위해 몰래 왔다――그런데 아직 닭이 울기도 전에 마루서 나와 술 냄새나는 입술로 일체중생, 개성불도의 묘경을 읽으려 하고 있다……
 아자리는 옷소매를 고치며 정성 들여 경을 읽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촛대의 불이 어느 틈엔가 조금씩 어두워지기 시작한 걸 깨달았다. 불꽃의 끝자락이 푸르게 물들더니 빛이 점점 희박해진다. 그런가 하면 바닥 주변이 검게 타더니 서서히 불꽃의 형태가 실처럼 얇아지고 만다. 아자리는 몇 번인가 불을 다시 살려보려 했다. 하지만 어두워지는 건 도무지 막을 수 없었다.
 그뿐일까. 정신이 들고 보니 불이 어두워지는 것에 따라 촛대 너머의 공기가 한 곳만 짙어지더니 그게 서서히 인간과 같은 형태를 취하기 시작한다. 아자리는 그만 경을 읽던 목소리를 거두었다――
 "누구냐."
 그러자 그림자가 목소리에 응해 힘없는 대답을 했다.
 "용서해주시지요. 저는 고죠니시의 토인 옆에 사는 노인입니다."
 아자리는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 눈에 힘을 주어 그 노인을 가만히 보았다. 노인은 경상 너머서 하얀 스이칸 소매를 가다듬고 의미심장하게 앉아 있다. 몽롱하면서도 에보시 끈을 길게 묶은 차림은 딱히 여우나 너구리가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특히 노란 종이로 만들어진 부채를 들고 있는데 불빛이 없어 어두운 와중에도 기품 있단 것만은 똑똑히 보였다.
 "노인이라니 무슨 노인이냐."
 "그렇죠. 노인이라고만 하면 알 수가 없겠군요. 고죠의 사에노카미道祖神 입니다."

 "사에노카미가 무슨 일로 나를 찾았지?"
 "경을 받는 게 기쁜 나머지 꼭 한 마디 드리고 싶어 찾아뵈었습니다."
 아자리는 의아하다는 양 미간을 찌푸렸다.
 "도묘가 법화경을 읽는 건 늘 있는 일이다. 꼭 오늘 밤만 그런 게 아냐."
 "그렇다면."
 사에노카미는 이야기를 자르고는 짧은 노란 머리를 천천히 기울이고는 여전히 중얼거리는 듯한 작은 목소리로
 "본래 청렴한 마음으로 경을 읽을 때는 위로는 대범천왕과 제석천, 아래로는 항하의 보살들까지 전부 들으러 오십니다. 허니 저 같은 미천한 노인은 슬프게도 다가갈 수 없는 거지요. 하지만 오늘 밤은――" 그렇게 말하면서 불쑥 비꼬기라도 하듯이 "오늘 밤은 물로 수행도 않으시고 또 여자와 피부가 닿은 몸으로 경을 읽고 계시니 갖은 불신도 부정을 거리껴 주변에 나타나지 않는 듯하였지요. 그러니 저 같은 노인도 안심하러 보러 오고 경을 들은 인사를 할 수 있는 편의를 얻게 된 것입니다."
 "뭐라고."
 도묘 아자리는 불쾌하다는 양 말했다. 사에노카미는 그걸 아랑곳 않는 투로
 "에신 스님께서도 염불, 독경, 사위의를 깨지 말라 하셨지요. 노인의 과보는 이윽고 스님의 타옥의 악취悪趣에 불려 그 후엔……"
 "닥쳐라."
 아자리는 손에 들고 차고 있던 수정 염주를 만지며 날카롭게 노인의 얼굴을 보았다.
 "불초 도묘는 갖은 경문 논역을 주의 깊게 보았다. 또 갖은 계행 덕목도 거른 게 없지. 그대가 말하는 걸 내가 모를 거 같나?"――하지만 사에노카미는 대답하지 않는다. 촛대 그림자에 앉은 채로 가만히 고개를 기울인 채 아자리의 말을 듣고 있는 듯하다.
 "잘 들어라. 생사즉열반이니 번뇌즉보리니 하는 건 모두 제 몸의 불성을 보란 뜻이니라. 내 육체는 삼신즉일, 본각여래, 번뇌업고 세 길은 법신반야외탈의 삼덕, 사바 세계는 상적광토에 맞먹느니라. 도묘는 무계의 비구지만 이미 삼관삼체즉일심을 다 맛보았다. 허니 이즈미 시키부도 도묘의 눈에는 마야 부인이니라. 남녀의 교회도 만전의 공덕이니라. 우리의 침소는 구원 본지의 갖은 법승들, 무작법신의 갖은 법승 등이 모두 모이는 곳이니라. 그럼 도묘가 자리한 게 영취보사와 다를 게 뭐가 있겠느냐. 그곳이 어디 냄새 나는 한낱 지계승이 함부로 발을 들여도 될 불국이더냐?"
 이렇게 말한 아자리는 자세를 고치고는 수정 염주를 휘저어 꾸짖었다.
 "빌어먹을, 어서 물러나자."
 그러자 노인은 노란 종이 부채를 펼쳐 얼굴을 가리더니 서서히 그림자가 옅어지고 반딧불이 정도가 된 촛대의 불과 함께 조짐도 없이 불쑥 사라졌다――그러자 저 멀리서는 작지만 용맹한 닭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봄은 여명, 서서히 밝아져 간다"의 때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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