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편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7. 13.
728x90
반응형
SMALL

 저는 지금 이 온천 여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피서할 생각도 없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느긋이 읽거나 쓰고 싶은 생각도 분명히 있습니다. 여행안내서의 광고에 따르면 여기는 신경쇠약에 좋다고 합니다. 그 탓인지 미치광이도 둘인가 있습니다. 한 명은 스물일곱여덟 먹은 여자입니다. 이 여자는 아무 말도 없이 아코디언만 치고 있습니다. 하지만 차림새는 번듯하니 어딘가 상당한 집안의 사모님일 테지요. 그뿐 아니라 두세 번 본 바로는 어딘가 살짝 혼혈아 같은 윤곽이 고운 얼굴을 지녔습니다. 또 다른 미치광이는 붉은 이마 위에 벗겨진 머리를 지닌 마흔 전후의 남자입니다. 이 남자는 왼팔에 소나무 잎 문신을 하고 있는 걸 보면 미치광이가 되기 전에는 무언가 거친 장사라도 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저는 물론 이 남자와 이따금 욕탕을 같이 쓰고는 합니다. K 군은(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어느 대학생입니다.) 이 남자의 문신을 가리키며 대뜸 "당신 아내 이름이 오소마츠지요?"하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이 남자는 탕에 몸을 담근 채로 아이처럼 얼굴을 붉혔습니다……
 K 군은 저보다 열 살은 젊습니다. 더군다나 같은 여관의 M코 씨 모녀랑 꽤나 친하게 지냅니다. M코 씨는 옛날식으로 말하자면 와카슈[각주:1] 같은 얼굴을 하고 있다 해도 좋겠지요. 저는 M코 씨가 여학교 시절에 하얀 머리띠를 둘러매고 나기나타를 배웠단 말을 듣고 필시 우시와카마루를 닮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 M코 씨 모녀하고는 S 군도 역시 교제하고 있습니다. S 군은 K 군의 친구입니다. 단지 K 군과 다른 건――저는 소설을 읽으면 두 남자에 차별을 두기 위해 한 명을 뚱뚱한 남자로 두고 다른 한 명을 마른 남자로 두는 게 조금 우습게 느껴졌습니다. 또 한 명을 호쾌한 남자로 두면 다른 한 사람을 심약한 남자로 삼는 것도 역시 작게 웃음이 지어집니다. 실제로 K 군과 S 군은 둘 다 뚱뚱하지 않습니다. 그뿐 아니라 두 사람 모두 상처 입기 쉬운 신경을 타고났습니다. K 군은 S 군처럼 간단히 약점을 보이거나 하진 않습니다. 실제로 약점을 보이지 않는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K 군, S 군, M코 씨 모녀――제가 어울리는 건 이뿐입니다. 물론 어울린다 한들 같이 산책하거나 이야기하는 게 전부입니다. 그도 그럴 게 이곳에는 온천 여관 외에(그나마도 고작 두 척뿐입니다.) 카페 하나 없습니다. 저는 이런 쓸쓸함을 조금도 부족하다 여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K 군이나 S 군은 이따금 "우리의 도시 향수"라는 걸 느끼나 봅니다. M코  모녀도――M코 씨 모녀는 복잡합니다. M코 씨 모녀는 귀족주의자입니다. 따라서 이 산속에서 만족할 리도 없습니다. 하지만 불만 속에서 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적어도 이래저래 한 달뿐인 만족을 느끼고 있습니다.
 제 방은 2층 구석에 있습니다. 저는 제방 구석에 놓인 책상 앞에 앉아 오전 중에는 공부를 합니다. 오후에는 함석지붕이 햇살을 받는데 뜨겁게 달아오르는 통에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습니다. 그럼 무얼 하느냐, K 군이나 S 군을 불러 트럼프나 장기로 시간을 때우거나 조립 세공 목침(이곳의 특산품입니다)을 베고 낮잠을 자거나 할 따름입니다. 대여섯 날 전 오후의 일입니다. 저는 역시 목침을 한 채로 두꺼운 표지를 씌운 "오오쿠보 무사시 아부미"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후스마가 열리더니 대뜸 아랫방에서 지내는 M코 씨가 들어옵니다. 저는 조금 당황하여 한심할 정도로 똑바로 자세를 고쳐 앉았습니다.
 "어머, 다들 안 계시나요?"
 "네, 오늘은 아무도……자, 들어오세요."
 M코 씨는 후스마를 연 채로 제 복도쪽 구석에 자리하셨습니다.
 "이 방은 더운걸요."
 역광 탓에 M코 씨의 모습은 귀만 붉게 비쳐 보였습니다. 저는 무언가 의무와 비슷한 걸 느껴 M코 씨 옆에 섰습니다.
 "그쪽 방은 시원하지요?"
 "네……근데 아코디언 소리가 계속 들려셔요."
 "아, 그 미치광이의 반대방이었죠."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하면서 한동안 구석에 자리해 있었습니다. 서쪽 태양을 받는 함석지붕은 파도처럼 반짝이고 있습니다. 그때 정원의 벚꽃 가지서 모충 한 마리가 굴러떨어졌습니다. 모충은 얄팍한 함석지붕 위에서 자그마한 소리를 내더니 두세 번 몸을 껑충껑충 뛰고는 금세 축 늘어져 죽어버렸습니다. 정말 하찮은 죽음이었습니다. 또 정말로 도리 없는 죽음입니다――
 "기름 냄비 안에 빠진 거 같네요."
 "저는 모충을 정말 싫어해요."
 "저는 손으로도 집을 수 있지만요."
 "S 씨도 그런 말을 했지요."
 M코 씨는 내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습니다.
 "S 군도 말했군요."
 제 대답이 M코 씨에게는 시원찮게 들렸겠지요. (저는 사실 M코 씨에게――정확히는 M코 씨라는 소녀의 심리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M코 씨는 꽤나 토라진 것처럼 이렇게 말하며 복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럼 나중에 봬요."
 M코 씨가 돌아간 후, 저는 다시 목침을 하면서 "오오쿠보 무사시 아부미"를 읽었습니다. 하지만 활자를 쫓는 사이 이따금 그 모충을 떠올렸습니다……
 제가 산책을 나가는 건 대개 저녁밥 먹기 전입니다. 이럴 때는 M코 씨 모녀를 시작으로 K 군이나 S 군도 함께 나갑니다. 또 산책할 장소도 이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소나무 숲 말고는 없습니다. 이는 모충이 떨어지는 걸 본 날보다 조금 전의 일이었겠죠. 저희는 역시 소란을 떨면서 소나무 숲을 걸었습니다. 저희?――M코 씨의 어머니만은 예외입니다. 이 부인은 실제 나이보다 적어도 열 살은 늙어 보였습니다. 저는 M코 씨 집안일을 아무것도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언젠가 읽은 신문 기사에 따르면 이 부인은 M코 씨나 M코 씨의 오빠를 낳은 사람이 아닐 터입니다. M코 씨의 오빠는 어딘가의 입학시험에서 낙제한 탓에 아버지의 권총으로 자살했습니다. 제 기억에 의존하면 모든 신문은 오빠의 자살을 후처로 온 부인의 책임처럼 기술했습니다. 이 부인이 나이를 먹은 건 어쩌면 그런 이유 때문이지 않을까요? 저는 아직 오십도 먹지 않았는데 머리가 하얗게 샌 부인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을 하고 맙니다. 어찌 됐든 저희 네 사람은 어찌 되었든 떠들고 또 떠들었습니다. 그러자 M코 씨가 무얼 보았는지 "어머 싫어라"하고 말하며 K 군의 팔을 잡았습니다.
 "왜 그러세요? 뱀이라도 나온 줄 알았네."
 실제로는 별 볼 일 없는 일이었습니다. 단지 건조한 산모래 위에 자잘한 개미가 반쯤 죽은 붉은 벌 몇 마리를 질질 끌고 있는 광경이었습니다. 붉은 벌은 뒤로 뒤집힌 채로 이따금 찣긴 날개를 흔들어 개미 무리를 쫓아냅니다. 하지만 개미 무리는 흩어지는가 싶더니 곧장 다시 붉은 벌의 날개나 다리에 매달려버렸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멈춰 서 한동안 붉은 벌이 몸부림치는 걸 바라보았습니다. M코 씨도 처음과 달리 묘하게 진지한 얼굴로 K 군 옆에 서있었습니다.
 "이따금 검을 뽑네요."
 "벌의 검은 갈고리처럼 굽어 있네요."
 저는 다들 가만히 있기에 M코 씨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 가요. 저는 이런 걸 보는 게 싫어요."
 M코 씨의 어머니는 누구보다도 먼저 앞을 걸었습니다. 저희도 물론 따라 걸었습니다. 소나무 숲은 길을 드러낸 채로 높은 풀을 조용히 뻗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대화 소리는 이 소나무 숲 안에 의외로 높게 울렸습니다. 특히 K 군의 웃음소리는――K 군은 S 군이나 M코 씨에게 자기 여동생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런 시골에 있는 여동생은 여학교를 막 졸업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듣자 하니 남편이 될 사람은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안 하는 품행방정한 신사여야 한다고 합니다.
 "저희는 모두 낙제네요?"
 S 군은 제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눈에는 가련할 정도로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습니다.
 "담배도 안 하고 술도 안 하고……즉 오빠한테 애둘러 한 소리 하는 거지."
 K 군도 곧장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저는 적당한 대답을 하면서 서서히 이 산책이 괴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따라서 M코 씨가 대뜸 "이만 골아갈까요"하고 말했을 때에는 한숨을 돌렸습니다. M코 씨는 밝은 얼굴로 저희가 무어라 말도 하기 전에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하지만 온천 여관으로 돌아가는 도중, M코 씨는 어머니하고만 이야기했습니다. 저희는 물론 전과 같은 소나무 숲 안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그 붉은 벌은 어디론가 가버렸습니다.
 그로부터 보름 가량이 지난 후의 일입니다. 저는 날이 어두운 통에 무언가를 할 생각이 들지 않아 연못이 있는 정원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러자 M코 씨의 어머니가 홀로 의자에 앉아 도쿄 신문을 읽고 있었습니다. M코 씨는 오늘은 K 군이나 S 군과 온천 여관 뒤에 위치한 Y산에 올랐을 터입니다. 이 부인은 저를 보고는 노인 안경을 벗고 인사했습니다.
 "비켜 드릴까요?"
 "아뇨, 이거면 됩니다."
 저는 마침 옆에 있던 낡은 등나무 의자에 앉기로 했습니다.
 "어젯밤에 쉬지 못 하셨죠?"
 "아뇨……무슨 일 있었나요?"
 "그 미치광이 남자가 대뜸 복도를 달리더라고요."
 "그런 일이 있었나요?"
 "네, 어딘가의 은행이 도난 위기란 기사를 읽더니 그러더라고요."
 저는 그 소나무잎 문신을 한 미치광이의 일생을 상상해봤습니다. 그리고――비웃음 당해도 도리가 없습니다. 제 동생이 가진 주식을 떠올렸습니다.
 "S 씨가 말씀해주셨는데……"
 M코 씨의 어머니는 어느 틈엔가 제게 완곡히 S 군에 관해 물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느 대답에나 "겠죠"니 "걸요"니를 덧붙였습니다.(저는 항상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밖에 여기지 못합니다. 가족이니 재산이니 사회적 지위 같은 것에는 자연스레 냉담해집니다. 더군다나 가장 나쁜 건 그렇게 사람으로만 생각할 때마저 어느 틈엔가 저와 닮은 점만 그 사람에게서 끌어내는 데다가 멋대로 호오를 정하는 점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부인의 생각에――S 군의 신원을 살피는 생각에 우스움을 느꼈습니다.
 "S 씨는 신경질적이죠?"
 "네 뭐, 그런 편이라 봐야죠."
 "세상 물정도 잘 모르는 거 같고요."
 "그야 어리니까요……그래도 남만큼은 하는 거 같은데 말이죠."
 저는 이런 이야기 중에 문득 연못 물가서 민물게가 기어오르는 걸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그 민물게는 다른 민물게를――등껍질이 반쯤 박살난 다른 민물게를 끌고 있었습니다. 저는 어느 틈엔가 크로폿킨의 상호부조론에 나오는 게 이야기를 떠올렸습니다. 크로폿킨의 가르침에 따르면 게는 항상 다친 동료를 돕는다고 합니다. 하지만 뭐 동물학자가 실례를 관찰한 거에 따르면 그건 다친 동료를 먹기 위한 거라고 합니다. 저는 두 게가 서서히 석창포 뒤로 숨는 걸 보면서 M코 씨의 어머니와 이야기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우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잃고 말았습니다.
 "다들 저녁에나 돌아오겠죠?"
 저는 이런 말로 일어났습니다. 동시에 또 M코 씨의 어머니의 얼굴에 담긴 표정을 느꼈습니다. 그건 자그마한 놀람과 함께 무언가 본능적인 원망을 빛내는 표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부인은 곧 조용히 대답했습니다.
 "네, M코도 그렇게 말했어요."
 저는 제 방으로 돌아와 복도 끝에 앉아 소나무 숲이 부풀어 오른 Y산의 정상을 바라보았습니다. 산 정상은 돌 위에 옅은 빛을 얹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런 광경을 보면서 불쑥 우리 인간이 애처롭게 여겨졌습니다……
 M코 모녀는 S 군과 함께 2, 3일 전에 도쿄로 돌아갔습니다. K 군은 듣자 하니 이 온천 여관에 여동생이 오는 걸 기다렸다(아마 제가 돌아가는 것보다 일주일가량 더 걸리겠지요) 돌아갈 준비를 한다고 합니다. 저는 K 군과 둘이 되었을 때 마음이 편해지는 걸 느꼈습니다. 물론 K 군을 배려한다는 게 되려 K 군에게 불편해질 우려가 있는 건 분명합니다. 하지만 어찌 됐든 K 군과 함께 비교적 편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오늘 저녁도 탕에 들어가 한 시간가량 세자르 프랑크를 논했습니다.
 저는 지금 제 방에서 이 편지를 쓰고 있습니다. 이곳은 벌써 초봄이 되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눈을 떠 제 방 장자 위에 자그마한 Y산이나 소나무 숲이 거꾸로 떠오른 걸 발견했습니다. 그건 물론 문의 구멍으로 들어오는 빛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배로 누워서 담배 하나를 피우며 이 묘하게 선명한, 작은 초가을 풍경을 조용히 느꼈습니다………
 그럼 이만 마치겠습니다. 도쿄도 저녁에는 꽤나 견디기 쉬워졌겠지요. 자제분들께도 안부 부탁드립니다.

 

 

 

  1. 미소년, 남색을 파는 남자 등 [본문으로]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