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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속 서쪽의 사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4.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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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04.02 - [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 서쪽의 사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1 다시 이 사람을 보라

 그리스도는 '만인의 거울'이다. '만인의 거울'이란 말은 만인이 그리스도를 따라 하란 말이 아니다. 단 한 명의 그리스도 안에 만인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그리스도를 그리다 잡지 마감에 쫓겨 펜을 내려놔야만 했다. 지금은 조금 여유가 생겼기에 다시 한 번 나의 그리스도를 덧그리고 싶다. 누구나 내 글에――특히 그리스도를 그린 것 따위에 관심을 느끼는 법은 없으리라. 하지만 나는 네 복음서 속에서 또렷이 나를 부르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느끼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를 덧그리는 것 또한 나 스스로는 멈추게 할 수 없다.

     2 그의 전기 작가

 요한은 그리스도의 전기 작가 중에서 가장 그에게 아양을 떨었다. 야만적인 아름다움으로 빛나던 마태나 마가에 비하면――아니, 솜씨 좋게 그리스도의 일생을 이야기해준 누가에 비교해도 근대에 태어난 우리에게는 인공 감미료 맛을 느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요한 또한 그리스도의 일생의 의미를 많은 사실로 전하고 있다. 우리는 요한의 그리스도 전기에 혹은 짜증을 느꼈으리라. 하지만 세 명의 전기 작가들에게 어떤 매력도 느꼈으리라. 인생에 실패한 그리스도는 독특한 색채를 주지 않는 한 쉽게 "신의 아이"가 되지 못 한다. 요한은 이러한 색채를 주는데, 적어도 당대에서는 가장 up to date(최신의) 수단을 취했다. 요한이 전한 그리스도는 마가나 마태가 전한 그리스도처럼 천재적 비약을 갖추고 있지 않다. 하지만 엄숙하면서도 상냥한 건 분명하다. 그리스도의 일생을 전하는 데 무엇보다 간고[각주:1]를 중시한 마고는 아마 그의 전기 작가 중에서 가장 그리스도를 알았으리라. 마가가 전한 그리스도는 현실주의적으로 생생하다.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와 악수하고, 그리스도를 안고――더욱이 조금 과장하자면 그리스도의 수염 냄새를 느꼈으리라. 하지만 장엄하면서도 배려심 깊은 요한의 그리스도 또한 물릴 수 없다. 어찌 되었든 그들이 전한 그리스도에 비하면 후대의 그리스도는――특히 그를 데카당스한 어떤 러시아인의 그리스도는 그를 상처 입힐 분이다. 그리스도는 한 시대의 사회적 약속을 유린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매춘부나 세금 관리인, 나병 환자는 항상 그의 대화 상대였다.) 하지만 천국을 보지 않은 건 아니다. 그리스도를 l'enfant(어린아이)로 그린 화가들은 그런 그리스도에게서 연민에 가까운 걸 느꼈으리라.(그건 모태를 벗어나 "유아독존"의 사자후를 지른 부처보다도 믿음직하지 못 한 것이었다.) 하지만 유아였던 그리스도를 대하는 그들의 연민은 조금일지라도 데카당이었던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동정을 이기고 있다. 그리스도는 아무리 포도주에 취했어도 자기 스스로의 안에 있는 자에게는 천국을 보여줘야만 했다. 그의 비극은 그 때문에――단순히 그 때문에 일어났다. 어떤 러시아인은 당시의 그리스도가 얼마나 신에 가까웠는지 알지 못 한다. 하지만 네 전기작가들은 하나같이 이 사실에 주목하였다.

     3 공산주의자

 그리스도는 갖은 그리스도처럼 공산주의적 정신을 가지고 있다. 만약 공산주의자가 보면 그리스드의 말은 모두 공산주의적 선언으로 바뀌리라. 그보다 먼저 떠난 요한마저 "옷을 두 벌 가진 사람은 없는 사람과 나누어 가져라"[각주:2]라 소리쳤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무정부주의자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그의 앞에서 저절로 본체를 드러내고 있다.(물론 그는 우리 인간을 조종하는 건 불가능했다――혹은 우리 인간에게 조종당하지 않았다. 그건 그의 요셉이 아닌, 성령의 자식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 있던 공산주의자를 논하는 건 스위스와 거리가 먼 일본에서는 불편을 동반한다. 적어도 그리스도 신자들 때문에.


     4 무저항주의자

 또 그리스도는 무저항주의자였다. 그건 그가 동지마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대에는 마치 톨스토이가 타인의 진실을 의심한 것처럼――하지만 그리스도의 무저항주의는 무언가 더욱 부드럽다. 조용히 잠들어 있는 눈처럼 차갑기는 해도 부드럽다……

     5 생활자[각주:3]


 그리스도는 최속도의 생활자이다. 부처는 도를 닦기 위해 몇 년인가 설산 안에서 살았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세례를 받고는 사십 일의 단식 후, 곧장 고대의 저널리스트가 되었다. 그는 스스로 불타려 하는 촛불 하나와 똑닮았다. 그가 이뤄낸 일이나 저널리즘은 곧 이 촛불의 촉루였다.

     6 저널리즘 지상주의자

 그리스도가 가장 사랑한 건 눈부신 그의 저널리즘이다. 만약 다른 걸 사랑했다면 그는 큰 무화과 그늘에서 나이 먹은 예언자가 되었으리라. 그렇게 되었다면 그리스도의 위에도 평화가 내려왔을 게 분명하다. 그는 마치 고대의 현자처럼 갖은 타협 아래에서 작게 웃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운명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에게 그런 평안한 말년을 주지 않았다. 그건 수난의 이름을 부여하더라도, 그야말로 그의 비극이었으리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이 비극 때문에 영원히 괴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

     7 그리스도의 지갑

 그런 그리스도의 수입은 아마 저널리즘에 의지하고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는 "내일 일을 생각지 말라"고 할 정도로 보헤미안이었다. 보헤미안?――우리는 여기서도 그리스도 안의 공산주의자를 찾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의 천재적 비약으로 내일을 살피지 않았다. "욥기"를 쓴 저널리스트는 어쩌면 그보다도 웅대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는 "욥기"에 없는 상냥함을 품은 수완을 지니고 있었다. 이 수완은 그의 수입을 적잖이 도왔으리라. 그의 저널리즘은 십자가에 걸리기 전에 그야말로 최고의 시가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의 사후에 비하면며――특히 미국의 성서 회사는 신성에도 매년 이익을 취하고 있다……

     8 한 때의 마리아

 그리스도는 이미 열두 살일 적에 천재성을 드러냈다. 그의 전기 작가 중 한 명――누가의 말에 따르면, "어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 부모는 이것도 모르고, 3일 후에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그는 선생들 가운데 앉아서 듣기도 하고 묻기도 했으며 그의 말을 듣는 사람들은 다 그의 총명함과 대답하는 말에 감탄하였다."[각주:4] 그건 논리학을 배우지 않고도 논리에 능했던 학창시절의 스위프트와 같은 경우다. 그런 조숙한 천재는 물론 그리 드물지는 않다. 그리스도의 부모는 그를 찾고는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찾느라고 무척이나 애썼단다"[각주:5]하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의외로 아무렇지 않게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내가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한다는 것을 모르셨습니까?"[각주:6]하고 답했다. "그러나 부모는 그 말뜻을 깨닫지 못하였다"[각주:7] 또한 아마 사실에 가까우리라. 하지만 우리를 움직이는 건 "그의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에 새겨두었다"[각주:8]는 한 구절이리라. 아름다운 마리아는 그리스도가 성령의 아이임을 알았다. 이 당시의 마리아의 심정은 가련한 동시에 애달프다. 마리아는 그리스도의 말 때문에 요셉에게 부끄러워했으리라. 또 스스로의 과거도 떠올려야 했으리라. 마지막으로――어느 인기척 없는 밤중에 대뜸 그녀를 놀라게 한 성령의 모습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사람은 전무, 일은 전부"라는 플로벨의 말은 어린 그리스도 안에도 담겨 있었다. 하지만 목공의 아내였던 마리아는 이때도 어두컴컴한 "눈물의 계곡"을 마주해야 했던 것이리라.


     9 그리스도의 확신

 그리스도는 그의 저널리즘이 언젠가 많은 독자들 손에 부흥되리란 확신을 지니고 있었다. 그의 저널리즘이 위력을 가진 건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또 마지막 심판이――즉 자신의 저널리즘이 이기리라 확신하였다. 물론 그런 확신도 이따금은 흔들렸으리라. 하지만 그는 대다수의 경우, 이런 확신 하에 자신의 저널리즘을 드러냈다. "선한 분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다"[각주:9]――그 말은 그의 생각을 정직히 표현한 것이리라. 하지만 그리스도는 스스로도 "선한 자"가 아닌 걸 알면서도 시적 정의를 위해 싸웠다. 이 확신은 사실이 되었지만 물론 그의 허영심이기도 했다. 그리스도 또한 여러 그리스도들처럼 항상 미래를 꿈꾼 초바보였다. 만약 초인이란 말에서 따와 초바보란 말을 만든다면……


     10 요한의 말

"보라! 세상 죄를 짊어지신 하나님의 어린 양이시다! 내 뒤에 오시는 분이 계시는데 그분은 나보다 위대하시다"[각주:10]――세례자 요한은 그리스도를 보고 그의 주위에 있던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전해진다. 벽 위에 스트린드베리의 초상을 걸고 "여기에 나보다도 위대한 사람이 있다"고 말한, 듬직한 입센의 심정은 요한의 심정에 가까웠으리라. 그 사실에선 가시덤불에 가까운 질투보다도 되려 장미꽃을 닮은 이해의 아름다움만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어린 그리스도가 어느 정도의 천재였는지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요한도 이 때에는 역시 가장 천재적이었으리라. 마치 키가 큰 갈대가 천천히 별을 쓰다듬는 것처럼……


     11 한 때의 그리스도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걸리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었다. "솔로몬보다 위대한 자"라 자칭하는 그리스도의 그런 겸손함은 우리를 움직일 수밖에 없다. 그건 그의 제자들에게 교훈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그도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인간의 자식"이란 걸 느꼈기 때문에 스스로 그런 행동을 했으리라. 그 사실은 요한이 그리스도를 보고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한 것보다도 장엄하다. 평화에 이르는 길은 누구나 그리스도보다도 마리아에게서 배워야 한다. 마리아는 단지 이 현세를 인내하며 걸은 여인이다.(천주교는 그리스도에 이르기 위해 마리아를 통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게 꼭 우연인 건 아니다. 곧장 그리스도에게 이르려는 건 인생을 항상 위험케 한다.) 혹은 그리스도의 어머니였던 것 이외에는 소위 가치성이 없는 여인이다. 제자들의 말마저 씻어준 그리스도는 물론 마리아의 발밑에 엎드리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그의 제자들은 이때에도 그를 이해하지 못 했다.
"너희도 이와 같이 깨끗하다."[각주:11]

 그건 그의 겸손과 사후에 이기리라는 그의 희망(혹은 그의 허영심)이 하나로 녹아내린 말이다. 그리스도는 사실상, 역설적으로도 바로 이 순간에는 그들에게 밀린 동시에 그들보다 백 배 정도는 앞서 나가 있었다.

     12 최대의 모순

 그리스도의 일생 중 최대의 모순은 그가 우리 인간을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 했단 점이다. 그는 닭이 울기 전에 베드로마저 세 번 자신을 모른다고 말할 걸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의 말은 우리 인간이 얼마나 약한지를 가르쳐주고 있다. 심지어 그는 스스로 역시 약하다는 걸 잊고 있었다. 이 탓에, 그리스도의 일생을 배경으로 한 기독교를 이해하는데 "예언자 X, Y, Z의 말을 따르기 위함이다"하는 궤변을 마련해야 했다. 그뿐 아니라 끝내 이런 궤변이 낡은 지폐가 된 후에는 갖은 철학이나 자연 과학의 힘을 빌려야 했다. 기독교는 필경 그리스도가 만든 교훈주의적 문예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그의(그리스도의) 로망주의적 색채를 제외하면, 톨스토이가 만년에 쓴 작품은 이 고대의 교훈주의적 배경에 가장 가까운 문예이리라.

     13 그리스도의 말

 그리스도는 그의 제자들에게 "나는 누구인가."하고 물었다. 이 물음에 답하는 건 어렵지 않다. 그는 저널리스트인 동시에 저널리즘 속의 인물――혹은 "비유"라 불리는 단편 소설의 작가인 동시에 "신약 성서"라 불리는 소설적 전기의 주인공이었다. 우리는 많은 그리스도들 가운데에서도 그런 사실을 발견하리라. 그리스도도 그의 일생을 스스로의 작품 속 색인에 더할 수밖에 없는 한 사람이었다.

     14 독신

"예수님은……집에 들어가 아무도 모르게 계시려 하였으나"[각주:12]――그런 마고의 말은 또 다른 전기작가의 말이다. 그리스도는 번번이 숨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저널리즘이나 기적은 그의 주위에 사람을 모았다. 그가 예루살렘을 찾은 것도, 베드로가 그를 "메시아"라 부른 것도 영향을 끼쳤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열두 제자들보다 감람 나무나 바위산을 사랑했으리라. 심지어 저널리즘이나 기적을 행한 건 그의 성격이 가진 힘이다. 그는 여기서도 우리처럼 모순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저널리스트가 된 후, 그가 독신을 사랑한 건 의심할 여지없는 사실이다. 톨스토이는 죽을 적에 "세상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많이 있다. 그런데 왜 나 하나로 소란인가?"하고 말했다. 이렇게 명성이 높아지면서 스스로를 돌보지 않는 심리는 우리에게도 없지만은 않다. 그리스도는 명성 높은 저널리스트였다. 하지만 이따금 목공의 자식이었던 과거를 그리워했던 걸지도 모른다. 괴테는 그런 마음을 파우스토 스스로 말하게 했다. 파우스트의 제2부 제1막은 사실 이 숨결이 만든 것이라 봐도 좋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다행히도 풀과 꽃이 자란 산 위에 머물러 있었다……

     15 그리스도의 한탄

 그리스도는 비유를 이야기한 후, "왜 너희는 알지 못 하느냐?"하고 물었다. 이 한탄도 빈번히 반복되고 있다. 그건 그만큼 우리 인간을 알고, 그만큼 보헤미안적 생활을 거듭한 자에게는 혹여 우습게 보였으리라. 하지만 그는 이따금 히스테릭하게 소리칠 수밖에 없었다. 바보들은 그를 죽인 후에 온 세계에 커다란 사원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사원에서 역시 그의 한탄을 느끼리라.
 "왜 너희는 알지 못 하느냐?――그건 그리스도 한 사람만의 한탄은 아니다. 후대에도 꼴사납게 죽은 갖은 그리스도들의 한탄이다.

     16 사두개파와 바리새파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그리스도보다도 사실상 불멸이다. 이 사실을 지적한 건 '진화론'의 저자 다윈이었다. 그들은 앞으로도 지의류처럼 한사코 지상에 존재하리라. '적자생존'은 그들에게 딱 들어 맞는 말이다. 그들만큼 지상의 적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감격도 없이 방심 없는 처세술에 임하고 있다. 마리아는 아마 그리스도가 그들 중 한 사람이 아닌 걸 슬퍼했으리라. 베토벤이 괴테를 매도한 건 그야말로 괴테 안에 있는 사두개파와 바리새파를 매도한 것이었다.

     17 가야바

 대제사장이었던 가야바에게도 후대의 원한이 모여 있다. 그는 그리스도를 미워했으리라. 하지만 이 미움은 반드시 그 혼자 지녔던 건 아니다. 단지 그를 드높이는 게 그리스도를 미워한, 혹은 질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편리했기 때문이다. 가야바는 포를 입고 차갑게 그리스도를 노려다 보았으리라. 현세는 거기에 필라투스를 더해 기력이 없는 성령의 자식을 비웃고 있다. 불타는 횃불의 빛 속에서……

     18 두 도둑


 그리스도의 죽음은 평판이 좋지 않았다. 그 사실은 그가 십자가 걸릴 때마저 도둑들과 함께였던 것으로 명백해진다. 도둑들 중 한 명은 그리스도를 매도하는 걸 거리끼지 않았다. 그의 말은 그의 스스로 안에서 역시 인생을 위해 쓰러진 그리스도를 찾아낸 걸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도적은 그보다도 더한 망상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도는 이 도둑의 말에 그의 마음을 움직였으리라. 이 도둑을 위로한 그의 말은 동시에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다."[각주:13]

 후대는 이 도둑에게 그들의 동정을 주고 있다. 하지만 다른 도둑에게는――그리스도를 매도한 도둑에게는 경멸만 보여주고 있다. 이건 그야말로 그리스도의 가르친 시적 정의의 승리를 보여주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사두개파와 바리새파는 오늘도 남몰래 이 도둑에게 찬성하고 있다. 사실상 천국에 들어가는 건 그들에겐 무화과나 참외의 즙을 마시는 것만큼이나 중대하지 않다.

     19 병졸들

 병졸들은 십자가 아래에서 그리스도의 옷을 나누었다. 그들은 옷 이외에 그가 지닌 걸 보지 못 했던 것이다. 그들은 필시 어깨폭이 넓은 모범적 병졸이었음이 분명하다. 그리스도는 필시 그들을 내려다 보며 그들의 행동을 경멸했으리라. 하지만 또 동시에 시인했으리라. 그리스도는 그리스도 자신 이외에는 우리 인간을 이해하고 있다. 그의 가르침에 따르면, 감상주의적 영탄은 그리스도가 가장 싫어하는 것이었다.

     20 수난

 십자가에 걸린 그리스도는 다소의 허영심은 가졌을지언정, 육체적 고통과 함께 정신적 고통 또한 받았으리라. 특히 십자가를 지켜보던 마리아를 바라보는 게 괴로웠으리라. 하지만 그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는 필사적인 목소리를 낸 후에도(설령 그건 그가 사랑한 찬미가 중 한 구절이었다 하더라도) 그가 숨을 거두기 전까지 몇몇 신음을 하였다. 우리는 이 신음 속에서 단지 죽음에 몰린 힘만을 느끼리라. 하지만 마태의 말에 따르면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둘로 찢어지고 땅이 흔들리며 바위가 갈라지고 무덤이 열려 잠자던 많은 성도들이 살아났다"[각주:14]고 한다. 그의 죽음은 확실히 많은 사람에게 그런 충격을 주었으리라.(마리아가 현기증을 일으킨 걸 기록하지 않은 건 신약성서의 위엄을 지키기 위함이었다.) 그리스도의 일언일행에 영원한 주역을 붙이는 파피니마저 이 사실은 마태를 끌어왔음 지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파피니의 시적 정열은 그곳에서도 꼬리를 드러내고 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사실상 그의 예언자적 천재를 맹신하던 사람들에게는――그에게서 엘리야를 보던 사람들에게는 너무나도 우리와 가까운 것이었다. 따라서 불수레를 타고 하늘 위로 떠난 것보다도 두려웠다. 그들은 단지 그 때문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은 제사장들은 이 충격에 속지 않았으리라.

 "거 보라지!"

 그들의 말은 예루살렘에서 뉴욕이나 도쿄에도 전해지고 있다. 예루살렘을 둘러싼 감람 산들을 가장 산문적으로 뛰어넘으며.

 

     21 문화적인 그리스도

 제자들이 그리스도를 이해하지 못 한 건 그가 너무나도 문화인이었기 때문이다.(그의 천재성을 별개로 치더라도) 그들 중 대부분은 적어도 그에게 기적을 바랐다. 철학이 발전한 마가다의 왕자는 그리스도보다도 기적을 행하지 않았다. 그건 그리스도의 죄보다도 되려 유대인의 죄이다. 그는 로마의 시인들에게 밀리지 않는 일류 저널리스트였다. 또 동시에 그의 애국적 정신마저 내던지고 돌아보지 않는 문화인이었다.(마가는 그리스도의 전기 7장 1절에서 25절까지 이 사실을 기록해두었다.) 세례자 요한은 그의 앞에선 낙타털 옷이나 메뚜기, 석청에 야인의 면모를 드러냈다. 그리스도는 요한이 말한 것처럼 세례에 단지 성령을 사용했다. 그뿐 아니라 그의 세례(?)를 받은 건 열두 제자들 이외에도 매춘부나 세금 관리인, 죄수였다. 우리는 그런 사실에서도 저절로 그가 부드러운 심장을 지닌 걸 볼 수 있으리라. 그는 또 기적을 행할 때마다 세밀한 신경을 드러내고 있다. 문화적인 그리스도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야만적인 죽음을 이루게 되었다. 하지만 야만한 세례자 요한은 문화적인 살로메 탓에 접시 위에 머리가 얹혔다. 운명은 여기서도 그들을 위한 역설적인 장난을 잊지 않았다……

     22 빈곤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저널리즘은 빈곤한 사람들이나 노예를 위로하였다. 그건 물론 천국에 가려 생각하지 않는 귀족이나 부자에게 형편이 좋았기 때문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의 천재성은 그들을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들뿐일까. 우리도 그의 저널리즘 속에서 무언가 아름다운 걸 찾아내고 있다. 몇 번 두드려도 열리지 않는 문이 있다는 건 우리도 모르지 않는다. 좁은 문은,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우리가 꼭 행복해지는 길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의 저널리즘은 항상 무화과 같은 단맛을 가지고 있다. 그는 실로 이스라엘 백성이 낳은 고금에서 찾아보기 힘든 저널리스트였다. 또 동시에 우리 인간이 낳은 고금에서 찾아보기 힘든 천재였다. "예언자"는 그 이후로는 유행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일생은 항상 우리를 움직이리라. 그는 십자가에 걸렸기에――저널리즘 지상주의를 내세웠기에 갖은 걸 희생했다. 괴테는 완곡히 그리스도를 대하는 그의 경멸을 보여주고 있다. 마치 후대의 그리스도들이 조금은 괴테를 질투하듯이――우리는 에마오의 여행자들처럼 우리 마음을 불태울 그리스도를 추구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1. 간결(簡潔)하고 예스러움 [본문으로]
  2. 누가복음 3장 11절 [본문으로]
  3. 세상에서 활동을 하며 살아 나가는 사람 [본문으로]
  4. 누가복음 2장 42~47 [본문으로]
  5. 누가복음 2장 48절 [본문으로]
  6. 누가복음 2장 49절 [본문으로]
  7. 누가복음 2장 50절 [본문으로]
  8. 누가복음 2장 51절 [본문으로]
  9. 누가복음 18장 19절 [본문으로]
  10. 요한복음 1장 29~30 [본문으로]
  11. 요한복음 13장 10절 [본문으로]
  12. 마가복음 7장 24절 [본문으로]
  13. 누가복음 23장 43절 [본문으로]
  14. 마태복음 27장 51~52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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