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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선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먼 옛날, 중국의 한 시골에 서생 하나가 살았습니다. 중국 서생이니 역시 복숭아꽃 핀 창문 아래에서 책만 읽었겠지요. 그러자 그 서생의 집 옆에 한 젊은 여자 하나가――그것도 아름다운 여자 하나가 하인 하나 쓰는 법 없이 살고 있었습니다. 서생이 그 젊은 여자를 의아해한 건 말할 필요도 없지요. 실제로 여자의 신원을 시작으로, 당최 무얼 하고 지내는지도 아무도 알지 못 했으니까요. 어느 바람 없는 봄날 저녁, 서생이 밖에 나와 있자니 이 젊은 여자의 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디선가 닭이 느긋이 우는 와중에도 참으로 시끄럽게 들려오는 것입니다. 서생은 무슨 일인가 싶어 그녀의 집 앞으로 가보았습니다. 그러자 눈썹을 올린 여자가 나이를 먹은 나무꾼을 붙잡은 채로 백발 머리를 퍽퍽 때리고 있지 뭡니까. 심지.. 2021. 2. 22.
나가사키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마름모꼴의 연. 샌트 몬타니의 하늘에 걸린 연. 하늘하늘 몇 개나 날리는 연. 길거리에 줄지은 여름밀감이나 바나나. 돌길의 햇살에 붉어진 분위기. 마을 한가득 나는 제비. 마루야마 둘레를 두른 버드나무. 운하에는 돌로 된 메가네바시. 다리에는 오가는 밀짚모자――이다금 헤엄치러 오는 집오리 한 무리. 하얀 털을 햇살에 드러낸 집오리 한무리. 난킨테라 돌계단의 도마뱀. 중화민국의 깃발. 연기를 내뿜는 영국의 배. '항구를 둘러싼 산의 젊은 잎에 빛이……' 정수리가 벗겨진 사이토 모키치. 로티. 쉔 칸. 나가이 가후. 마지막으로 '일본 성모의 절' 내부의 어머니 마리아. 보리 이삭에 섞인 도깨비부채. 빛이 없는 대낮의 촛불. 창밖에는 먼 샌트 몬타니. 산 위 하늘에는 역시나 마름모꼴의 연. 키타하라 하쿠슈가 .. 2021. 2. 22.
이누카이 군에 관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누카이 군의 작품은 대부분 읽어 보았다. 또 내가 읽은 작품은 하나 같이 느슨한 면이 없다. 전부 정성을 들여 만들었다. 만약 결점이 있다면 지나치게 정성을 들인 나머지 암시하는 힘이 빠져 있단 점일까. 또 이누카이 군의 작품은 모두 부드럽게 아름답다. 이런 부드러운 아름다움은 다른 작가들에게선 찾아보기 어렵다. 나는 그 점에서 젊은 버드나무 한 그루를 느꼈다. 언젠가 나는 일을 하던 이누카이 군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때 본 이누카이 군의 얼굴은(만약 실례가 아니라면) 여자와 몸을 섞은 뒤만 같았다. 나는 이누카이 군을 떠올릴 때마다 반드시 그 얼굴을 떠올린다. 동시에 이누카이 군의 작품이 참으로 정성스레 만들어지는 게 우연이 아니지 싶다. 이누카이 군에 관해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이누카이 군의 작.. 2021. 2. 22.
모모타로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하나 옛날 옛날, 먼 옛날. 어떤 깊은 산 안쪽에 커다란 복숭아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크다는 말로는 부족할지 모르다. 이 복숭아 가지는 구름 위로 뻗었고 뿌리는 대지의 밑바닥에 자리한 황천에까지 미쳤다. 듣자 하니 천지개벽의 때, 이자나기노미코토는 여덟 개의 번개를 물리기 위해 요모츠히라카사에 복숭아 씨앗을 뿌렸다고 한다――그 신화 시절의 복숭아 열매가 이 나무가 된 셈이다. 이 나무는 세계의 여명 이후로 만 년에 한 번 꽃을 피우고 만 년에 한 번 열매를 맺었다. 꽂은 진홍 꽃봉오리에 황금 술을 지녔다고 한다. 열매는――물론 열매 또한 큼지막했다. 하지만 그보다도 신비한 건 그 열매의 중심에 아름다운 갓난아기를 한 명씩 절로 품고 있다는 점이었다. 옛날 옛날, 먼 옛날. 이 나무는 산골짜기를 덮은 가.. 2021. 2. 22.
서적 디자인에 관한 내 생각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일본처럼 기계를 이용할 수 없는 곳에서는 조금 부족할지 몰라도, 어찌 됐든 아름다운 디자인의 책이 나오는 건 좋은 일이라 생각합니다. 디자이너, 인쇄공, 서점 등에 종사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일반적인 디자인 비용 이상의 돈을 들이지 않더라도, 현행 디자인보다도 훨씬 아름답게 가능할 터입니다. 그 점에서는 오아나 류이치 디자이너를 얻은 점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마치겠습니다. 2021. 2. 22.
여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암거미는 한여름의 태양빛을 받으며 붉은 월계화 아래에서 무언가를 가만히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자 하늘에서 날갯소리가 들리며 꿀벌 하나가 무너지듯이 월계화 아래로 왔다. 거미는 곧장 고개를 들었다. 고요한 대낮의 공기 속에는 벌들의 날갯소리가 만든 잔향이 자그마한 파동을 남기고 있었다. 암거미는 어느 틈엔가 소리도 없이 꽃 밑바닥에서 움직였다. 벌은 이미 꽃가루 범벅이 된 채 꽃술 아래에 담긴 꿀에 주둥이를 뻗었다. 잔혹한 침묵이 몇 초인가 흘렀다. 이윽고 붉은 월계화 꽃은 꿀에 취한 벌 뒤 쪽에 암거미의 모습을 토해냈다. 거미는 맹렬히 벌의 목을 향해 달려들었다. 벌은 필사적으로 날개를 휘저으며 무작정 적을 쏘려 했다. 날갯짓에 꽃가루가 태양빛의 품에 날렸다. 하지만 거미는 한 번 물은 입을 결코 놓는 .. 2021. 2.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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