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극장이 이제까지 '현대극'을 하지 않았다 말하면 여기저기서 이론이 나올 테지요. 하지만 저는 그럼에도 '일본은 현대극이 없다'고 단언합니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먼저 이제까지 '신극'이라 불린 가부키도 신파도 아닌 연극――그건 대개 서양극의 번역과 약간의 창작극을 포함하고 있는데――은 각본적으로 봤을 때면 또 모를까 무대에서 보면 '연극'으로서의 중요한 요소가 빠져 있어 그 매력은 '일부러 전철까지 타고 이동해 돈까지 내며' 보기 위해선 너무 빈약하곤 했습니다. 연극이란 건 '연극 연구가'만이 보는 게 아니니 그런 '신극'은 일반 애호가 입장에선 썩 달갑지 않습니다.
본래는 그런 '신극'이 점점 성장해 '연극'으로서 완벽한 매력을 발휘해야 합니다만 슬프게도 일본에선 그런 과정을 밟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무엇보다 배우의 지도 방법이 나쁘며 둘째로는 배우의 공부 방법이 나쁘기 때문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서양극의 소개에서 시작된 일본의 '현대극'은 서양 연극의 '진정한 매력'을 지나치게 배우의 연기 이외의 부분에서 찾아온 셈이지요.
그럼 서양 연극의 진정한 매력은 무엇인가. 물론 '각본'의 문학적 가치에도 있을 테고 또 '연출'의 근대적 공법에도 있을 테지요. 하지만 그 이상으로 배우가 그 시대의 우수한 교양을 배워 그 시대의 사상과 감정이 묻어내는 생활의 톤을 유감 없이 연기로 표현해 내는 능력을 지녔다는 데서 오고 있습니다.
또 그 생활의 톤이란 그 시대의 '말'에 대한 예민한 감성을 지니는 일이기도 합니다.
일본인은 대개 그런 감성을 존중하지 않는 듯합니다만 배우는 이를 무시해 시대의 분위기를 내야만 하고 희곡가는 이것 없이는 현대를 그릴 수 없습니다.
'연극' 속 '말'이란 넓은 의미에서 대사와 몸짓을 포함하는데 몸짓은 대사를 보충하며 무대 이미지는 이 두 요소를 통해 눈과 귀에 관념의 즐거운 운율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선 희곡에 써진 '대사'를 '정확하게' 말하는 게 근본적인 문제인데 이 '정확함'은 현대극에서 굉장히 엄밀한 수준이 요구 되며 '거의 정확한' 수준은 배척해야만 합니다.
그런 연구는 이제까지의 '신극' 속에서 등한시되어 왔습니다. '아니, 당신이었나요?'하는 대사가 그 '표현법'에 따라 스무 개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걸 생각해 본 배우는 한 명도 없다 봐도 되지요.
앞으로의 관객은 그런 점을 놓치면 안 됩니다. '연극'이 재밌다는 인상 속에 그런 비평이 포함되지 않으면 현대 연극은 진보하지 않을 테지요.
'고전 번역 > 키시다 쿠니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희곡집 '까마귀'의 인상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2.24 |
---|---|
감상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2.23 |
의식주 잡감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2.20 |
아름다운 이야기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2.18 |
라디오 드라마 선자의 후기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2.17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