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디오 문학이란 새로운 형식에 나는 늘 관심을 가지고 무언가 원리적인 걸 발견하려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그걸 위해 방송국과 특별한 관계를 맺거나 특수한 편의를 받고 있는 건 아니니 좀처럼 마음같이 연구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늘까지 라디오 드라마라 칭해지는 일종의 형식도 내 머릿속에선 여러 공상이 연결되어 있으나 실제로 그걸 시도해 볼 기회마저 간단히 얻지 못하고 있다.
나는 라디오 소설 내지 라디오 이야기란 걸 생각하고 있다.
라디오 풍경이란 게 어디서 만들어진 말인지는 모르나 요컨대 그런 명칭은 문학의 양식적 분류라 한다면 지극히 근거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스케치'풍이라면 창작으로서 개별적인 취급을 받을 필요가 없으며 소설이나 드라마 부류에 넣어도 지장은 없지 싶다. 소설이나 드라마란 개념을 근대풍으로 해석하면 그걸로 되는 것이다. 실제로 이번 응모 작품 중 또렷이 그 특수성을 드러낸 건 하나도 없다. 소설도 드라마도 아니란 제멋대로의 '제한'이 되려 이를 '예술적'으로 볼품없게 만들고 흥미 위주로 만드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때문에 만약 이 형식을 고립시킨다면 역시 '풍물시'의 서정미를 생명으로 삼는 것이야만 한다.
라디오 드라마 쪽은 어떤지 보면 이것도 대개 이 신형식에 대한 인식이 불충분하지 싶다. 그 말이란 즉 '귀로 듣는다'란 개념이 앞서 있을 뿐이지 '귀를 통해 눈앞에 떠오른다'는 본질적인 라디오 문학의 요소를 등한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테면 대화 묘사를 주로 삼는 건 얼핏 라디오 드라마의 본질로 여겨지기 쉬우나, 그 대화가 배우의 직접적인 표정으로 만들어지는 종류란 진정한 라디오적이라 할 수 없으며 되려 그 대화 자체가 저절로 명확한 표정을 연상시키며 동시에 생활의 분위기를 방불케하듯 쓰여야만 하는 것이다.
또 하나 중요한 건 라디오 문학은 무대극이나 영화와 같은 '유도적' 리듬을 생명으로 하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답답함을 느끼게 하고, 그 때문에 환상을 옮기는 심리적 '음색'의 효과를 둔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조어세의 파장이 완급과 억양의 기술을 통해 막힘없이 살려져야만 한다.
자 그런 라디오 문학의 특수한 기교 이외에 나는 내용적인 정신미와 작가적인 '표현력'을 요구한다. 물론 방송용으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은 필요하며 그렇다고 해서 대중성을 표방하는 속된 취미는 단호히 배척해야 한다.
인정을 다루는 건 좋으나 저렴한 감상주의는 곤란하며 사회 풍자도 물론 좋으나 히스테릭적인 독선은 상대할 게 못 된다. 취재의 시대적 범위는 자유로운 감각과 사상은 어딘가 새로운 데에 있었으면 한다.
어찌 되었든 청취자의 대부분을 '지루하게 하지 않는' 무언가를 가져 그런 데다 그들의(즉 우리의) 건강한 혼에 호소하는 약간의 문화적 의의를 요구하고 싶다.
내 손에 보내진 작품 중에서 이상의 조건을 나란히 구비한 건 유감스럽게도 하나도 없었으나 참고삼아 내 채점 기준을 따라 아래에 입선 작품을 나열해 간단한 비평을 해보겠다.
폭음
사상이 살짝 단순하지만 얄팍하지 않으며 소박한 감정과 명쾌한 기교를 나란히 사랑할만하다. 이 한 편을 얻은 걸로 작가는 약간 만족할 수 있었다.
봄과 부부
만인을 위한 주제, 평범하고 속되나 야만적이거나 추하지 않다. 단 묘사와 리듬에서 살짝 파탄이 느껴진다.
봄
살짝 고풍스러우나 형식적으로 새로운 꾐이 있으며 그 의도를 밀어붙인 건 볼만했다.
불량
상당한 필력이 느껴지고 심리극으로서 볼만한 구석이 있다. 단 라디오 드라마로선 살짝 평담한 경향이 있다.
가족회의
기지적인 대화에선 충분한 재능을 인정하나 후반이 현저하게 풀어져 수정을 하지 않으면 지루하기 짝이 없으리라.
어머니로 살다
상당한 작가적 숙련도가 느껴지는 점에서 '불량'과 함께 주목해야 할 작품이나 대화가 지나치게 심리적이며 라디오적 이미지가 희박하다.
모두의 푸른 하늘
시적 분위기가 풍부하다곤 못하다 옥상의 물건을 연결해 도시 생활의 단면을 보이는 점이 꽤 그럴싸하다.
신 가정청진
북적이나 지루한 생활 묘사가 의미도 없이 단속적으로 이어져 인상의 통일감을 가로막는다. 단적으로 말하면 작품 이전의 노트에 지나지 않는다. 환자의 귀에 대뜸 청진기를 넣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단 곳곳에서 대화 그 자체의 생동감은 좀처럼 버리기 어렵다.(일본방송협회 발행 '방송' 쇼와 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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