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키구치 지로 군의 두 번째 희곡집이 나왔다.
목차에 관계 없이 작품 완성도를 통해 아니, 정확히는 내 취향을 따라 이 책에 담긴 아홉 희곡에 등급을 매기자면 아래와 같으리라.
가을의 끝
여배우 선전업
까마귀
거지와 꿈
승자 피승자
한밤중
그들의 평화
밤
여자와 남자
이렇게 매긴 등급이 작가 입장에선 내키지 않을지도 모르나 그건 중요치 않다. 나는 세키구치 군의 특징이 가장 높게 발휘된 작품이 아니라면 되려 그에게 꽤나 부족한 것, 내지는 그가 항상 추구하던 걸 용감히 그 안에 넣어 집요하게 이를 쫓는 작품에 큰 관심이 갔기 때문이다.
'가을의 끝'은 말하자면 세키구치 군의 진가가 발휘된 작품이다. 그의 진가인 모랄 센스의 비판이 가장 맑고 깔끔한 표현에 이르러 일종의 서정미마저 품어서 혼연한 예술적 완성을 이뤄냈다. 이 꼼꼼한 사실적 작법을 뒷받침하는 매끈한 애수는 그 빌드락의 '쓸쓸한 사람'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하나, 그보다도 한 층 더 긴박한 호흡을 느끼게 하는 점에서 작가의 신경이 날카롭게 솟아 있다 해야 하리라. 물론 이 작품의 주인공은 폐가 아픈 문학자이다. 주위의 단조로움을 느끼게 할 정도로는 모종의 차이가 있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그 고뇌를 외면으로 폭발시켰다. 그 점에 내가 하고 싶은 말이 담겨 있다.
별개로 세키구치 군은 독일 문학 전공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평이하고 밝은 사고 방식을 좋아한다. 따라서 독자가 이해하기 어려워할 모든 표현을 피한 것처럼 보인다. 그 때문에 이치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으나, 대신 우리 같은 미숙한 작가가 빠지기 쉬운 접합점이나 거들먹거림이 없어 굉장히 좋다.
'가을의 끝' 한 편이 대표하는 세키구치 군은 사상적인 모럴리스트이다. 허위와 아집, 폭거에 대하는 인간 본성의 목소리에 끝없이 귀를 기울이고 있다. 이는 또 인습적 도덕에 대한 반항이며 벌을 받지 않는 죄악을 향한 양심의 눈초리이다.
모럴리스트이기 위해서 꼭 이상주의자여야 하는 건 아니다.
세키구치 군은 예술적으로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하나 사상적으로도 꽤나 현실주의적 색채를 짙게 가지고 있다. 이 색채는 동시에 그의 염세적 일면을 말해주는 듯하다.
나는 자신이 그런 탓인가 세키구치 군의 작품에서 받는 사상적 감명에는 이따금 얼굴을 덮고 싶어질 때가 있다. 견딜 수가 없는 것이다.
단지 이는 상상에 지나지 않으나 만약 세키구치 군이 조금이라도 디아볼릭한 경향이 있다면 그의 작품은 더욱 무서워졌으리라. 무섭다――그래, 여러 의미로.
'여배우 선전업'은 세키구치 군이 최근에 확장한 예술적 영토이다.
물론 과거에 '청년과 강도'를 써서 이러한 야심을 보여주긴 했으나 이는 살짝 얕은 걸음에 가까웠다. 때문에 이 '여배우 선전업'은 또 이러한 형식에 필요한 준비 하나둘은 빠져 있더라도 어찌 됐든 대담히, 유쾌하게, 그리고 훌륭히 커다란 한 발을 내딛어냈다.
소위 소극이 예술 작품으로서 새로운 평가를 얻은 건 서양에서도 극히 최근의 일이다.
과거엔 '대언인'이라 해서 셰익스피어나 모리엘 등의 작품 중에서도 소극은 소외되던 시대가 있었다. 근대에 이르러 소극은 훌륭히 비극, 희극과 나란히 극문학의 한 분야를 차지해 크로멜링크의 '당당히 아내를 빼앗기는 남자' 따위는 대전후 유럽 연극계에 심지어 선구적 극단에서 말 그대로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켰을 정도이다.
우리나라에서도 곧 소극의 감상안이 높아져 우수한 소극 작가도 나타날 테지만 그런 시대에 선행해 우리 세키구치 지로 군이 순수한 소극에 손을 적셔 꽤나 성공을 이뤄낸 건 정말로 특필해야 할 사건이다.
작년 신극협회가 제국 극장 무대에 올린 걸 인연 삼아 아사쿠사 대극장에서도 이를 상연해 이 작품의 대중성을 크게 증명했으나 대중은 단지 깔깔 웃기만 할뿐 작가가 하려는 말을 귀에 담아주었을지는 잘 모르겠다. 하물며 우리의 가식희극과 구별되어야 할 점에 민감한 시선을 보내주었을까.
'여배우 선전업'――여기서 작가는 스스로 나아가 실사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했다. 과장과 상상에 모든 힘을 주었다. 나는 작가에게 요구하고 싶은 게 있다. 그건 이러한 작품 속에서 조금은 논리를 무시해줬으면 하는 점이다. 논리적이지 못한 생명감의 적출에 뜻을 두었으면 한다. 소극이 가야 할 길은 단순히 희곡적 풍자에만 존재하지는 않을 터이다. 되려 '필연'에 등을 돌린 판타지의 고조야말로 근대 소극의 정신일지 모른다.
'거지와 꿈' 또한 희극과 소극 사이로 가는 작품이다. 한 거지가 우연히 만난 맹인 거지에게 자신도 거지란 걸 알리지 않고 돈을 주는데, 타인을 거지 취급하는 쾌감을 맛볼 새도 없이 상대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해 꿈이 깨진다는 내용――이는 확실히 재미난 이야기다. 하지만 줄이는 게 꽤나 어려운 내용이다. 여느 때처럼 주도면밀한 무대기교가 이뤄지고 막힘 없이 이야기가 흘러간다. 또 일단은 심리의 굴절도 그려지고 있으나 더 좋아질 수 있을 거 같다. 내가 생각하는 이 작품에 나오는 거지는 거지 흉내를 내는 남자가 되어 있다. 그보다도 거지라면 이럴 때에 어떤 심정일까 하는 걸 보여주기 위해 작가의 말이 많아지고 행동을 강요하는 구석이 있다. 연극이란 게 다 그런 거 아니냐 하면 할 말은 없으나 내가 바라는 건 인물이 좀 더 스스로 하고 싶은 말을 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느낌을 줬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 평가는 지극히 개념적이며 특수한 작가의 특수한 작품을 평할 때엔 살짝 타당하지 못하나 이렇다할 결점이 없는 희곡에선 늘 생각해보게 되는 문제이다.
'승자 피승자'와 '그들의 평화'는 나란히 세키 군의 모럴리스트 기질이 발휘되었으나 그 점에서 살짝 불만이 있는 작품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주제가 생활에서 벗어나 있는 '문제극'의 위태로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두 작품은 세키구치 군의 다른 모든 작품과 마찬가지로 소위 '테마'를 다루는 방법에서 종래의 '문제극'이란 형식을 탈피해 그 '테마'를 관철하는 정의감도 결코 논의를 위한 논의로 구현된 건 아니다. 특히 작가가 주장하는 걸 멈추고 탐구하는 입장만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근엄한 태도에 호감을 느끼는 사람도 많으리라.
세키구치 군이 요즘 작곡가 중에서 특히 신진 작가 중에서 홀로 희곡의 정도를 걸으며 장래를 기대 받는 이유는 아마 이러한 종류의 희곡――처녀작인 동시에 걸작인 '어머니' 이후로――을 통해 본격적 작법의 날카로움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나는 작가가 스스로 알지 못할 특징의 한 면모가 '어머니'부터 '가을의 끝'까지 더욱이 또 '새벽을 기다리다'(이 작품에 없는 게 아쉽다)에 이르러 꽤나 선명하게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경향이 있는 '승자 피승자'나 '그들의 평화'에서 이 빛이 살짝 바란 걸 알고 작가를 위해 안타까워하고 있음을 고백하고 싶다.
그 특징의 일면이란 '심리적인 시적 정취'라 해야 좋으리라.
같은 극작가라도 다양한 특징이 있으며 그 특징에 따라 제각기 발휘하는 매력이 다르나 세키구치 군은 확실히 이 일면만으로도 우리나라의 현대 작가 중에서 특이한 지위를 굳히고 있다 해도 좋다. 세키구치 군의 작품이 쿠보타 만타로 씨의 작품에 일맥상통한 구석이 있는 것도 바로 이점이다.
그런가 하면 세키구치 군이 특히 이 '심리적 시적 정취'만을 제작 동기로 삼을 때 그에는 대개 차가운 분위기가 남게 된다. 바꿔 말하자면 작가의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한밤중'은 그런 의미에서 살짝 실패작임을 단언할 수 있다.
단지 나는 작가를 위해 이 실패를 슬퍼하지는 않으리라.왜냐하면 항상 쉬운 길로 가는 건 젊은 작가가 취해야 할 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세키구치 군 같은 생각 깊은 작가에게 이러한 종류의 작품은 하나의 모험이어야만 한다. 세키구치 군은 여기서 그 건축가적 재능을 숨겨 이제까지 시도하지 않았던 화가적 작접을 채용한 탓에 살짝 잘못된 색채 조화를 꾸민 셈이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평가는 일부 희곡 전문가에겐 받아 들여질지도 모를지언정 다른 많은 독자에겐 거의 가치 없는 공론일지도 모른다. 그 말뜻은 이 '한밤중'은 그 인물의 배합과 사건 교차에서 독자의 호기심을 끌기에 충분하며 심지어 많은 유머가 작가 특유의 비꼼과 뒤섞여 우리의 웃음을 불러 일으키기 때문이다.
단편 희극이라 이름 붙은 두 개의 '십오 분 극'은 하나 같이 작가가 가진 날카로운 혀를 노골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이 날카로운 혀는 실로 세키구치 군의 모든 작품의 곳곳에 '꼬리'를 드러내고 있다.
무엇 때문에 '꼬리'를 드러내고 있는가. 작가는 일부러 이런 '혀'를 남용하는 게 아니며 작가의 관심이 무언가를 향한 순간 스스로 그 혀의 단편을 보기 때문이다. 작가는 때로는 이런 날카로운 채찍을 휘둘러(이 채찍에는 물론 모럴의 종이 달려 있다) 작중 인물을 반성하게 한다. 그 채찍의 위력은 독자가 크게 기대하는 바이나 때로는 그마저도 '어머머'하고 말하고 싶어질 때가 있다. 세키구치 군의 날카로운 혀는 말하자면 신경적이며 아나톨 프랑스 같은 이지적인 느낌은 아니다.
'여자와 남자'에서도 '밤'에서도 세상을 향한 비꼼을 정면으로 다루면서도 작가 본인의 날카로운 혀가 살짝 용서 없이 비웃음을 끼얹기에 그 중복이 되려 작가가 기획한 효과를 약하게 하고 있다.
이렇게 말하면 세키구치 군이 굉장히 냉혹하고 입이 험한 사람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 날카로움은 항상 자신에게도 향해 있다. 신랄하면서도 주저하고 때로는 신비한 부끄러움이 작품의 겉면에 드러나는 게 그 때문이다.
세키구치 군의 작품에 이러한 '위대한 독설가'에 일종의 관대함이 싹틀 때, 그는 한층 더 매력적인 작가가 될 게 분명하다.
지금 이 '까마귀' 한 권을 손에 들고 생각하기에 우리 세키구치 지로의 극작가 생활은 이제부터――일 듯하다. 그리고 그건 결코 이제까지 해온 일이 미숙하며 볼 게 못 된다는 그런 뻔한 이유가 아니며, 대부분의 작가라면 이쯤에서 한숨을 돌리며 이쯤 왔으면……하고 느슨해질 때 한 호흡, 또 한 호흡 새로운 노력을 쌓고 있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이 한 권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오늘까지를 신극의 요람 시대였다 한다면 다음 시대는 이러한 작가의 손에서 시작되리라.
비극보다 희극으로. 이 새로운 경향 또한 세키구치 군의 작업과 연결지어 생각할 수 있다.
조금 거창한 비유이나 입센의 인생이 근대극의 진화 그 자체를 말해주는 것처럼 세키구치 군의 업적은 어쩌면 쇼와 이후 일본신극사의 발자취를 보여줄지 모른다――물론 여기서 방류 작가의 존재를 잊어선 안 된다. 방류란 게 꼭 아류이진 않다. 또 작은 흐름이지도 않다. 단지 방류는 한사코 방류이니 도리가 없다.
희곡집 '까마귀'를 평가할 자격은 내게 없겠지만 없단 말로 끝낼 수는 없다. 세키구치 군은 내 작업상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세키구치 군은 지금 극작의 펜을 멈추고 서서히 소설 대작에 임하고 있다. 그 방면의 경험은, 또 고생은 이윽고 새로 발표할 희곡 위에 모종의 형태로 나타날 게 분명하나, 희곡계에서 당분간 그 작품을 보지 못하는 건 쓸쓸함이 크다.
이럴 때 희곡집 '까마귀'가 출간하는 건 정말로 유익한 일이라 해야만 한다.
후네카와 미칸 씨의 디자인은 이 기념해 마땅할 서적을 가장 좋게 꾸며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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