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바다의 유혹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12. 12.
728x90
반응형
SMALL

 인기척 없는 저녁 모래 사장을 홀로 걷는 걸 좋아했습니다.

 그건 제 감상벽과 별 관계는 없는 듯합니다. 물과 하늘을 감싸는 신비한 빛에 가슴이 뛰는 것 이외에 이렇다할 추억에 잠기는 일도 없었으니까요. 하물며 달이 파도 위에 떠오르는 걸 기다려 로맨스의 한 절을 읊을 정도로 감미로운 서정미도 지니지 못한 저니까요.

 하지만 이는 제 공상벽과 밀접한 교차점이 있는 듯합니다. 왜냐면 저 각진 바위에 부딪히는 파도의 모습으로 늘 하나의 연상을 떠올리고 망망대해의 수평선 너머서 자칫하면 기괴한 환상을 떠올리는 일도 흔했으니까요.

 

 애수를 노래한 세계 최초의 시인 샤토 오 브리옹의 묘에서 '에메랄드 해변'이라 불리는 브루타뉴의 북쪽 해안가, 그곳에는 패랭이꽃이 흩날리는 라 기메로의 곳이었습니다.

 호텔이란 이름뿐인 숙소에 손님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이런 데엔 뭐 하러 왔나" 주인은 내 얼굴을 볼 때마다 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럼에도 보리싹이 노랗게 물들 쯤이 되자 소나무숲을 뒤로한 장엄한 별장――"브림 로즈"라 이름 붙은 그 별장의 앞뜰에서 나폴레옹의 피를 이어 받았단 남장한 미녀가 어린잎을 흔들며 많은 신사 숙녀 사이에 껴 골프하는 모습 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월요일 오후, 한 대의 마차가 제가 머물고 있는 호텔 앞에 머물렀습니다. 차에서 내린 손님은 척 보아도 파리에서 온 걸 알 수 있었습니다만 굳이 따지자면 밋밋한 차림을 한 스물두셋 먹은 여자였습니다.

 여자는 혼자였습니다.

 

 자, 이야기가 재밌어질 거 같습니다. 하지만 당신이 예상한 것처럼 평범한 소설적 사건이 일어나는 건 아닙니다.

 그녀는 세 번인가 식당으로 나왔습니다. 저는 삶은 고기 한 조각을 제 접시에 덜면서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의 거처를 물었습니다.

 사흘이 지나고 나흘이 지나 바람이 한 번 불고 비가 두 번 내렸습니다.

 

 닷새째 해가 질 쯤이었습니다. 저는 여느 때처럼 비가 그친 해변을 걷고 있었습니다. 파도 살짝 술렁였습니다. 여느 때 이상으로 빨리 지친 저는 어떤 바위에 걸터 앉았습니다.

 제 눈은 이미 환상을 쫓으며 모래와 물과 하늘 사이를 헤매였습니다. 그곳에선 얼굴을 모르는 남녀의 다양한 모습이 떠올랐고 차례로 보기 드문 춤을 추기 시작했습니다.

 저는 문득 뒤에서 들려오는 자그마한 발소리에 귀를 세웠습니다.

 그건 여자였습니다. 여자가 가만히 제게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아아, 이렇게 되면 그런 눈초리를 지을 수밖에 없지요!

 저는 일부러 놀란 척했습니다. 여자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달려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는 이 땅에 도착하자마자 시종 지루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토요일밤을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토요일밤이면 파리에서 그녀의 남편이 찾아 와 하룻밤을 머물고 가기 때문입니다.

 여담입니다만 파리에선 여름이 되면 아내와 아이를 피서지로 보내고 남편은 토요일 밤부터 일요일 동안만 그곳을 찾는 풍습이 있습니다. 토요일 오후, 파리의 각 정거장에는 그런 남편들을 옮기는 기차가 준비되지요. 이를 소위 '남편 열차'라 부른답니다.

 그녀는 그 '남편 열차'를 기다리는 아내 중 한 명이었습니다. 물론 그걸 기다리지 않을 여자라면 이런 한적한 땅에 혼자 올 리도 없습니다만.

 

 그때 그녀는 큰 소리로 웃으면서 달려가기 시작했습니다. 그런가 하면 조금 떨어진 모래언덕 뒤에서 수영복 차림이 되어 뛰쳐나왔습니다. 저는 보지 않고 그대로 바다로――저는 작게 웃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녀의 몸은 허리부터 아래로 물에 푹 잠겨 있었습니다. 두 손을 수평으로 좌우로 뻗고 이를 어깨에서 밀어내듯이 휘둘러 깊게깊게 나아갔습니다. 한 번 파도를 끼얹은 그 우유색 어깨가 옅은 저녁빛을 받아 비늘처럼 빛났습니다.彼

 얼마 지나지 않아 그녀의 목만이 파도 위에 떠올랐습니다.

 여기 와 이제까지는 한 번도 바다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던 저는 이때, 별 의미 없이 옷을 벋고 싶어졌습니다. 뭘 주저하는 거지! 저는 벌떡 일어나 또 다른 바위에 앉았습니다.

 

 그녀는 남에게 쉽사리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어떨 땐 남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신은 다른 생각을 하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었습니다.

 "책을 읽으신다면 뭐라도 빌려드릴까요?"

 "소설이요? 저는 소설을 싫어해서요."

 아아, 뮤즈여. 그녀의 모독을 용서하소서. 그녀는 그 대신 그녀의 남편을 무엇보다 사랑할 게 분명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방에 틀여 박혀 있진 않았습니다.

 

 목만 나온 그녀는 이쪽을 보는 듯했습니다. 나오는 손이 이따금 흔들렸지요. 머리도 이따금 물 속으로 가려졌습니다.

 그게 이번에는 격하게 나타나고 사라지곤 했습니다. 두 손만이 동시에 물 위로 떠올라 파도를 희미하게 흔들었습니다.

 "살려줘…………" 그런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웃었습니다.

 또 "살려줘……"

 저는 웃으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는 무의식적으로 웃옷을 벗었습니다.

 둘러보니 그녀의 얼굴은 어디서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늘을 올려다 보며 미친 듯이 소리치고 있습니다. 풀린 머릿결이 파도 위에서 거꾸로 솟고 있습니다.

 저는 황급히 물 안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 순간, 자신의 용맹한 모습을 상상하여 순간 입을 일그러트렸습니다.

 물이 무릎까지 올 쯤에 저는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그녀는 창백한 뺨에 감동의 색을 머금은 채로 제 손을 잡았습니다.

 이윽고 그녀의 축 늘어진 몸을 모래 위로 옮겼습니다.

 "연기 하신 거죠?" 저는 그렇게 말하며 쓴웃음을 지었습니다.

 

 그 다음 날, 저녁 시각에 저는 그녀의 남편을 소개 받았습니다. 그는 행복한 남자의 다양한 표정을 지으면서 제 손을 잡았습니다.

 

 그녀는 그 날 아침, 산책 나가려는 저를 불러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어제 일, 남편에겐 비밀로 해줘요. 혼날 테니까…… 남편이 사례한다 하지 않아도 나쁘게 생각하지 말고요. 대신 저는 평생 이 은혜를 잊지 않을게요."

 저는 조용히 그녀의 눈을 보았습니다.

 

 저는 두 사람의 권유를 받아 나란히 해안가로 나갔습니다. 그녀는 어제 사건을 떠올릴 수 있는 장소에 이르자 남편의 뒤에서 저를 향해 웃어 보였습니다.

 "이분 정말 친절하다니깐. 내가 어제 저녁밥에 늦었더니 길을 헤맨 거 아니냐며 찾으러 오신 거 있지?"

 "그래?" 남편은 그리 관심 없다는 양 대답했습니다.

 남편은 어째서인지 그녀가 제 이야기하는 걸 싫어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실제로 그녀는 제 이야기를 지나칠 정도로 했지요. 그녀는 그걸 깨달았는지 "그나저나 가게는 어때?"하고 물었습니다. 그리고 제게는 이따금 이전 번의 웃음을 보내는 걸 잊지 않았습니다.

 저는 마치 홀로 걷는 것처럼 조용히 저만의 환상을 즐기며 조용히 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녀의 어색한 웃음 소리만이 이따금 제 머리를 헤짚는 것 이외엔 해변가의 저녁색은 여느 때처럼 제 마음을 초현실 세계로 이끌었습니다.

 그런 물의 밑바닥에 가장 아름답고 가장 자유로운 여자를 본 것입니다. 그녀는 제게 도움을 청하는 대신 저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어느 틈엔가 저는 두 사람의 모습을 잃었습니다.

 바다가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울고 있었습니다.

 

 다음 날 아침, 그녀는 제 귓가에 입을 얹고서.

 "우리 오늘 밤에 파리로 돌아갈 거예요. 저를 이런 쓸쓸한 곳에 혼자 둘 수 없다나요. 그럼 잘 계세요."

 

 부부는 그날 저녁 마차에 올라탔습니다. 한여름의 저녁이 도심으로 돌아가는 젊은 부부의 등에 아이러니한 빛을 드리웠습니다.

 

728x90
반응형
LIST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