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인이 일본인을 향해 일본을 칭찬하는 풍조가 요즘 들어 눈에 띄고 있다. 이게 현재 일본에 필요한 일이지 싶긴 하나 그 안에는 조금 미묘한 호흡이 존재하여 그리 이상하지 않은 것과 묘하게 간질거리며 그만 해줬으면 하는 게 있다. 일본인이면서 진심으로 일본을 깔보는 사람에게 한 마디 경고해주는 건 물론 찬성이다. 그렇지 않더라도 일본인은, 특히 일본 지식층은 요즘 들어 일본인이란 사실에 자신을 잃고 있는 게 사실이며 그런 점에선 좀 더 낙관적이어도 좋을 이유를 강조하는 것도 좋을 터이다.
특히 지금의 일본은 중대한 국가적 난관에 봉착해 있으며 이를 이겨내기 위해 국민의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 참이다. 그러하니 서로 정신 차려라, 너는 일본인이다, 여기서 네 진짜 힘을 발휘햐아 한다고 필사적으로 격려하는 영역까지 온 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거로 된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목소리만 있는 게 아닌 듯하다.
일본재인식이니 일본주의 운동이니 일본문화 신연구란 기세의 밑바닥에는 각 현상을 명확히 표방한 것이 있는가 하면 서구접 사상이 근대 생활을 지배하는 걸 부당하게 여겨 적어도 일본을 중심으로 한 동아민족 위에 우리 전통적 문화의 군림을 바라는 야심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이 또한 결코 마냥 부당하다곤 할 수 없다. 그럼 무엇이 어떻게 우리를 민감하게 만드는가. 일본인이 일본인을 향해 일본을 칭찬한다는 본래 지극히 조심스러워 해야 할 일을 조금도 깨닫지 못하는 그 말투에 있다.
얼마 전 어떤 사람이 라디오서 일본인의 체격이 아름다움이란 표준상 서양인보다 우수하다 말하는 걸 우연찮게 들었다. 무슨 말인가 하니 일본인의 생활 양식이 자연 이치에 맞으며 곡물을 주식으로 삼고 무릎을 접어 앉는 게 근육 위치를 가장 원만하게 만들며 관절 기능을 충분하 발달시켜 서양인에게선 찾아볼 수 없는 안정적인 균형미를 만드는 데다 전쟁에 강한 원인임을 열심히 논하고 있었다.
이는 우리로선 정말 듣기 좋은 이야기다. 우리집 딸은 의자 생활이 미래에 불편해질지 모르니 요즘에는 다다미 위에 앉아 책을 읽는 걸 묵인해주고 있을 정도이다. 무릎이 조금 굽어 있는 게 보기에도 좋다면 이만큼 편한 이야기가 없다. 그 순간은 그런 안도감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그 사람의 새로운 발견――일지는 몰라도 새로운 학설은 약간 납득가지 않는 부분이 있으며 일반적인 정설이 이를 뒤엎지 않는 한 우리 딸의 무릎을 남들처럼 볼품 없게 만드는 데엔 조금 주저되기도 한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인체의 아름답단 기준이 나체를 바탕으로 말해야 하는 건가 하는 의문에 부딪혔다.
이런 의문도 확실히 시국적인 의문일지 모르나 그만큼 우리는 쉽게 실수하고 만다.
그건 뭐 제쳐둔다치더라도 우리 일본인의 육체적 열등감은 어디에서 오는가? 역시 그리스 조각이 이상적인 아름다움이란 개념이 어느 틈엔가 우리 일본인의 머리에 심어진 결과인 걸까?
그렇다면 그건 어떻게 해야만 하는 일이다. 그런 숙명적 열등감은 민족 자존심이 버티지 못할 일이다. 때문에 위에 말한 강연 같은 게 라디오 전파를 탄 것이겠지만 나는 그 점에서도 일본인의 현대적 고민을 보았다. 소위 양복이란 걸 폐지하지 않는 건 그 해결은 어렵지 않을까 싶다.
또 요즘 들어 어떤 사람이 일본화의 문화적 위치를 두고 꽤나 독단적이면서도 우리가 반성할만한 의견을 제시했었다. 요약하자면 일본화는 서양화보다 사회적 지위가 높고 그 예술적 가치도 서양화보다 우수하다 여겨지는 경향이 있으며 이 점에서 일본적인(혹은 동양적인) 아름다움이 문예처럼 경멸 받는 일이 없으며 설령 일부 사람 뿐이라도 존경을 받고 있다. 일본화는 서양화 같은 학생의 예술이 아닌 어른의 예술로 여겨져 시장 가치도 높고 사회적 세력도 크다. 일본 문화를 대표하여 세계적 가치를 주장할 수 있는 건 일본적 서양화가 아니며 세계적인 일본화임을 부정할 수 없고, 앞으로 일본이 발전시켜야 할 건 역시나 일본화란 걸 일반인에게 알리고 싶은 듯했다.
이 부분만 잘라서 떠드는 건 필자에게 민폐일지 모르나 요점은 이 부분에 있으니 이에 대한 내 생각을 말해보겠다. 이런 종류의 고찰은 찬성하기도 걸리고 반대하는 것도 어른스럽지 못하기 마련으로 서양화에 심취한 자가 아니더라도 일본화만 편들어 무슨 의미가 하는 걱정이 들게 된다.
예술가는 대신도 아니며 군사령관도 아니다. 그러니 딱히 '어른'이어야만 할 이유도 없고 '학생'도 훌륭한 국민의 한 계층이며 오히려 먼 장래를 생각하면 젊은 것만으로 무엇이든 기대할 수 있다. 또 일본화의 역사를 조금이라도 안다면 일본화의 오늘, 요컨대 일본 문화를 대표해 세계적 가치를 주장하는 건 당연하다 긍정할 수 있을 터이다. 그런 만큼 수백 년 뒤엔 서양화 또한 같은 그름을 탈 거란 예상 정돈 해줬으면 한다.
덧붙이자면 이 논자는 무엇을 증거 삼아 문예의 밭에선 일본적인 게 경멸 받고 있다 단언하는가. 나로선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말할 것도 없지만 서양 문학의 번역 수입 및 서양 작가의 모방 추종마저 일본 문학을 풍부하게 하는 목적임은 문학자라면 누구나 알 수 있을 터이다.
단 일본 고전에 대한 교양 부족을 꾸지라자면 무엇보다 나부터 얼굴을 붉혀야 하나 이는 결코 경멸 같은 거창한 이야기가 아니며 오히려 태만에 가까운 죄이고 구태여 둘러대자면 친숙하기에 되려 거리를 두게 되는 경향에 가깝다고 본다.
이번 달 '문예'에 실린 사이구사 히로토 씨의 '문학과 기술문화'란 논문은 시사하는 바가 굉장히 많았다. 일본 연구의 중요한 자료가 되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요즘 들어 서양 말로 '문화'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볼 기회가 생겨 일본인이 문화란 말을 쓰는 건 어딘가 몸에 맞지 않는 옷처럼만 느껴졌다. 때문에 이를 기회로 프랑스 사람이 독일 문화를 가리켜 특별히 kultur란 독일어를 그대로 쓰는 문화를 떠올려 국경을 접한 민족 사이에마저 문화 자체의 개념상으론 어딘가 서로 뒤섞이지 않고 반발하는 것임을 주목해야 하는 거 아닐까 싶었다.
따라서 뭉뜽그려 유럽적 교양이라 해도 그건 굉장히 막연한 의미의 서구적 문화의 영향을 가리키는 말이다. 엄밀히 말하면 그 근본에선 독일, 프랑스, 영국 같은 제각기의 문화적 특징을 몸에 익히는 게 되리라. 하지만 그런 건 결국 피와 살이 되지 못하는 옷에 지나지 않으며 설령 피와 살의 일부로 삼더라도 그 이상의 깊이와 힘을 통해 우리 생활의 주축을 움직이는 건 역시나 동양적이고 일본적 교양의 축적이다. 하지만 이 동양적, 일본적 교양이란 것의 정체는 이를 오늘날의 말로 '문화'라 불러선 어딘가 어긋나는 게 발생하며 사이구사 씨의 '길'이란 표현에 어느 정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이유이다. 하지만 나는 아직 내 고찰의 힘으론 판단이 서지 않는다. 혹은 '귀감'이란 말도 들어 맞지 않을까?
그건 그렇고 오가와 마사코 여사의 '작은 섬의 봄'이란 책은 나도 정말 재밌게 읽었다. 이건 가까운 시일에 감상을 제대로 정리할 생각이었는데 이 보기 드문 수기 속에서 역시나 '일본인'의 문제를 포착할 수 있었다. 요컨대 일본에는 지금도 나병 환자가 이렇게도 많은데 그에 대한 국가적 사회적 시설이 그리도 늦어지는가 하는 의문――아니 오히려 분개에 가까운 심정이며 이런 '특별한 사정'이 있어서인가 하는 안심이 나를 구해주었다. 심지어 그 사정이란 일본인이 꼭 '비문명'이란 비난을 받지 않아도 될 굉장히 비장한하다 할 수 있는 어떤 종류의 상냥함이 발로이며 나병 문제에 한해서 말하자면 적어도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일본인의 사회도덕을 운운할 자격은 세계의 어떠한 개화 민족도 지니지 못했단 보증이 되줄 게 이 책 안에 넘치고 있다.
때문에 이는 일본에 있는 모든 서양이 및 세계의 나병 연구가, 구원 사업가들도 부디 이 책을 읽어주길 바랐다. 하지만 오늘 이후로 그러한 상태가 하루라도 더 이어지는 건 물론 일본의 수치이며 일본인을 변호하는 어떠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음을 목소리 높여 동포 앞에서 지르는 유감스러움은 피할 수 없으리라.('지성' 쇼와 14년 2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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