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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아틀리에 감상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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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파리에 머물면서 두세 화가 작가와 알게 되어 아틀리에도 몇 번인가 찾은 적이 있다. 그 일하는 모습, 생활하는 모습은 항상 내 관심을 크게 끌곤 했다.

 무엇보다 참 즐겁게 일을 한다. 어머니가 딸에게 좋은 옷을 만들어주는 것도 같고 아이가 선물로 받은 목재 세공을 가지고 노는 거 같다 해도 좋다. 혹은 또 주정뱅이가 저녁 반주를 먹는 것 같기도 하며 선량한 남편이 아내의 독창을 듣는 거 같기도 하다.

 다음으로 방문자를 생대하면서 아무렇지 않고 캔버스를 마주하고 방문자 또한 지루해지는 법이 없다. 이는 사람에 따라 다른 듯하네 그런 점에선 우리가 원고지를 향해 글자를 채워가는 장사하고는 꽤나 거리가 느껴진다.

 ――이 그림은 어떤가?

 ――재미 있군.

 반면 이야기는 굉장히 잘 보인다. 우리들은 이럴 수가 없다.

 ――지금 짧은 글을 하나 쓰고 있어.

 ――어디 내려고?

 ――의뢰를 받아서 말야.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지. 내 방면도 아닌 미술 잡지에.

 ――흐음, 각본인가?

 ――아니, 아무거나 좋다길래 아무래도 좋은 걸 주구장창 적고 있지.

 ――수필인가? 수필에 줄거리 같은 게 있을 리도 없지만 뭘 쓰려는 건데?

 ――써봐야 알지.

   ……………………………………

 결국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다. 실제로 사람들은 우리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걸 편지 쓰는 정도로 밖에 여기지 않는다. 그 증거로 잠시 기다려달라 말하면 5분이면 충분하지 않냐는 표정을 짓는다.

 또 그림을 그릴 대상을 곧장 자기 옆에 두려고 한다. 그게 아름다운 모델이면 한 층 더 재밌다. 그 아름다운 모델이란 건 어째서 화가의 전유물인 걸까. 우리도 그런 걸 옆에 두고 그로부터 필요한 영감을 받아도 괜찮지 싶은데 어떠할까. 소설가 내지 희곡가가 어떤 여성에게 관심을 가져 그 아름다움을 '그리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서재에 가둬두고 매일 시간을 정해 그 육채와 정신의 '모습'을 관찰한다면 세간은 뭐라고 말할까. 혹여 그녀를 한 번 전라로 벗기기라도 한다면 그야말로 '문제'가 될 게 분명하다.

 어떤 화가를 오랜만에 방문했을 때의 일인데, 그 화가는 새로운 모델을 구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분이 굉장히 좋은 듯했다. 그는 그 모델을 앞에 두고 갖은 찬가를 쏟아냈다. 그건 절반은 내게 들려주는 것이며 절반은 모델에게 들려주는 말이었다. 혹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내 머리가 꽃밭이란 증거이며 실은 내 귀를 통해 그 모든 찬사를 그녀의 귀에 전달하는 걸지도 몰랐다.

 나는 거기서 이 한 쌍의 남녀가――화가인 남자와 모델 여자가――어떠한 관계여야 이렇게 나란히 행복하며 마음 편할 수 있을지를 의심했다.

 넷 째로 자신이 그린 그림을 하나하나 벽에 걸어두고 밤낮으로 담배를 피우며 그걸 바라보며 산다는 것이다.

 확실히 문호의 서재에도 자서가 다소곳이 책장 한 켠을 차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책등의 제목이 말해주는 범위는 지극히 좁고 막연하다.

 어떤 화가는 이렇게도 말했다――자신의 그림이 영원히 자신의 손에서 멀어지는 심정은 쓸쓸하다고. 그에는 동감할 수도 있으나 그 심정은 또 생각하기에 따라선 꽤나 로맨틱하여 좋지 않은가. 자신의 책이 저렴한 가격으로 밤가게에 놓이는 건 너무나도 산문적이다.

 여담으로 우리가 자작을 다시 읽는 건 거의 하나의 노력에 가깝다. 반면에 화가는 그런 노력 없이 자신이 과거에 해온 일을 돌아볼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걸어 온 길을 끝없이 포착하며 그 안에서 여러 자극과 위안, 희망을 얻어낸다.

 화가의 아틀리에에 들어갔을 때, 우리는 그 집의 주인을 화가 이외의 걸로 볼 수 없다. 요컨대 잡담 사이에도 한 번은 '그림 이야기'가 나온다. '그의 그림'이 그렇게 만든다. 하지만 문사의 서재는 때론 사업가의 응접실과 다를 바 없으며 온천의 집회소나 다름 없으며 정거장의 대기실과 다를 바 없다. '그의 책'은 항상 등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날 안지 얼마 안 된 화가를 따라 심야에 그 아틀리에를 찾은 경험이 있다. 어두컴컴한 다락방이었다. 우리는 그날, 이야기에 푹 빠져 저녁을 걸렀다. 그 화가는 아틀리에 한 구석에서 알콜 램프에 불을 붙이고 쌀밥을 짓기 시작했다. 요깃거리 하잖다. 나는 공복을 부여잡고 밥이 완성되는 걸 기다렸다. 이윽고 간장 냄새가 났다. 파리에서 맡으니 이 또한 꽤나 향수적이다.

 ――자 먹자고.

 그 후엔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 기억나지 않으나 그로부터 일 년이 지나 그 화가는 내게 재밌는 말을 했다.

 ――네가 처음으로 내 아틀리에를 찾았을 때 온갖 벽에 다 걸려 있는 내 그림을 보고 아첨 한 마디 않고 관심도 안 주는 건 참 감탄스럽더라고. 아니, 심지어는 아틀리에에 와놓고 벽에 그림이 걸려 있는지도 모르는 눈치였어.

 ――배가 고팠던 거겠지.

 ――아니, 밥 먹고도 그랬거든.

 ――배가 불러서 그렇겠지……

   ……………………………………

 이런 농담을 하면서 나는 내심 화가를 친구로 둘 자격이 없음을 부끄러워 했다.

 

 내가 가장 놀란 건 어떤 친구를 따라 몽파르나스의 어떤 그림 학교를 보러 갔을 때의 일이다. 수십 명의 남녀 연구생이 모델로 선 한 남자를――전라 남자를 그리고 있었다. 모델이란 직업도 참 쉽지 않지 싶었지만 일본이라면 아직 소녀로 통할 여자들이 얼굴도 붉히지 않은 채 '전라 남자'를 충실히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는 모습은 보는 내가 얼굴이 붉어지는 듯했다. 이럴 때에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게 가장 '그림 그리지 못할 인간'의 슬픔이겠지만 '그림 그리는 사람'은 정말로 육체란 것에 특별한 견해나 감수성이 존재하는 걸까. 그런 것 없이는 안 되는 걸까. 나는 조금 우울하면서도 또 우스꽝스러운 기분으로 학교를 뒤로 했다.

 또, 어떤 친구의 아틀리에에서 목격한 '사건' 하나도 내게 굉장히 신비하게 다가왔다.

 그제까지 조용히 포즈를 취하던 모델이 쉬는 시간이 되자 대뜸 방 구석의 세면대 아래서 커다란 양동이를 꺼내더니 그 위에 앉았다. 뭐 하나 싶었더니 이쪽이 눈을 돌릴 새도 없이 콧노래를 부르며 유유히 볼일을 보지 않던가. 이만큼 부끄러운 이야기도 없다. 나는 친구의 얼굴을 힐끔 보고는 창밖의 나무를 보며 미술의 정신을 생각했다.

 모델이 돌아간 후, 친구는 내게 '저런 여자'가 좋다고 말했다.

 나는 '저런 여자'를 좋아할 수 있는 미술가에게 경의를 표하고 싶다. 왜냐면 이를 통해 내 감정이 얼마나 낡았는지를 배웠기 때문이다. 실제로 이런 데에 아틀리에의 신선함이 있다. 나는 늘 그렇게 느낀다.(192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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