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방언의 전문 연구가가 아니나 남들 이상으로 그 매력에 끌리고 있다. 십인십색이란 말은 인간의 개성은 다양하단 걸 가리키는 게 분명하나 동일한 언어를 쓰는 동일 국토 안에서 지방별로 특유의 언어적 풍모란 게 있어 각기 그 지방에서 나고 자라 사는 사람들의 기풍이 전해지는 것 중에 이만큼 미묘하고 정직한 건 없다.
인간이란 아무튼 재미 있다. 아무리 단순한 성격이라도 그 안에는 여러 영향이 이중삼중으로 스며 들어 있고 얼핏 같은 형태로 보이는 기질 속에도 의외로 음예한 차이를 발견할 수 있고 또 이와 반대로 아무리 봐도 정반대로 보이는 인물의 윤곽을 통해 어딘가 공통되는 느낌이 다가오는 경우도 있다.
나는 온전히 그런 견해에서 키슈 사람이란 글을 쓴 적이 있는데 키슈만 아니라 갖은 지방 방언이 성별, 연령, 교양, 성격, 직업, 신분 등으로 조화되어 엄연하며 독특한 '어떤 것'을 소유해 이게 풍토 그 자체와 같은 인상에 따라 인간 고유의 속성에 한 말의, 심지어 굉장히 선명한 테두리를 더하는 건 무어라 말해도 놓칠 수 없는 일이다.
사례를 세상의 어떤 나라, 어떤 민족으로 삼는다면 더욱 알기 쉬우리라. 영어는 영국 사람의, 프랑스어는 프랑스 사람의, 러시아어는 러시아 사람의 하는 식으로 제각기 말의 색조가 곧 그 민족의 기질을 둘러 우리의 귀에 울려퍼진다. 엄밀히 말하면 영국인의 감정이란 영어를 통하지 않고선 표현하기 어렵고 프랑스 사람의 생활은 프랑스어가 아니면 그려내는 게 곤란하다.
그렇게 생각하면 어떤 지방의 방언을 듣는다는 건 그 지방의 산수, 요리, 풍습, 여성미에 접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각과 상상을 자극해 가끔 그 의미를 알지 못해도 어쩐지 이국적인 정취와 일종의 소박한 분위기를 즐길 수 있다.
나의 방언 예찬은 비교 문제로 들어가야 할 테지만 그건 할애하더라도 그렇다면 어떤 경우에 방언은 이러한 매력을 발휘하는가 하는 의문에 대해 대답해야만 하리라.
근래 도쿄에선, 특히 내가 사는 교외 주택지에선 도쿄에서 태어난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되지 않는다. 자연스레 아침저녁으로 주위 주부들이 큰 목소리로 아이를 혼내거나 물건을 사는 걸 듣게 되는데, 그건 도쿄 방언과 조금 다른 억양을 지니고 있다. 그런가 하면 그건 내가 아는 한 어디 방언도 아니다. 어쩌면 외국인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미건조한 일본어로, 심지어 본인은 그걸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다. 표준어로 말하고 있다 생각하는 걸 테지. 아아, 슬픈 표준어란. 나는 곧잘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 기세로 나아가면 우리 주위에서 아름다운 일본어를 듣는 건 불가능하리라 단언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또 회의 단상에서, 방송국 마이크 앞에서 정치가, 학자, 사관 등이 역시나 방언적 억양을 가지고 천하국가를, 학문기예를 논하여 듣는 자를 실소하게 하는 일이 있다. 아이들은 거의 배꼽을 부여잡고 웃는다. 그런가 하면 이는 재미난 사례인데 어떤 영화의 설명자가 도쿄에서 배워 고향 상설관에 취직했을 때, 익숙한 지역 방언으로 열변을 토하려던 차에 관객은 일제히 웃음을 터트리고 바보 자식이란 말마저 들었단 이야기를 접했다. 이 이야기도 나는 이해가 간다.
결론을 서두르면 방언의 매력은 그 지방에 연결되는 생활 전통 내지 개인의 사적 감정에 뒷받침 된 담화적 표현에 따라서만 그 본래의 면모를 발휘하고 공사에 걸칠 경우, 특히 '사회' 전체에 호소할 문제의 서술에선 그 매력이 말의 내용과 따로 놀아 기병 내지 가면처럼 해악감을 부른다. 이는 지방 방언만 그런 게 아니라 지방 사람들이 표준어 그 자체라 생각하는 도쿄 사투리가 그 방언성에 따라 같은 결과를 보이고 있다.
문예작품으로선 사카나카 마사오 군의 '말'이나 내 '규야마 호텔', 카네코 요분의 '목계' 외에도 방언의 매력이 다양한 방면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부세 마스지 군에 이르러선 방언 그 자체의 창작마저 꾀한 적이 있다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문체의 창조란 각 작가의 '개성적 방언' 활용이라 할 수 있으리라.
(193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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