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구좌의 '수천만이라 해도 나는 간다'는 줄곧 상연을 기대하고 있던 연극이다. 이번에 신극 협동 공연이란 계획 하에 이 히사이타 에이지로 군의 역작이 꼽힌 건 당연한 일이지 싶다.
이 작품은 이전 잡지에 발표된 것을 작가가 크게 손 대 그만큼 전체의 긴밀도를 높이며 전편 '북동의 바람'에서도 되도록 독립되도록 꾸며지게 됐다. 주인공 토요하라의 사상――보다 정확히는 그 온정주의적 신앙의 모순과 그 차질을 다루며 이를 계급 투쟁의 면으로 발달시키지 않으면서도 일종의 운명비극으로서 현대 사회의 도덕이 가진 문제에 비판의 눈초리를 보내도록 하는 노력과 배려가 느껴진다는 점에서 테마 중심이 살짝 불안정하단 우려는 있으나 이를 한 개의 전기극으로 꾸미면서 그 안에 역사적이며 사건적인 움직임을 자연스러운 극적 발전 요소로 삼는 보기 좋은 무대를 창조해낼 수 있었다.
적어도 현대 정치나 경제 구조와 그 배경에 호기심을 가진 사람이라면 상식적으로 주인공 토요하라가 어떤 인물인지를 알고 있을 터이다. 그러니 우리는 작가와 함께 이 불행한 행운아가 현대에 짊어지게 된 역할에 대해 약간의 온정과 어떤 종류의 반발을 느끼며 막이 내리는 걸 지켜봐야만 한다.
물론 작가는 인물의 극화화를 최소한으로 억누른 듯하며 분위기의 묘사에는 리얼한 관찰의 눈이 빛난다. 심리의 추궁 또한 이런 종류의 작품치고는 상당히 이뤄졌으나 연출자 무라야마 씨가 원하는 표현 스타일은 이런 작가의 기획하고 일치한다고 할 수 없었으며 되려 반대 방향으로 강조된 결과 작가의 풍자적인 그림을 드러내는 데엔 성공했으나 모처럼의 새로운 현실감――사실미는 살짝 그 늬앙스와 중량을 잃었기 때문에 대극장을 위한 연기 확대란 계산과 별개로 나로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배우 연기는 물론이고 이 연출 방침에 따라 일정한 한계가 주어졌다 봐야 하며, 이따금 굉장히 효과적인 대사가 귀엔 들어왔으나 결국 유창함이 빈곤하여 기계적이며 때로는 간지러운 연기가 눈에 띄었다. 단지 타키자와를 시작으로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맛의 재미 또 그 맛을 살리는 방식에 인물을 포착하는 단련이 더해져 현대 풍속화로서의 재미는 굉장히 깊었으며 가장 솜씨 좋은 장치와 함께 현대극으로서의 무대 완성도는 충분히 갖춰졌다.
어찌 됐든 이는 이 극의 구성 멤버가 그 재능과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역시나 당당한 신극의 관록을 보여주고 있다. 이 극단의 예술적 입장은 소위 예술지상주의가 아닌 점에서 이 시국에서 적극적인 존재가 될 수 있을 터이며 또 나 개인으로서도 이러한 극단의 존재와 건강한 성장을 기뻐하는 의미에서 진심으로 이 공연에 박수를 보내고 싶다.
근래 연극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먼저 시대가 정말로 요구하는 연극이 무엇인지를 자문자답하고 있다.
추하고 속된 건 물론이요 설령 예술적이라 해도 질척이거나 삐뚤어져 있거나 제 혼자 나가는 건 사양하고 싶다는 게 나를 비롯한 관객들의 솔직한 주문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어떤 게 좋은가. 예를 들면 이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몇 안 되는 견본이 이 '수천만……'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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