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부키극을 서양 극단에 소개하는 건 확실히 유익한 일이고 그 기획이 의외로 간단히(물론 곤란이 전혀 없진 않았겠지만) 이뤄진 건 무엇보다 기쁜 일이나 러시아 예술가가 가부키 연극에서 무언가를 배우고 무엇을 얻었는지 알 방법은 없는 걸까. 하나둘 신문 비평 같은 게 전해져 있긴 하나 별로 도움이 되진 않는다.
러시아인은 다른 유럽인에 비해 동양 예술의 진수를 체득할 수 있는 민족이라 생각하는데 대뜸 그 무대를 보고 무엇을 알 수 있으랴.
과거에 프랑스 무도 비평가가 일반 일본인의 괴이한 '검무'란 걸 견학하여 적잖이 감탄했단 이야기는 알고 있으나 그와 동시에 마담 사다야츠코의 예술을 볼품 없다 비난한 배우도 있다. 토오야마 미츠루 일좌가 채플린에게 인정 받는 시대에 사단지잇코가 러시아에서 열렬한 갈채를 얻었다 해도 드디어 지기를 얻었다 기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일반 서양인이 특별히 일본 예술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자아도취하는 건 착각으로 오멘이냐 아이의 악서를 공손히 벽에 걸어둔 자칭 예술 애호가는 근래 파리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이는 즉 근대주의 일면으로 새로운 걸 위아래로만 찾으며 옆에서는 찾지 않을 뿐이다.
나는 예로부터 일본 예술은 세계에 자랑하기에 충분하다 믿고 있으나 세계에선 아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듯하며 이제야 우키요에가 주목을 받는다 해도 그것도 골동품으로서의 가치를 제외하면 얼마나 예술품으로 다뤄질지 모를 일이다.
가부키극을 소개하는 건 좋으나 그만큼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괜히 힘만 써 손해만 볼 거 같다.
일본인에겐 특이한 버릇이 있어서 서양인이 기뻐할 만한 걸 일부러 보여준다――자신들이 보여주고 싶은 건 달리 있다는 걸 모르는 것이다. 일본에 서양인이 찾아온다. 곧장 후지산 이야기를 한다. 벚꽃 계절이 아니라 아쉽다는 아첨을 떤다. 게이샤를 보자면서 '오차노이에'에 안내한다. 닛코와 교토, 나라, 우기와 하나츠츠미(?)와……그 외엔 방석과 젓가락, 게다와 인력거이다.
이런 버릇을 고치지 않고선 일본은 그 정체를 일본인에게 알릴 수 없게 될지 모른다.
일본인이 서양에 간다. 반드시 선물을 지참한다. 왈, 우키요에, 저렴한 부채, 수출용 인형, 왈 무엇, 왈 무엇…… 일본인은 귀여운 선물을 주는 용감한 민족이 되고 싶단 정의는 온갖 곳에 통용되고 있다. 그런 주제에 불쾌할 때에는 반드시 토라진 표정을 짓는다.
때문에 나는 서양인이 일본의 어떤 점에 흥미를 지녔는지를 알고서 그런 흥미를 경멸해 주는 배짱이 필요하다 본다.
어떤 나라의 황태자가 인력거꾼의 핫피를 입고서 곤봉을 쥔 사진을 신문에 냈단 것까진 좋으나 그게 참으로 평민적인 행위인 것처럼 감탄하는 건 호구가 따로 없다. 그런 짓을 하면 조용히 옆을 보면 된다.
일본인이 유색 국민, 특히 동종동문의 인접 국민에게는 지극히 관대하건만 백색인종 특히 영국인과 미국인의 깔보는 듯한 행색이 한없이 고개를 숙이는 태도를 보이는 건 정말 웃기지도 않은 일이다.
논리가 살짝 탈선된 듯하나 요컨대 가부키라면 가부키극을 서양에 소개할 때에도 선물식 태도로 임하는 건 금물이며 그런 결과를 부를 경우를 생각하며 행동할 필요가 있다.
나는 의욕 넘치는 사단지의 발자취를 보고 싶다.(192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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