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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궤도(침묵극)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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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여자.

남자.

취객.

역무원.

 

장소

대도심 교외를 지나는 고속 전철의 작은 정류장.

 

시대

현대.

 

 

무대는 플랫폼이다.

정면에 의자.

막차 시각.

초여름.

자칭 신사풍 취객 홀로 의자 위에 누워 있다.

전화벨 소리가 울린다.

 

가정부인 듯 보이나 그런 것치고는 살짝 몽상가 같다.

그러면서도 어딘가――아마 입가이리라――차가운 매력 같은 걸 가진 여자.

스물네다섯 쯤 되었을까. 빠른 걸음으로 들어온다.

 

취객과 살짝 거리를 두고 앉는다.

가방에서 커다란 각봉투를 꺼낸다.

편지로 그 봉투를 뜯더니 내용물을 읽는다.

무표정.

 

그러는 사이 한 젊은 양복――학생 분위기가 아직 빠지지 않은 중절모 착용법――이 유유히 들어온다.

물론 전차를 기다리나 부산스러운 심정으로 어딘가 여자 쪽을 훔쳐보며 플랫폼을 오가고 있다.

 

여자는 별로 개의치 않고 펴지를 다 읽는다.

그러곤 거의 후회한 듯이 그걸 찢었으나 버릴 곳을 찾지 못해 가방 안에 넣는다.

 

남자는 그 태도에 마음이 갔는지 그만 멈춰 선다.

 

여자는 그때 남자 얼굴을 올려다 본다.

남자는 황급히 그 시선을 피한다. 그와 동시에 걷기 시작한다.

여자는 그걸 눈으로 쫓는다.

남자가 '오른쪽으로 돈다'. 그와 함께 빠르게 스치듯이 여자를 본다.

하지만 의외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는다.

남자는 굉장히 수줍다는 양 멈칫한다.

그리곤 떠올랐다는 양 바지 소매를 턴다.

한 번, 두 번, 세 번.

의미심장하게 손가락을 접어 본다.

여자는 살짝 비꼼 섞어 웃는다. 실소이다.

하지만 마음은 얼굴만큼 비웃고 있지 않다.

이게 남자를 생각하게 만든다.

그런 생각은 꽤나 평정심이 결여되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의 연장이라도 된다는 듯이 개찰구 쪽으로 모습을 감춘다.

 

여자는 플랫폼 끝자락으로 걸어간다.

전차가 올 거 같을 때엔 누구나 하는 동작이다.

 

갑자기 앞서 남자가 나타난다.

쾌활하지만 상당히 신중한 청년이 어떤 결심을 느꼈을 때와 같은 흥분을 보여주고 있다.

 

그 발소리에 여자는 돌아본다.

남자는 그 찰나 이상한 웃음을 짓는다.

단 계획하고 있던 웃음이다.

한껏 웃는 웃음이다.

하지만 결국 후회, 탄원, 자조, 변명 같은 감정 등이 극히 복잡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그게 서서히 우울함으로 바뀌어 간다.

 

여자가 이번엔 홱 눈을 돌린다.

그리고 생각에 잠긴다.

단 그 생각은 미울 정도로 평상심을 갖추고 있다.

오히려 냉정하다.

이때 그 여자의 몽상가 다운 표정이 가장 선명하게 떠오른다.

 

남자는 절망적으로 자리에 앉는다.

여자는 문득 무언가를 떠올린 것처럼 서두른다.

하지만 그 서두르는 모습은 어딘가 과장스럽다.

오히려 서두르고 싶지 않다.

단지 서두르는 것처럼 보여주고 싶다.

그런 기색으로 개찰구 쪽으로 걸어간다.

물론 남자는 보지 않는다.

 

남자가 그 사이에 작게 한숨을 내쉰다.

 

여자의 모습이 사라지려 한다.

고민스러운 남자의 눈동자가 하늘을 보려던 순간이다.

여자가 남자의 존재를 마지막으로 확실히 바라본다.

그런 식으로 뒤를 돌아본다.

두 사람은 나란히 웃는다.

'아까는 재밌게 앉던데요'――그런 식으로 쉽사리, 단지 진심으로 서로 웃어 보인다.

하지만 이 경우 자연스레 여자 쪽은 어느 정도 상대를 위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는데, 남자에겐 그게 아양 떠는 것처럼 보여 아쉬움과 비슷한 감정이 드러난다.

그 안에선 또 정열적인 고백처럼 보이는 게 느껴진다.

여자는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라는 양, 그보다도 여기에 있는 게 좋지 않다는 양 도망친다.

 

전화 벨소리. 텀.

 

남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반대 방향으로 걷는다.

하지만 금세 원래 자리로 돌아간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나 개찰구를 향해 큰 걸음으로 걷는다.

서두른다. 하지만 서두르는 걸로 보이고 싶지 않은 그런 걸음이다.

 

역무원이 나타난다.

'곧 도착합니다'하는 신호를 보낸다.

남자는 재빠르게 역무원에게 표를 건넨다.

역무원은 그 이유를 알지 못하고 넘겨 받은 표를 바라본다.

그 틈에 남자는 모습을 감춘다.

남자를 놓친 역무원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는다.

하지만 '뭐야 그런 거냐'하는 얼굴로 코를 긁적인다.

플랫폼을 기계적으로 걸으며 입 안에서 무어라 혼잣말을 한다.

발뒤축으로 빙글 돈다. 이번에는 개찰구 쪽으로 무도를 하는 듯한 걸음으로 사라진다.

 

취객이 눈을 뜬다. 황급히 자세를 고친다――많은 사람에게 추태를 보인단 걸 자각한 것처럼.

 

――종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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