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곡을 쓰기 시작하여 겨우 2, 3년. 소설이란 건 단 한 번도 써본 적 없는 내게 갑자기 신문 연재 소설을 써달라기에 꽤 당황스러웠다.
사실 희곡을 써 잡지에 발표한다는 것부터가 나로선 어쩐지 부자연스럽게 느껴지던 시기였고 머릿속은 '새로운 신극 운동' 일로 가득하여 매달 잡지에 실리는 단편 소설도 제대로 읽지 않았다. 하물며 신문의 연재물 따위는 딱히 경멸하진 않을지언정 별달리 주워 읽은 적도 없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잘못 온 게 아닐까 싶은 주문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이는 아마 아시히신분의 변덕이겠지 싶었다. 무언가 눈길 주는 곳을 바꾸자는 기획임에 분명하다. 선배 중 누군가가 추천한 걸지도 모르겠다. 이쪽으로선 어떤 준비도 되어 있지 않지만 고료를 받아 소설을 쓰는 사치스러운 행위가 가능하면 한 번 해보자는 생각이 한때는 꿈틀거렸으나 그렇다 해도 이야기가 너무 갑작스러웠다. 두 달 가지곤 준비 될 리도 없다. 하다못해 보름은 느긋이 생각하고 싶었다. 때문에 그런 식으로 거절하니 그게 받아 들여졌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좋겠다며 일 년 쯤 지나 잊고 있었을 적 다시 이야기가 올라왔다. 딱히 준비해낸 건 아니지만 어찌 됐든 받아 들였고 금세 큰일을 저질렀구나 하고 가슴이 뛰는 걸 느꼈다.
신문 소설의 견본을 좀 읽어볼까 싶었는데 관뒀다. 제멋대로 신문소설 십계명을 날조하여 그게 안 되면 멋대로 하라지 하고 마음을 굳게 먹고는 구상에 돌입했다. 나는 희곡에서도 구성을 굉장히 엉망진창으로 하기에 되는 대로 지르는 건 특기라 할 수 있었다. 줄거리란 게 도무지 세워지지 않는다.
주요 인물을 넷으로만 굳히고 나머지는 필요에 따라 끌어 오기로 했다. 모델은 원칙적으로 나를 쓰지 않는다. 그려진 인간이 자못 불쾌해질 거라 생각하면 아무리 신성한 동기라도 이를 관철할 용기가 없다. 내 일이 사람 한둘의 감정을 희생으로 해도 상관 없을만한 가치가 있을 거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어찌 되었든 드디어 기일도 다가오고 하여 원고 용지와 마주하니 곤란한 일이 생겼다. 도무지 자신이 안 생기는 것이다. '소설을 위해 소설을 쓴다'는 슬픔이라 해야 할까. 이상하게 어깨 힘이 들어가고 낯간지러워 그것만으로 소설이라 할 수 없는 요소가 금세 눈에 뜰 듯하여 도무지 손을 쓸 수 없게 됐다.
이 '부끄러움'은 지금도 꽤 많이 남아 있는데 그때는 쓰는 펜이 벌벌 떨릴 정도였다.
그것만으로도 '처녀작'이란 이름에 어울리겠지 싶어 나는 사람에게 허세를 부렸으나 결국 나는 남의 밭을 헤짚어 놓는 걸로 예민해졌을 뿐이라고 스스로 해석하고 있다.
신문에 연재되기 시작하니 친구 중 한 명은 수필 같다는 소리를 했다. 또 한 명은 수치심을 버리라 충고해줬다. 귀에 들어오는 평가는 대개 대단하지 않아서 신문사 사람은 되도록 이야기를 돌리는 듯했다. 그런 차에 아마 소사쿠겟칸이란 잡지였지 싶은데 어떤 신진 여류 작가가 '유리하타에는 재미 없는 걸로 유명하다'는 뜻의 내용을 쓴 걸 접해서 굉장히 곤혹스러웠다.
나중에 아사히 신분샤에서 출판하게 되었는데 평소에 책을 두고 이야기하는 친구에게도 이것만은 일부러 보내지 않았다.
어쩐지 별 볼 일 없는 추억만 이야기하는 듯한데 요구된 논제에서 지금 무언가를 쓰자면 이런 것밖에 쓸 게 없다. 여기서 교훈을 얻을 사람은 무엇이든 교훈 삼으면 된다. 나는 그러니 오늘까지 '통속 소설'이 아니면 쓰지 않겠다는 내 원칙을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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