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의 요지란 즉슨 이 고난과 불안으로 가득 찬 현실 생활을 연극 세계서 즉, 무대 위에서 어떻게 다뤄야 좋은가, 로군요. 우리가 일상서 진지하게 임하는 문제를 그대로 연극으로 짜 보여주는 방식에는 자연스레 한계가 있다 봅니다.
저는 고리키의 '밑바닥에서'를 연출할 때에도 '밑바닥' 생활의 비참함, 어두움을 괴로워한 사람들의 분노나 체념이란 형태로 그대로 표면에 드러내기 보단 외려 누가 생각해도 안타까운 거칠고 어두운 생활 속에서 마지막까지 희망을 잃지 않는 인간의, 말하자면 밑바닥 없는 낙천성과 그걸 부드럽게 긍정하는 고리키의 선의와 동포에 따습게 데워진 작가의 단순한 웃음을 이 희곡 연출의 바탕으로 삼았습니다.
확실히 이 작품에는 세 개의 죽음이 다뤄져 있지요. 죽음이란 말에서 곧장 암흑을 연상하는 건 우리의 상식입니다. 하지만 그 죽음을 말할 때에도 여런 표정이 가능할 터입니다.
병이든 빈곤함이든 그 외의 모든 인생의 불행 그 자체와 그 불행을 말하는 법 사이엔 예술이 들어갈 여지가 있습니다. 말하는 자의 색채를 크게 분류하면 어떻게 될까요? 양극단은 엄숙과 경박일 테죠. 만약 진실이 다뤄진다면 결코 경박해지지는 않을 겁니다. 또 만약 말하는 쪽이 진실로 가득하다면 그게 아무리 밝은 인상을 주어도 결코 엄숙함이 손상되는 법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밑바닥에서'의 무대가 암울하단 건 원작 정신에서 벗어날 뿐 아니라 연극 또한 유치한 현실 모사의 영역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희곡을 별 생각 없이 질척질척한 감상으로 끝내는 법 없이 개운한 시적 감동까지 높이고 싶단 게 제 염원입니다.
또 하나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은 고리키의 '밑바닥에서'에 등장하는 인물은 사실 다양한 타입이며 다양한 운명에 희롱 당하고 있으나 하나 같이 '좀 더 제대로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작지만 격한 바람을 품고 있단 점입니다. 그걸 스스로 의식하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마지막 막이 내릴 때의 합창이 상장하듯이 그들은 아무리 비참한 환경에 빠져도 사는 '기쁨'을 잃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요컨대 노래를 잊지 않은 사람들이죠.
고리키는 딱 잘라 말하지는 않습니다만 그들의 꿈은 언젠가 그들 본인의 '살려고 하는 힘'을 통해 그들의 것이 되리라 믿고 있을 테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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