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신극운동 역사 중에 요 2, 3년 만큼 연극의 본질 문제가 진지하게 논의되고 그것이 차근차근 실천된 시기는 또 없지 싶다. 충분한 성과를 얻기 위해서는 또 여러 조건을 필요로 하나 적어도 새로운 제네레이션의 희곡 창작상에 가져온 현저한 질적 향상은 정말로 획기적인 현상이었다고 봐야만 하리라. 그러하니 일반 관객서 희곡계 부진의 목소리를 듣는 건 참으로 신기한 일이며 굉장히 유감스러운 일이기도 하다. 아마 이러한 현상이 특수한 전문 잡지 내지는 연구 극단의 얌전한 업무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단 사정에 원인이 있지 않나 싶다.
잘 알려진 것처럼 우리의 신극은 오늘까지 모든 걸 꾀하고 아무것도 남기지 않았다. 희곡 작가는 서양극의 형식적 모방에 만족하거나 그도 아니라면 가부키신파의 전통적 전통에 마지막 운명을 맡겼다. 따라서 순수한 의미의 창작 희곡 생산은 근대 문학으로서의 독자성을 발휘하는 영역에 이르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 소설 문학이 몸에 두른 생활색, 표현으로서의 진실(리얼리티)는 무대에선 결실을 맺지 못한 것이다.
그런 만큼 최근 대두된 한 무리의 신작가는 기대치 않았음에도 전시대의 가장 치명적 결함을 희곡 문학의 입장에서 의식적으로 메우려 노력한다는 점에선 확실히 주목하기 마땅하다.
이게 꼭 이러한 새로운 작가의 재능을 예외 없이 희소하다 칭찬할 이유는 되지 않으나 제각기 전문가적인 수완과 천성적 특색을 발휘해 마땅히 일인분의 작가의 품격을 보여주며 또 일본인에서 벗어난 치밀한 역작을 들고 등장한 건 정말로 전대미문이다. 요컨대 그런 시대가 온 것이다. 무대의 걸음은 느리건만 역시 문학을 향한 열정은 무섭지 싶다. 앞으로 우리 희곡계도 슬슬 세계적 수준에 이르리란 가능성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이제까지 잡지에 발표한 내 작품을 하나씩 엮어 책으로 만드는 일을 줄곧 습관처럼 계속하고 있으나 그런 시대에 젊은 작가의 보다 우수한 작품이 세간의 주목을 받지 못한 채 오랫동안 묻혀 있단 사실에 불합리함을 통감하고 있으며 더욱이 거리낌 없이 말하자면 그러한 기운 도래를 누구보다도 바라고 혹은 누구보다도 촉진하게 노력했다는 자부심에 한편으론 우리 연극 문화를 위해 한편으론 신인의 장래를 위해 내가 가장 촉망하고 추천하는 사람과 작품을 총서의 형태로 세상에 물어보려는 계획을 꾸몄다.
내 작품을 이 총서에 넣을지는 조금 고려하긴 했으나 새삼스레 변명 같은 소리를 할 필요는 없으리라. 동지에 나란히 이름을 두는 영광을 진심으로 느끼고 있다.
이 총서는 일종의 염가판으로 시로미즈샤의 희생적 도움 없이는 실현될 수 없었다. 첫 번째 계획으로는 잡지 '극작' 동인 중에서 골랐으나 이는 단순히 빠르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었을 뿐으로 되도록 넓게 갖은 방면으로 손을 뻗었다. 따라서 평생 나 개인하곤 거리가 멀었던 자들의 호의 있는 참가를 기대하며 되도록 편중되는 걸 피해 객관적 가치에서 시대를 대표하기 충분한 작품집으로 삼고 싶단 염원을 가지고 있다. 또 여력이 있다면 연구, 소개, 논평 또한 현재 정세에 적합한 내용을 음미해 이 총서에 더할지도 모르겠다.
일본 신극 구락부 결성 이후로 신극단은 당파 분립의 약점을 서서히 이해하기 시작해 적어도 재능과 노력을 위해 적과 아군에 무관하게 박수를 보내는 미풍을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당연한 일이지만 참 늦었다. 신선 극작 총서 간행은 되려 이 미풍이 낳은 하나의 삽화이지 않으랴.(1935년 11월)
'고전 번역 > 키시다 쿠니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남방화필기행' 서장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0.30 |
---|---|
'홍당무' 역자의 말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0.29 |
신고쿠게키의 '옥상정원'을 보고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0.27 |
'패전의 윤리' 편집자의 말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0.26 |
나카무라 노부로—문학좌의 앨범 - 키시다 쿠니오 (0) | 2022.10.25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