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뿐 아니라 예술 작품의 통속성과 대중성이 문제시 되고 있다.
통속성과 대중성은 좀 더 확실히 구분해야 하나 이를 간단히 말하자면 통속성이란 예술적 교양이 없는 일반 속중에게 저렴한 관심과 감격을 주는 요소를 담은 것이며 대중성이란 이러한 속중이 아닌 계급으로서의 일반 사회층의 의욕 및 호의를 목표로 하여 인간으로서 소박하고 건전한 감성에 이를 수 있는 단순 양명한 예술적 요소를 주로 삼는다고 해두겠다.
하지만 대중적으로 만들려다 통속성에 빠지는 것처럼, 통속적이기에 이따금 빠지는 비참함이란 그게 대중적이지 못하단 점이며 동시에 진정한 보편성을 잃는다는 데 있다.
고답적인 게 보편성이 빈곤한 건 스스로가 원하는 바에 가까우나 가장 넓은 층에 다가가려는 의도가 명확히 드러나 있음에도 불구하고 결과가 이에 반한단 사실은 연극 당사자가 주의해야 할 일이다.
상업 극장은 제쳐두고 나는 현재의 신극이 관객층의 개척을 마음 먹고 직업적으로 될 생각은 하지 않고 의식적으로 통속성을 추구하는 경향에 우울해하고 있다. 물론 오로지 통속성만을 추구하면 이는 신극이라 할 수 없지만 예술가란 인식을 가지고 있다면 어느 정도는 통속성에서 벗어나야한다고 본다.
오늘까지의 신극은 각본 선택이나 부자연스러운 연기 등으로 관객의 범위를 좁혀 왔다. 하지만 그 범위를 넓히려면 먼저 무대에 보편성을 추구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대중성도 물론 좋으나 일본 대중은 현재 "예술"을 추구하지 않으며 또 앞으로 추구할 기운도 보이지 않으니 도리가 없다.
예술적으로 아무리 고급스러워도 보편성만 갖춘다면 현재의 신극은 지지자를 얻으리라. 나는 그런 자신감을 가지고 있다.
그럼 보편성이란 무엇인가. 반드시 '대중'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아름다움을 느낄 능력을 가진 평범한 일반인이며 연극에선 '새로운 볼거리'보다도 '진정으로 살아 잇는 무대'를 추구하고 문학의 선구적 시도나 작가의 특별한 심경 따위엔 관심을 가지지 않을지언정 이야기의 아름다움엔 가슴을 뛰며 배우의 경력은 몰라도 그 재능만은 구분이 가는 구경꾼을 무조건적으로 끌어 들이는 요소이다.
그렇다면 각본의 보편성은 작가의 교양에서 찾아야 하며 연극 또는 배우가 가진 매력의 보편성은 배우의 교양에서 찾아야만 한다.
단적으로 오늘까지의 신극 무대는 너무나도 '신극적'이었으며 '신극애호자'를 위한 것이었고 신극 전문가의 '공들임'이 너무 많아서 평범한 인간은 그 연극이 왜 재밌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츠키지 소극장이 특히 현저해서 그 여파를 받아 '대중적'을 표방하는 신극단――'신도쿄'이든 미술좌이든 테아틀 코미디든 특히 연극 집단의 이름으로 시도된 한두 번의 흥행은 그 병폐를 노골적으로 보여주었다. 얼마전 신주쿠 마츠타케좌에 '당근'이란 멜로 드라마(?)를 보러 갔는데 연출자 무라야마 토모요시 군의 재능은 보았아도 이게 소위 '신극적 수법'을 고스란히 드러낸 작품이라 당황해하는 관객이 많았다. 무라야마 군의 의도는 달리 있었을지 모르나 결국 계몽운동치고는 부족하며 대중극으로선 너무나 전문적이란 게 내 생각이었다. 신선하면서 보편성을 갖추는 게 꽤나 어려운 일이긴 하나 신극의 앞날을 위해 우리는 공적을 서둘러야 한다고 본다.(나중에 듣기로는 무라야마 씨는 관여하지 않았다 한다.)
작가 중 '전문가'는 뒤에 숨고 배우의 '신극 취미'를 봉인하고 나쁜 사실에 빠지지 않은 채 사회 각층에 통할 인물의 전형을 만들어야만 한다. 사업가를 연기한다면 재밌는 사업가가, 대학교수를 연기한다면 재밌는 대학교수가 될 수 있다는 건 단순히 겉모습만의 문제가 아니며 사업가가 사업가인 요소를, 대학 교수가 대학 교수인 요소를 관찰과 상상을 통해 포착하는 수행――이는 무엇보다 배우로서의 교양 문제라 본다.
오늘날 일본의 배우(신극을 포함해) 중에 소위 '상층 지식 계층' 인물을 연기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다. 또 동시에 소위 '야마노테 브루주아'를 관찰하는 이도 전무하다. 군인도 안 되고 외교관도 안 되고 국회의원도 안 되고 하이컬러한 사교 부인도 진중한 가정 주부도 안 된다. 아아, 이래서야 연극이 되겠는가. 나이 탓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도 생활이 너무나 비좁고 교양이 빈곤하여 관찰력이 부족하다. 요컨대 연기에 '보편성'이 없는 원인이다. 관객이 죄 학생뿐인 현상이 여기서 시작된다.
일본 문학도 역시나 이 점에서 여러 타개책이 강구되고 있는 듯하니 좋다. 작가는 무엇이 자신의 작품을 비좁게 하는지를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좁아서' '높다'는 망상을 깨야만 한다. 좁다는 건 어떤 의미에서 순수성을 말해주는 건 분명하나 순수함이란 게 꼭 가치로 직결되지는 않는 법이다.
한편으로 전문가끼리만 통용되는 작품이 있어도 나쁠 건 없다. 하지만 그것만이 우수한 예술의 전부라곤 할 수 없다.
내가 모든 순수 연극의 문제를 꼽은 건 전문가의 연구 대책이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에 무대의 보편성을 주장하는 건 신극의 발전과 자활을 위함이다. 심지어 연극의 본질은 연극의 순화 작용을 거쳐 그 면목을 발휘하고 그 본질의 잘못된 섭치와 이용을 통해 연극의 보편성을 이끌어야 한다는 게 내 의견이다.
연극을 시작으로 한 모든 예술은 통속화의 방향을 취할 때 그 본질서 등을 돌리기 시작한단 건 말할 것도 없다. 연극을 통속화하기 위해 선택된 방법 중 대다수는 실제로 '연극적이지 못한 것'을 범용과 중대시하고 있지 않은가?(193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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