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쿠타가와 씨의 작품을 절반밖에 읽지 않았다. 또 직접 말을 나눈 건 고작해야 서너 번에 지나지 않는다.
생전에 교우가 굉장히 넓었던 아쿠타가와 씨를 생각해 보면 한 번도 그 집을 찾지 않은 나 같은 건 길 가는 사람과 다를 바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놀러 와라――한 번 찾아뵙죠" 같은 대화는 나눈 적이 있었다.
아쿠타가와 씨는 내가 하는 일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져 준 사람 중 하나이다. 또 가끔 해주신 감상의 단편이 사람과 사람을 건너 내 귀에 들어왔다. 나는――구태여 말하자면――예술상의 지기로서 아쿠타가와 씨에게 감사하고 있다. 물론 이는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그의 폭넓은 감상과 풍부한 취미, 또 진정으로 '문학을 사랑하는' 천품이 갖은 경양, 갖은 색조 때로는 갖은 변덕에도 충분한 이해와 동정을 아끼지 않으셨던 거 같다.
아쿠타가와 씨는 어딘가 세기말 시인들과 닮아 있었다. 이는 어딘가 닮았다는 뜻으로 문체나 사상, 성품 같은 뚜렷한 비교는 아니다. 내가 그를 프랑스 상징파의 시인들과 닮았다 말하는 이유는 구태여 말하자면 '예술가로서의 고민'에 있다고 본다. 이 '고민'은 동시에 '예술가로서의 마음가짐'이자 '긍지'이며 또 늘 '심취'하는 일이다. 그들은 끝없이 그들에게 통하는 '미적 환상'을 두고 고민하였고 또 심취해 있었다.
나는 그의 눈에 담긴 '어두운 죽음의 매력' 또한 그중 하나로 세고 싶다――나는 그와 얼마 전 보들레르의 임종을 두고 이야기한 기억이 있다.
어떤 이는 그의 작풍을 아나톨 프랑스에 비교한 듯하나 이는 다르다. 물론 아무리 닮았다 해도 다른 부분이 많지만 이 비교는 살짝 엇나가 있다.
아쿠타가와 씨는 프랑스 작가를 사랑한 듯하나 누구에게도 그 본질적인 영향을 받지 않은 듯하다. 얼핏 모방으로도 여겨지는 '르나르풍 단편' 또한 아마 르나르의 심경에서는 먼 심경으로 짜진 것으로 여겨진다. 이는 아쿠타가와 씨의 수치가 아니다. 프랑스 문학의 손실이다.
아나톨 프랑스의 미소, 버나드 쇼의 미소,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미소――이 세 개의 미소가 같은 아이러니의 꽃잎을 두르고 있단 뉘앙스야말로 세 민족, 세 문학을 나누는 영원한 수수께끼이리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아쿠타가와 씨 본인을 죽인 건 이 미소――이 너무나도 일본적인 미소이지 않았을까.(192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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