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쿠미 세이지 군의 설에 따르면 비극은 귀족적이고 희극은 중산 계급적이며 파르스가 민중적이라 한다.
이 견해는 재미도 있고 거의 동감도 되나 내가 연극의 한 양식이란 면에서 파르스에 관심을 가지는 게 꼭 그렇게 '계층적'인 의미에만 주시하기 때문은 아니다.
애당초 Farce를 소극笑劇이라 번역하는 건 Comédie를 희극으로 번역하듯이 굉장히 문학적이지 못하다 보는데 이 또한 시대가 흐름에 따라 번역어의 딱딱함이 사라져 가리라.
나는 당장은 파르스를 Comédie와 대립시키지 않고 되려 Comédie 안에 포함되는 의견에 따르려 한다.
요컨대 희극으로 불리는 작품 중에 그게 희극이기에 필요한 요소를 요구할 때, 분명 파르스의 '씨앗'을 줍는 경우가 존재하리라. 그와 동시에 파르스라 이름 붙은 작품 중에서도 일반적으로 희극적(코믹)하다 불리는 요소가 들어갈 게 분명하다. 필경 희극은 '소극적'인 요소를 주로 삼지 않는 희극이다. 소극은 '소극적' 요소를 주로 하는 희극이라 할 수 있을 테지.
그렇다면 '소극적' 요소는 어떤 건가. 그건 무엇보다 '풍자미(벌레스크)'이다. '풍자미'의 본체는 '우스꽝스러움'과 '직설적', 그리고 '엄격함'에 있다.
파르스가 비속적이고 추잡하다 여겨지기 쉽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기도 쉬운 건 이 '풍자미'가 평범하고 얄팍하며 저속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블레, 뷔용, 스카롱, 셰익스피어, 고골, 칼데론, 모리엘 등이 그 수많은 걸작 속에 담은 '벌레스크'는 때로는 신사숙녀의 얼굴을 찌푸리게 할지언정 결코 진실로 기뻐하는 자를 빈축하게 만들진 않았다.
좀 더 가까운 사례를 들자면 쿠르틀린, 로스탱, 쇼, 아일랜드 작가의 대다수, 쥘 로맹이나 버나드, 크로멜링크는 제각기 우수한 '풍자미'를 그 작품 속에 들여 훌륭히 성공해냈다.
파르스는 그 발생의 기원을 쫓아가면 분명 교양과 취미의 세계와 거리가 있었음에 분명하다. 따라서 파르스의 주제로 정신적 숭고함을 찾는 건 어려움이 있지만 작품의 예술적 가치는 하나의 주제에서 요동치는 생명감의 강약에 있단 걸 생각하면 고대의 파르스는 그 양식의 매력을 근대 무대로 전하며 거기서 새로운 시대의 호흡을 계속하는데 이르렀다 보는 게 지당하리라.
나는 장래에 일본 극단에도 파르스 다운 파르스가 좀 더 근대적인 모습으로 예술적 향기와 강함을 가진 채로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
어쩌면 소위 '풍자미'는 대전후 유럽과 마찬가지로 현대 일본 사회에서도 하나둘 눈을 뜨고 있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중세의 파르스는 종교적 전성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지루한 설교 속에서 태어났다 하니 근대 소극은 또 소위 사회극 만능 시대를 반영하는 소란스러운 논의 속에서 태어날 수밖에 없으리라.(192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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