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은 말한다――어두컴컴한 문학에도 조금 질렸어. 좀 더 밝은 게, 붉은색이든 푸른색이든 좀 더 밝은 문학이 필요해.
을이 답한다――인생은 어두우니까.
갑――밝은 부분도 있어.
을――그건 인생을 깊게 보지 않기 때문이야.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지. 고통 없는 인생은 유익하지 않아.
갑――기다려 봐. 밝은 곳도 깊게 보면 어둡다는 거지? 그럼 어두운 곳도 깊게 보면 밝을지 모르잖아.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하면 결국 어떻게 된다는 거야? 고통에 괴로워하며 사는 것 말곤 살아갈 수 없다는 거야? '인생의 행복'은 역시 '죽음'을 가리키고 있단 건가?
을――고통을 고통으로 받아들여 그 고통을 맛보는 게 희망을 향한 첫걸음이 되는 거지. 그곳에 인간적 노력에 의미를 부여하는 생활의 가치가 있는 거야. 고통 없는 인간, 고통을 회피하고 또 고통과 싸우지 않는 인간은 인류의 부스러기지. 문학은 그런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냐.
갑――그래, 문학의 첫걸음만은 배운 모양이구나 너도. 나는 그 이후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거야. 너는 낙천주의자인 모양이니까 '보다 좋은 인생'의 실현을 기대하고 있겠지. 하지만 어떤 사람은 '있는 그대로의 인생'에 무엇도 기대할 수 없는 걸 알고 그 '있는 그대로의 인생'을 하다못해 자신만의 '보다 좋은 인생'으로 만드는 궁리를 하고 있을지 몰라. 그런 사람도 네게는 인류의 부스러기인가?
을――그렇지. 자기 혼자 '보다 좋게 살려' 하다니 괘씸한 이야기지.
갑――그럼 이런 건 어때. 너는 신앙을 가지고 있지. 인생을 믿고 현실을 믿고 있어. 근데 너랑 달리 이 인생, 이 현실을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너희가 인생이라 생각하는 인생은 인생의 가면에 지나지 않아. 진짜 인생은 좀 더 다른 모습을 하고 있을지 몰라. 그런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이 있으면? 현실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란 건 너도 알고 있을 거야. 심지어 너희는 적어도 그 현실이 인생의 일부라고 믿고 있지. 어떤 사람은 그 현실마저도 믿지 않아. 눈에 비치고 귀에 울리고 피부에 닿고 마음으로 느끼는 갖은 게 거짓이라 의심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 모르겠어? 너는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인 게 쉬운 모양이지. 일부 사람은 그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게 정답인지 의심하는 거야. 너희가 '즐겁다' 말하는 걸 '즐겁다' 말해야 하는 이유를 모르는 거야. 자신이 '괴롭다' 생각할 때 '즐겁다' 생각할 때, '어라? 내가 진짜 괴로워하는 게 맞나? 진짜 즐거워하는 게 맞나?'하고 스스로에게 묻는 인간이 있을지도 모르는 거잖아.
을――그런 사람은 미치광이지.
갑――그런 사람이 보기엔 너희가 미치광이일지도 모르잖아.
을――좋아, 그럼 그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 사람들은 어떻게 한다는 거야. 어물쩍 넘어간다는 건가?
갑――좋아, 그럼 너희는 그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여 어떤 '기쁨'을 느끼지?
을――내 질문에 먼저 대답해.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대체 어떻게 한다는 거야. 그냥 어물쩍 넘어가?
갑――너는 괜한 걸 알고 싶어 하는걸. 그 부분은 아직 문학이 아냐. 지금은 문학 이야기를 하고 있고. 잘 들어, 세상에는 그런 사람도 있다는 말일뿐이야. 밝은 문학이 그런 사람의 손에서 만들어진다는 보장은 없지. 또 그런 사람이 꼭 밝은 문학에 걸맞지도 않아. 나는 단지 밝은 문학이 있다면 어떤 문학이든 상관없다는 이야기가 아냐. 이를테면 '인생은 즐겁다'하고 말하며 발걸음이 가볍다는 사람에겐 그리 공감하지 않아. '인생을 즐겁게 만들자'고 인생의 '즐거움'을 과장해서 '괴로움'을 덮어쓰는 사람들의 친구이고 싶지도 않지. 하물며 인생의 '괴로움' 속에 '즐거움'이 있다는 적당한 추측으로 차를 홀짝이고 싶지도 않지.
을――너 같은 '인생의 견해'에서 밝은 문학이 생길 리가 없지.
갑――'밝음'은 '즐거움' 속에만 있는 게 아냐. 그런 '밝음'이라면 딱히 원하지 않아.
을――'괴로움' 속에도 있다는 건가?
갑――'괴로움' 속엔 없지. '괴로움' 밖에 있어. 너머에 있다 해도 좋고.
을――'깨달음'을 말하는 건가?
갑――'깨달음'……'깨달음'은 '문학 이상의 것'이야. 왜 그렇게 탈선하는 거야 아까부터.
을――너는 그럼 역시 인생에 구원을 추구하는 거지. 네가 말하는 '밝음'이란 건 '구원'을 말하는 거지?
갑――'구원'……'희망'이라 해도 되려나. 아니, 나는 인생은 있는 그대로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이라 생각해. 단지 그 '있는 그대로의 인생'에 의심을 지니고 있을 뿐이지. '있는 그대로의 인생'이 얼마나 '괴롭고' 어둡게' 보여도 또 얼마나 '즐겁고' '밝게' 여겨져도 단지 그걸 있는 그대로 그리는 게 문학의 '모든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아.
을――뻔한 소리를 하네.
갑――그 말은 곤란한걸. 그러니까, 내가 추구하는 건 '인생의 밝음'이 아냐. 어디까지나 '밝은 문학'이지. 그 '밝음'은 너희가 말하는 인생 어디에도 없어도 돼. 단지 작품 속에만 있으면 되는 거야.
을――그러니 그건 '허구의 문학'이라 하는 거야. 진지하게 인생을 대하지 않는 문학이란 거고. '정말로' 살아가려 한다면 그런 문학에 볼일은 없어.
갑――볼일 없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너희를 위해 문학을 하는 게 아니라고 말할 뿐이야. 하지만 마지막으로 단언해두는데 진짜인지 아닌지 모를 걸 '정말로'라고 말하는 게 엉망진창으로 보여. 적어도 내겐. 진지하게 인생을 사느냐 아니냐. 그건 진지하단 말의 의미부터 정해야 하지만 우리는 인생과 눈싸움을 할 수 없다는 이야기야. 우리는 문학 속에 인생 그 자체보다 인생을 보는 작가의 눈을 추구하지. 그리고 그 눈 안에서 '새로운 인생'을 발견하는 거야. '밝은 문학'이란 작품 속에 빛나는 '작가의 눈이 내뿜는 밝은 빛'이란 뜻이지.
을――너는 문학이 뭔지 모르네.
갑――너는 알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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