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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에도가와 란포

쿠로테구미 下. 숨겨진 사실 - 에도가와 란포

by noh0058 202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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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 아무리 "쿠로테구미"와 나눈 약속이라도 나한테만은 이야기해줄 거지?"
 저는 큰아버지 댁을 나오자마자 아케치에게 물었습니다.
"그럼 물론이지." 그는 의외로 간단히 받아들여주었습니다. "그럼 커피라도 마시며 느긋이 이야기할까?"
 그렇게 저희는 카페에 들어가 안쪽 테이블을 골라 자리에 앉았습니다.
"이번 사건은 발자국이 없다는 사실로부터 출발했지." 커피를 주문한 아케치는 그렇게 탐정담의 운을 뗐습니다.
"발자국이 없다는 사실에는 적어도 여섯 개의 가능성이 있지. 하나, 자네의 큰아버지나 형사가 도적의 발자국을 놓쳤다는 해석. 도적은 동물이나 새의 발자국으로 우리의 눈을 속일 수 있으니 말이야. 둘, 이건 조금 비약적인 상상일지도 모르지만 도적이 무언가에 매달리거나 줄타기를 하는 등, 발자국이 남지 않는 방법으로 현장에 왔다는 해석. 셋은 자네 큰아버지나 마키타가 도적의 발자국을 밟아 지웠다는 해석. 넷, 도적의 신발이 우연찮게 자네 큰아버지나 마키타의 신발과 동일했다는 해석. 이 네 가지는 현장을 자세히 조사하면 알 수 있지. 그리고 다섯 번째는 도적이 현장에 오지 않았다. 즉 큰아버님이 모종의 이유로 혼자 연기를 했다는 해석, 여섯 번째는 마키타와 도적이 동일 인물이었다는 해석. 이렇게라네.
 나는 일단 현장을 조사해 볼 필요를 느꼈기에 그다음 날 아침 바로 T들판으로 가봤어. 만약 거기서 첫 번째에서 네 번째까지의 흔적을 발견하지 못 하면 곧 다섯과 여섯 번째 가능성만 남으니 말이야. 조사 범위를 아주 좁힐 수 있지 않겠나? 그렇게 나는 현장에서 하나 발견해냈지. 경찰 녀석들은 아주 큰 걸 놓친 거야. 바로 바닥에 무언가 뾰족한 걸로 찌른 흔적이 수없이 남아 있다는 거였어. 물론 그것들은 전부 큰아버님과 마키타의 발자국(이라 해봐야 대부분은 마키타의 게다 자국)에 가려져 얼핏 봐서는 알 수 없었지만 말이야. 그 광경에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사이 문득 어떤 사실을 떠올렸지. 하늘의 계시라고 할까? 아주 멋진 생각이었다네. 왜, 서생 마키타는 작은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두툼한 모슬림 병대오비를 헐렁하게 두르고 있었지? 뒤에서 보면 얼핏 해악할 정도로 말이야. 나는 우연히 그 사실을 떠올렸어. 그거 하나면 충분할 거 같았지."
 그렇게 말한 아케치는 커피를 홀짝였습니다. 그리고 무언가 재촉하는 눈초리로 저를 바라보지 뭡니까. 하지만 아쉽게도 제게는 아직 그의 추리를 따라갈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론이 뭔가?"
 저는 뜸 들이는 그에게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결론인가. 방금 말한 해석 중 세 번째와 여섯 번째가 명중한 걸세. 바꿔 말하자면 서생 마키타와 도적이 동일 인물이었던 거야."
"마키타라고?" 저는 그만 소리쳤습니다. "말도 안 되네. 그렇게 우둔하고 정직한 걸로 잘 알려진 그 남자가……"
"그럼 말이야." 아케치는 침착히 이렇게 말했습니다. "자네가 말도 안 된다 생각하는 점을 하나씩 말해보겠나? 대답해주지."
"셀 수도 없지." 저는 잠시 생각한 후 말했습니다.
"첫째는 큰아버지께서 도적이 거한인 본인보다도 두세 촌은 키가 컸다고 증언하지 않았나. 그러면 오척칠팔촌은 족히 되지 않겠어? 하지만 마키타는 정반대로 땅딸막한 남자지."
"두 사실이 이렇게 극단적으로 반대되면 한 번 정도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네. 한 쪽은 일본인치고는 보기 드문 거한이고, 또 한 쪽은 기형에 가까운 소인. 참 명확히도 대조적이지 않나? 지나칠 정도로 말이야. 만약 마키타가 조금 짧은 죽마를 사용했다면 되려 나를 헤매게 했을지도 모르지. 하하하하하, 이제 알겠나? 마키타는 말야, 짧은 죽마를 미리 현장에 숨겨놓고 손으로 드는 대신 양발에 묶어 용무를 본 걸세. 어두컴컴한 데다가 큰아버님하고 거리도 있으니 무슨 짓을 해도 들킬 리가 없지. 그렇게 도적 역할을 끝낸 후에는 죽마 자국을 지우기 위해 그 위를 빙글빙글 돌거나 했을 테지."
"큰아버지가 그런 어린애 장난을 왜 간파하지 못 했다는 건가. 애당초 도적은 검은 옷을 입고 있다 했건만, 마키타는 항상 하얀 명주 옷을 입지 않았나."
"거기서 모슬림 병대오비가 나오는 거지. 머리 잘 쓰지 않았나? 그렇게 폭넓고 검은 모슬림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둘둘 둘러서야 마키타의 자그마한 몸집 정도는 어려울 것 없이 숨길 수 있지."
 너무나 간단한 사실에 저는 그만 바보 취급 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럼 그 마키타가 "쿠로테구미"의 수하였다 이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지. 쿠로테구……"
"이런, 아직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나. 어울리지 않는걸. 오늘따라 머리가 둔 한 모양이야. 큰아버님이나 경찰이야 그렇다 쳐도 자네마저 "쿠로테구미" 공포증에 걸렸을 줄이야. 하기야 요즘 돌아가는 꼴을 보면 어쩔 수 없는 이야기인가. 만약 자네가 평소처럼만 냉정했다면 굳이 나를 기다릴 것도 없이 자네 혼자서 충분히 해결했을 사건이라네. 이번 일에 "쿠로테구미"는 아무 관계도 없거든."
 오호라. 저는 머리가 어떻게 되었나 봅니다. 이렇게 아케치의 설명을 들으면 들을수록 되려 진상에서 멀어지는 것만 같으니까요. 무수한 의문이 머릿속에서 범벅이 되어 굴러 어떤 질문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지경입니다.
"그럼 방금 전에는 왜 "쿠로테구미"와 약속을 했느니 마느니 그런 엉터리 소리를 한 겐가. 애초에 만약 마키타의 짓이라면 그를 가만히 두는 것부터가 이상하지 않은가. 게다가 마키타에게 후미코를 납치하고 며칠 동안 숨겨 놓을만함 힘이 있다고? 하물며 후미코가 집에서 나온 날, 그는 시종 큰아버지 댁에서 한 발도 안 나갔다 하지 않았나. 마키타 같은 남자에게 이런 큰일이 가능한 건가? 그리고……"
"의문이 쏟아지는 모양이군. 하지만 만약 자네가 이 엽서의 암호를 풀었다면, 아니 적어도 이게 암호라는 것만 간파했다면 그렇게 이상하게 느낄 것도 없을 걸세."
 아케치는 그렇게 말하며 언젠가 큰아버지에게 빌려 온 "야요이" 명의의 엽서를 꺼냈습니다.(독자 여러분, 매우 귀찮으시겠지만 부디 다시 한 번 이야기 첫 부분의 문면을 읽어주시지요."
"만약 이 암호가 없었다면 나도 마키타를 의심할 생각은 하지 못 했겠지. 그러니 이번 발견의 시발점은 이 엽서라 해도 과언이 아냐. 하지만 처음부터 이걸 암호라 단정 지은 건 아니었다네. 그저 의심해본 거지. 왜 의심했냐고? 이 엽서가 후미코 양이 사라지기 며칠 전에 왔다는 것, 필적을 잘 흉내 내기는 했어도 어딘가 남성스러움이 묻어나는 것, 후미코 양에게 엽서에 대해 물었을 때 묘하게 시치미를 뗐다는 것. 그뿐일까, 이것 좀 보게나. 마치 원고지에 쓴 것처럼 한 줄마다 열여덟 자씩 빼곡히 채워 있지 않은가? 그럼 여기에 가로로 줄을 쭉 그어보겠네."
 그는 그렇게 말하며 붓필을 꺼내 원고지의 가로선 같은 것을 그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알기 쉽지. 이 선을 따로 가로로 읽어 보겠나. 어떤 줄이나 절반가량 가나자가 섞여 있지? 다만 단 한 줄 예외가 있다네. 이 첫 시작 줄을 딴 각행의 첫 글자일세. 한자뿐이지?"

一好割此外叮袋自叱歌切

"안 그런가?" 그는 붓필로 가로를 그리며 설명합니다. "우연치고는 이상하지. 남자가 쓴 문장이면 모를까 전체적으로 가나 쪽이 훨씬 많은 여성의 문장에 딱 한 줄에만 이렇게 형편 좋게 한자가 모일 리 없으니 말이야. 어찌 됐든 나는 이걸 연구해볼 가치가 있다 여겼다네. 그날 밤 돌아가서 열심히 생각해보았어. 다행히 이전에 암호에 관해 조금 조사한 덕에 의외로 쉽게 풀리긴 했지만 말야. 한 번 해볼까? 먼저 이 한자의 첫 줄을 따로 떼내어 생각해보세. 하지만 꼭 자화 문자처럼 도무지 뜻을 풀이할 수 없지. 한시나 경문과 연관이 있나 싶어 조사해 보았지만 그렇지도 않았나. 그렇게 여러 방면으로 생각하는 사이, 나는 문득 두 번째 글자만 말소된 문장이 있다는 걸 떠올렸다네. 이렇게 깔끔하게 쓴 문장 속에 말끔히 지우지 않은 흔적이 남아 있는 건 조금 이상하니 말이야. 심지어 둘 다 두 번째 글자지 않던가. 이건 내 경험을 바탕으로 알게 된 사실인데, 일본어로 암호를 만들 때 가장 성가신 건 탁음, 반탁음의 존재라네. 하여간에 지운 문자는 그 앞 문자에 위치한 한자의 탁음을 표현하기 위한 것 아닐까 싶었지. 그렇다면 이러한 한자들이 제각기 하나의 가나를 대표해야만 하네. 여기까지는 비교적 간단하지. 이제부터가 고생이야. 그래도 뭐, 고생한 건 빼놓고 결론부터 이야기하지. 요컨대 이건 한자의 횟수가 관건인 거야. 심지어 변과 방으로 파자까지 해서 말일세. 이를 테면 "호(好)"는 병인 계집 녀가 삼 획, 방인 아들 자가 삼 획이니 3과 3의 조합일세. 표로 표기하면 이렇게 되지."
 그는 수첩을 꺼내 아래와 같이 그렸습니다.

"이 숫자를 보면 변은 11까지, 방은 4까지 나오는군. 이 숫자가 무언가에 부합하지는 않을까? 이를테면 아이우에오 오십음도를  특정한 방식으로 배치한 경우의 순서를 가리키는 건 아닐까? 그런데 말이네, 아카사타나하마야라와응으로 배열하면 그 수가 마침 11이 된다네. 이건 우연일지 몰라도 일단 한 번 해보도록 하지. 변의 횟수는 아카사타나 즉 자음의 순서를 뜻하고, 방의 획수는 아이우에오 즉 모음의 순서를 가리키는 거라 가정하는 거야. 그럼 "一"은 1획 밖에 없으니 아행의 첫 글자, 요컨대 "아"가 되고, "好"는 변이 세 획이니 사행이고 방이 삼획이니 세 번째 글자인 "스"가 되겠군. 대입해 가면.

 

アスヰチジシンバシヱキ(아스이치지신바시에키)

 

 가 되는군. "ヰ"와 "ヱ"는 한 획짜리 변이 없어 아행으로 표기하기엔 무리가 있으니 와행을 사용한 것이겠지. 암호가 맞았군. "내일 한 시 신바시역"이 되니까 말야. 이 남자, 암호에 관해서는 제법 실력이 있어. 하여간에 한창 때의 여성에게 암호로 시간과 장소를 알린다라. 심지어 필적을 보면 남자의 것이지. 달리 생각할 도리나 있나? 사랑의 도피라 볼 수밖에 없지. 이제 사건이 "쿠로테구미"와 멀어진 게 보이나? 적어도 "쿠로테구미"를 조사하기 전에 이 엽서를 보낸 사람부터 조사해 볼 필요가 있겠지. 하지만 후미코 양 말고는 이 엽서를 보낸 사람을 알지 못 해. 이게 난관이었지. 하지만 이 사실을 다시 한 번 마키타의 행위와 연결 지어 생각하니 의문이 자연스럽게 녹아내렸다네. 만약 후미코 양이 스스로 집을 나선 거라면 두 부모님께 무언가 언질이라도 둘 테니 말이야. 그 점과 마키타가 우편물을 정리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을 연결 지으면 조금 재미있는 이야기가 떠오른다네. 바로 이런 걸세. 마키타는 모종의 방법으로 후미코 양의 사랑을 알아차렸지. 그런 불구자 같은 남자는 한층 더 날카로운 촉을 지녔기 마련이니까. 마키타가 어떻게 했을 거 같나? 후미코 양이 남기고 간 편지를 숨기고 대신 직접 만든 "쿠로테구미"의 협박장을 큰아버님께 보낸 거라네. 협박장이 우편으로 오지 않은 거하고도 들어맞지."
 아케치는 여기서 잠시 말을 끊었습니다.
"놀랍군. 하지만……"
 내가 다시 떠오른 수많은 의문을 입에 올리려 하니,
"기다려보게나." 아케치는 제 말을 누르고 말을 계속했습니다. "현장을 조사한 나는 그대로 큰아버님댁 문 앞까지 가 마키타가 나오는 걸 기다렸다네. 그리고 그가 심부름이라도 가는 행색으로 나온 걸 잘 구슬려 카페까지 끌고 갔어. 마침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테이블까지 말일세. 나도 자네처럼 그가 정직한 사람이란 걸 인정하고 있었으니, 이번 사건의 뒤편에 무언가 깊은 사정이 숨어 있을 게 분명하다 생각했지. 고로 이렇게 말했다네, 절대 밖에 새어나갈 일 없을 테고 사정에 따라서는 도와줄 테니 안심하라고. 그러니 자백하더군.
 자네도 핫토리 토키오라는 남자를 알고 있을 걸세. 기독교 신자라는 이유로 후미코 양과의 결혼 요청이 거절당하고, 심지어는 큰아버님 댁에 출입하는 것까지 금지 당한 그 불쌍한 핫토리 군 말일세. 부모란 참 어리석어지기 마련이라던가. 아무리 자네 큰아버님이라도 후미코 양과 핫토리 군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란 걸 알아차리지 못 한 거야. 후미코 양은 또 어떤가? 그렇게 어여쁨을 받고 있으니 굳이 가출할 것까지는 없었는데 말이야. 제아무리 종교적인 편견이 있더라도 큰아버님께서 어디 사랑하는 사람을 억지로 떼어놓으실 인물인가? 이건 자식은 부모 마음을 모른다고 해야겠군. 어쩌면 가출로 겁을 주면 고지식한 큰아버님이라도 꺾여주실 거라는 교활한 생각일까. 어느 쪽이든 둘은 나란히 손을 잡고 핫토리 군의 시골 친구 집까지 도망간 걸세. 마키타는 그걸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쥐고 있었던 거고. 나는 치바까지 나가 "쿠로테구미" 소동으로 집안이 뒤집어진 것도 모른 채 하염없이 달달한 사랑에 빠져 있던 두 남녀를 하룻밤에 걸쳐 설득해야 했지. 별로 대단한 역할은 아니었지만 말야. 하여간에 결국 둘이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을 짜준다는 약속으로 겨우 후미코 양을 떼어내 데리고 돌아온 거였네. 다행히 약속은 지킬 수 있을 거 같아. 방금 전 큰아버님의 말투를 들어서는 말야.
 그럼 이번엔 마키타 쪽 문제로군. 이쪽 역시 여자 문제였어. 그 불쌍한 서생이 뚝뚝 눈물을 흘리더라고. 그런 남자도 사랑은 할 줄 아는 것이겠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아마 장사치에게 뺏길 뻔했나 봐. 그 여자를 손에 넣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더군. 그리고 돈은 얻었으니 이제 후미코 양이 돌아오기 전에 떠날 셈이었던 거고. 사랑의 위력이란 게 참 대단하지 않나? 그런 우둔한 남자가 이런 교묘한 트릭을 생각해낸 것도 전부 사랑 덕이니 말이야."
 그런 결론에 저는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여러 생각이 들게 하는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아케치도 말하다 지쳤는지 축 늘어져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말없이 서로의 얼굴만 바라보았습니다.
"그새 커피가 식어버렸군. 그럼 돌아갈까."
 이윽고 아케치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제각기 하숙집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헤어지기 전, 아케치는 문득 떠올랐다는 양 방금 전 큰아버지께 받은 2천 엔이 담긴 종이봉투를 제게 건네며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적당한 틈을 봐서 마키타에게 쥐여주게나. 결혼 자금으로 쓰라고 말야. 그도 참 불상한 사람이야."
 저는 가볍게 승낙했습니다.
"인생 참 재밌군. 내가 오늘은 두 연인의 중매인이 된 것이니 말이야."
 아케치는 그렇게 말하며 유쾌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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