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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에도가와 란포

유령 - 에도가와 란포

by noh0058 202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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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지도 녀석. 끝내 죽어버렸습니다."
 심복이 살짝 의기양양한 얼굴로 그렇게 보고했을 때, 히라타는 적지 않게 놀랐다. 물론 츠지도가 꽤나 오랫동안 병으로 마룻바닥 신세를 지고 있다는 이야기야 줄곧 들어왔다. 하지만 그렇게나 집요하게 자신을 노리며 복수(제멋대로 그렇게 떠들고 있다)를 평생의 목적으로 살아온 그 남자가, "녀석의 배때기에 이 단도를 꽂기 전까지는 절대 못 죽는다"는 말을 입버릇 삼아 온 그 츠지도가 그 목적을 이루지 못 하고 죽어버렸다니. 도무지 믿기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인가?"
 히라타는 그만 심복에게 그렇게 되물었다.
"사실이고 자시고 지금 막 녀석의 장례식이 시작되는 꼴을 보고 온 참입니다. 혹시 몰라 이웃들에게 확인도 해봤는데 역시 틀림없었어요. 아들 놈이랑 둘이 사는 와중에 아버지마저 죽어버린 탓일까요. 아들 녀석은 아주 울상으로 관 옆을 지키더라고요. 아버지하고 다르게 약해 빠진 모양이에요."
 그 말에 히라타는 실망했다. 자신은 무엇 때문에 집 주변에 높은 콘크리트 울타리를 툴렀는가. 어째서 울타리 위에 유리 파편을 깔아두었나. 왜 사실상 공짜나 다름없는 값으로 순사에게 방 한 칸을 빌려주었나. 무슨 연유로 덩치 좋은 서생을 둘이나 두었나. 어찌하여 밤은 물론이요 낮에도 정 어쩔 수 없는 용무가 아니면 집을 나서지 않았는가. 설령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서생을 동반시켰던 이유는 또 무엇이랴. .전부 단 한 사람, 츠지도가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히라타는 자수성가를 이룰 정도의 남자였던 만큼, 때로는 꽤나 뒤가 켕기는 일 또한 해왔다. 그에게 깊은 원한을 품는 사람은 하나 둘이 아니었다. 물론 히라타가 그런 것들을 신경 쓰는 법은 없었으나, 그 미치광이 츠지도 노인만은 줄곧 그를 괴롭혀 오지 않았나. 그런 상대가 죽었다는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히라타였지만, 그와 동시에 어딘가 노력한 보람을 잃은 듯한 쓸쓸한 감정도 함께 찾아왔던 것이다.
 다음 날, 히라타는 혹시 몰라 직접 츠지도의 집주변을 찾아 상황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심복의 보고가 틀림 없다는 걸 확인할 수 잇었다. 그제야 겨우 마음을 놓은 히라타는 이제까지 해온 엄중한 경계를 풀고 오랜만에 느긋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매일 같이 어두웠던 히라타가 살짝 쾌활해서는 여태껏 들어보지 못 한 웃음까지 짓지 않던가. 자세한 사정을 모르는 가족들은 적잖이 의아해했다. 하지만 히라타의 쾌활함은 그리 오래가지 못 했다. 되려 우울함이 한층 더 심해진 마당이니 가족들 또한 고민에 잠길 수밖에 없었다.
 츠지도의 장례식이 끝나고 별다른 일 없이 사흘이 지났다. 그렇게 나흘째 아침. 서재 의자에 몸을 맡긴 채 별생각 없이 그날 온 우편을 정리하던 히라타 씨는 대뜸 얼굴이 새파래졌다. 수많은 봉투 사이에서 꽤나 흐트러져 있어도 분명 어딘가 익숙한 필적으로 적힌 편지를 발견해버린 것이다.

 이 편지가 도착할 즘이면 나는 죽어 있겠지. 내가 죽어 제법 기쁘지 않나? 이제 마음을 놔도 되겠다며 꽤나 느긋하시겠지. 하지만 그렇게 되지는 못 할 거다. 내 몸은 죽어도 내 영혼만은 네놈을 해치울 때까지 결코 죽지 않을 테니까. 네놈의 그 지긋지긋한 조심성은 살아 있는 인간에게는 아주 효과적이겠지. 나 또한 어떻게 손써볼 도리가 없었으니까. 하지만 제아무리 엄중해본들 연기처럼 틈을 빠져나갈 수 있는 영혼에게도 효과적일까? 네놈이 아무리 부자라도 이것만은 어떻게 못 할 테다. 나는 말이다, 움직이지도 못 하는 중병으로 누워 있는 동안에 이렇게 맹세했다. 이 목숨으로 네놈을 해치울 수 없다면 죽어서 영혼이 되어서라도 네놈을 죽여버리겠다고 말이야. 수십 일 동안 누워서 그 생각만 했지. 이만한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을 성싶으냐? 조심하거라, 유령의 원한이란 살아 있는 인간의 힘보다도 훨씬 무서울 테니.

 필적이 난잡한 데다가 한자 이외에는 전부 가타카나로 적힌 탓에 꽤나 읽기 곤란했지만 내용은 위와 같았다. 말할 것도 없이 츠지도가 병상에서 신음하면서도 혼을 담아 적은 게 분명했다. 자신이 죽은 이후에 아들을 시켜 던져 넣은 것이리라.
"헛소리도 가지가지 하는군. 이런 어린애 장난 같은 협박으로 내가 움찔이나 할 거 같나?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녀석이. 녀석도 병 때문에 머리가 어떻게 된 모양이야."
 그 자리에서는 협박장을 비웃은 히라타. 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말로 못 할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 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막을 방법이 없다는 사실이, 상대가 어떻게 공격할지 전혀 알 수 없다는 상황이 그를 적지 않게 짜증 나게 한 것이다. 그는 밤낮 구분 없이 꺼림칙한 망상에 괴로워하게 되었다. 불면증은 더더욱 지독해져 갔다.
 한 편으로 츠지도 아들의 존재도 마음에 걸렸다. 아버지하고는 달리 마음이 연약해 보이는 남자에게 설마 그런 일이야 없겠지만 혹여 아버지의 뜻을 따라 자신을 노린다면 큰일이지 않은가. 거기까지 생각을 이르니, 그는 바로 이전에 츠지도를 감시케 하기 위해 고용했던 남자를 불러 이번에는 아들 쪽의 감시를 명했다.
 그로부터 몇 달 동안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히라타의 신경과민과 불면증은 회복되지 않았지만 걱정한 것처럼 원령의 저주 같은 것은 없었고, 츠지도의 아들 또한 이렇다 할 불온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걱정이 깊은 히라타도 점점 무익한 고생을 한심하게 느끼기 시작했다.
 하지만 어느 날 밤이었다.
 히라타는 평소와 달리 나 홀로 서재에 틀어박혀 무언가를 쓰고 있었다. 주택가인 탓에 아직 깊지 않은 밤인데도 불구하고 주변은 조용히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이따금 개의 울음소리만이 쓸쓸히 들려올 따름.
"이런 게 왔습니다."
 서생이 대뜸 들어와서는 한 통의 우편물을 그의 책상 끝자락에 두고는 조용히 방을 나섰다.
 얼핏 보아도 사진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열흘 쯤 전에 열린 회사 창립 기념회. 설립자들이 나란히 찍은 찍은 사진이었다. 히라타 또한 그 중 한 명이었기에 전달된 것이렸다.
 히라타는 별 관심도 없었지만 마침 글 쓰는 것에도 피로를 느껴 쉬고 싶은 참이었기에 곧장 봉투를 뜯고 사진을 꺼내보았다. 잠깐 동안 내용을 확인하던 히라타. 하지만 불쑥 무언가 더러운 것이라도 만진 것처럼 책상 위로 사진을 내동댕이쳤다. 그리고 불안한 눈초리로 방안을 두리번거리는 것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머뭇머뭇 막 내동댕이 친 사진으로 손을 뻗었다. 바라보는 것도 잠깐으로, 다시 홱 내동댕이 치지 않던가. 그런 이상한 동작을 두세 번이나 반복한 후에야 겨우 침착히 사진을 응시할 수 있었다.
 몇 번을 확인해도 환영은 아니었다. 눈을 문지르고 사진 표면을 쓰다듬어보아도, 그 무서운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았다. 오싹한 감각이 히라타의 등을 타고 오른다. 그는 갑자기 사진을 북북 찢어 난로 안에 집어던지고는 비틀비틀 일어나 서재에서 도망쳤다.
 두려워했던 것이 끝내 찾아왔다. 츠지도의 집념 깊은 원령이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에는 일곱 설립자의 명확한 모습 외에도 츠지도의 꺼림칙한 얼굴이 실려 있었다. 비록 몽롱할지언정 사진의 표면을 한가득 차지하 듯 큼지막하게. 안개 같은 얼굴 속에 담긴 새까만 두 눈동자는, 증오 서린 시선으로 히라타를 노려보고 있었다.
 히라타는 무서운 나머지 마치 어린아이처럼 이불로 온몸을 덮은 채 벌벌 떨며 밤을 보냈다. 하지만 태양의 힘은 위대하다 해야 할까. 아침이 되어 조금은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리가. 어젯밤에는 내 눈이 어떻게 된 거야."
 겨우 그렇게 생각을 고친 히라타는 아침 햇살 속의 서재에 발을 들였다. 아쉽게도 사진은 흔적도 없이 불타 버렸다. 책상 위에 남은 사진 포장지만이 어제 일이 꿈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명백히 가르쳐주고 있다.
 잘 생각해 보면 어느 쪽이든 참 무서운 일이다. 만약 그 사진에 찍힌 것이 정말로 츠지도의 얼굴이라면 협박이 고스란히 이뤄진 것이지 않은가. 이렇게 꺼림칙한 일은 달리 없다. 세상 속에는 이해할 수 없는 것도 있기 마련. 설령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진이 히라타의 눈에만 그렇게 비친 것이라 해도, 그래서야 드디어 츠지도의 저주가 효과를 발휘해 미치기 시작한 것이 아닐까 싶어 한 층 더 무섭게 느껴졌다.
 히라타는 사나흘 동안 모든 것을 제쳐두고 사진 생각에만 빠져 있었다.
 만약 같은 사진사가 츠지도의 사진을 찍은 적이 있어서 그 필름과 이번 사진의 필름이 이중으로 인쇄된 것은 아닐까. 그런 바보 같은 생각까지 이르러 일부러 사진사에게 심부름꾼을 보내 조사해보았지만 물론 그런 결말일 리도 없었다. 게다가 사진사의 수첩에는 츠지도란 이름 하나 찾지 못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가량 지났을 즘의 일이다. 관여한 회사의 지배인의 전화였기에, 히라타는 아무 생각 없이 탁상전화의 수화기를 들었다. 그랬더니 이상한 웃음소리가 들린 것이다.
"우후후후후……"
 멀리서 들리는 건가 싶었지만 귀 곧장 옆에서 아주 크게 웃는 것처럼도 들렸다. 아무리 무어라 말을 해도 상대는 웃기만 할 뿐.
"여보시오. XX 아닌가?"
 히라타가 짜증 섞인 목소리로 그렇게 소리를 높이니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우, 우, 우……그런 소리와 함게 저 멀리로 사라져 갔다. 그리고 "번호를 말씀해주세요."라는 교환수의 목소리가 대신했다.
 히라타는 수화기를 쿵하고 내려놓고는 잠시간 한 곳을 멍하니 바라보며 움찔 조차 못 했다. 그러는 사이에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마음 밑바닥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분명 츠지도의 웃음소리였다……히라타는 탁상 전화가 무언가 무서운 것이라도 된다는 양, 그럼에도 눈만은 떼지 못 한 채 뒤로 슬금슬금 걷듯이 하여 방에서 도망쳤다.
 히라타의 불면증은 점점 더 지독해졌다. 겨우 잠에 드나 싶으면 갑자기 꺼림칙한 비명과 함께 벌떡 일어나는 일도 이따금 있었다. 가족들은 가장의 모습에 적잖게 불안해했다. 그리고 의사를 보고 오라고 끈덕지게 권유했다. 히라타는 만약 가능하다면 어린아이가 "무서워"하고 어머니에게 매달리기라도 하듯이 누군가에게 매달리고 싶었다. 그리고 작금의 이 두려움을 해결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도 없으니 "무얼, 그냥 신경쇄약일 뿐이야"하고 말하며 자신을 겉꾸밀 뿐, 의사의 진찰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렇게 다시 며칠이 지났다. 어느 날, 히라타가 중역을 맡고 있는 회사의 주주총회가 있었다. 히라타는 그 자리에서 조금 입을 열어야만 했다. 요 반 년 동안 회사의 경영 상태는 이전과 비교도 할 수 없는 호성적을 보였으며 달리 걱정할 문제도 없었기에 여느 때처럼 보고 연설만 마치면 그만이었다. 히라타는 백 명 가까이 모인 주주들 앞에 서서 아주 익숙하고 잘 녹아내린 태도와 말투로 이야기를 이끌어 갔다.
 하지만 그렇게 이야기를 하던 도중. 청중인 주주들을 쓱 둘러보던 히라타는 저도 모르게 연설을 멈추고 말았다. 불쑥 이상한 것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수상쩍어 할 정도로 오랫동안, 말 한 마디 없이 멀대 같이 서있기만 해야 했다.
 수많은 주주들 뒤편에서 죽은 츠지도와 똑같은 얼굴을 한 사람이 자신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말씀 드린 것처럼……"
 히라타는 마음을 다 잡고 목소리를 한층 높여 연설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일까. 아무리 기운을 내보려 해도 그 꺼림칙한 얼굴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히라타는 점점 허둥거리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애매모호해지고 앞뒤가 맞지 않기 시작했다. 그러자 츠지도와 똑같은 얼굴이 당황한 히라타를 비웃기라도 하는 것처럼 대뜸 씩 웃어 보이지 않던가.
 히라타는 어떻게 연설을 끝냈는가. 거의 무아몽중이었다. 그는 재빨리 인사를 하고 테이블에서 벗어나서는 사람들이 의아해하는 것도 아랑곳 않고 출구 쪽으로 달려 자신에게 겁을 준 얼굴의 주인을 찾았다. 물론 아무리 찾아도 그런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몰라 다시 한 번 자리로 돌아와 원래 위치에서 가까운 곳부터 주주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다시 짚어보았지만 이제는 츠지도와 비슷한 얼굴조차 찾을 수 없었다.
 회장의 회의실은 출입이 자유로운 빌딩 안에 위치해 있지 않던가.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우연히 청중 중에 츠지도와 닮은 인물이 있었고, 히라타가 찾을 즘에는 이미 떠나간 것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상에 그렇게나 닮은 얼굴이 존재하는 것일까. 히라타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게 츠지도가 빈사 속에서 남긴 무서운 선언과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 같아 견딜 수 없었다.
 그 이후 히라타는 이따금 츠지도의 얼굴을 보았다. 어느 때는 극장 복도에서 어느 때는 공원의 어둠 속에서 또 어느 때는 여행지의 북적이는 길가에서, 또 어떤 때는 자택의 문 앞에서. 마지막 경우에는 자칫하면 졸도할 뻔했다. 어느 새벽 날, 귀가하는 그의 자동차가 문 앞을 지나라 할 때였다. 문 앞에 그림자 하나가 떠올라 자동차와 엇갈렸는데, 그 잠깐 사이에 그 얼굴이 자동차 창문 너머로 보인 것이다.
 역시나 츠지도의 얼굴이었다. 하지만 현관에 도착해 자신을 맞이해준 서생이나 여종들의 목소리로 겨우 기운을 되찾은 히라타가 운전수에게 명해 주변을 찾게 했을 때에는 이미 어떤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어쩌면 츠지도 녀석이 살아 있는 건지 몰라. 이런 연극으로 나를 괴롭히려 드는 거지."
 히라타는 문득 그런 식으로 의심해보았다. 다만 끊임없이 츠지도의 아들을 감시한 심복의 말에 따르면 조금도 의심스러운 구석이 없다고 한다. 만약 츠지도가 살아 있다면 한 번 정도는 아들을 찾을 법도 한데 그런 게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애초에 가장 이상한 것은 살아 있는 인간이 자신을 이렇게나 좇아다닐 수 있는 것일까. 히라타는 평소부터 비밀주의가 강해서 외출할 때에도 종자는 물론이요 가족들에게도 행선지를 알리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니 설령 츠지도의 얼굴이 그의 행선지마다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히라타의 저택 앞에 잠복하여 자동차의 뒤를 쫓아야만 한다. 다만 이렇게나 한적한 주택지에서 다른 자동차가 뒤를 쫓으면 모를 리도 없으며, 설령 자동차를 갖추더라도 근처에 주차해놓을 곳 하나 없지 않은가. 그렇다고 설머 걸어서 뒤를 쫓을 리도 없겠지. 아무리 생각해도 원령의 저주임이 분명했다.
"아니면 내가 미치기라도 했다는 것이냐."
 하지만 설령 츠지도가 미쳤다 한들 무서운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이래저래 고민하는 사이에 문득 묘안 하나가 떠올랐다.
"이럴 바에야 확인을 해야지. 왜 좀 더 일찍 생각하지 못 했을까."
 히라타는 서재로 들어가 붓을 들고는 츠지도의 고향 동사무소에 그의 아들 명의로 재적등본서를 요청하는 내용을 적었다. 만약 재적등본서에 츠지도가 살아 있다 나온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히라타는 부디 그래주기를 바랐다.
 며칠 지나지 않아 동사무소에서 재적등본이 도착했다. 히라타는 실망하고 말았다. 츠지도의 이름 위에 십자의 실선이 그어져 있고, 윗칸에는 사망 일자와 신고를 접수한 일자가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제는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요즘 무슨 일 있으신가요? 몸이라도 안 좋으세요?"
 히라타와 만나면 모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히라타 본인도 고새 몇 년이나 더 먹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흰머리도 한두 달 전에 비하면 부쩍 늘어난 것처럼 보였다.
"어떻습니까. 어디 보양이라도 좀 가시지요."
 병원에 가보라 해도 도통 듣지 않는 통에 가족들은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길 것을 권했다. 히라타 또한 집 앞에서 그 얼굴과 만난 이후로는 집안에서도 안심할 수가 없어서 여행이라도 하여 기분을 바꿔보려 하던 차이니, 권유를 받아들여 따스한 해안가로 잠시 거처를 옮기기로 했다.
 미리 단골 여관에 방을 잡아 달라는 엽서를 보내고, 준비를 갖춰놓으라 하고, 같이 갈 사람을 고르는 등, 그러는 동안 히라타가 간만에 마음이 밝아졌다. 일부러 겉꾸미는 경향은 있을지언정 젊은 사람이 산놀이라도 가는 것처럼 들떠 있었다.
 그렇게 해안가로 가니 예상한 것처럼 마음이 가벼워졌다. 밝은 해안가 경치도 마음에 들었다. 인정 두터운 마을 사람들도 마음에 들었다. 여관의 방도 아주 기분이 좋았다. 해안가이기는 했지만 해수욕장보다 온천 마을로서 명성이 높은 곳이었다. 그는 온천에 들어가고 따스한 해안가를 걷는 등 하루를 보냈다.
 걱정했던 얼굴도 이 따스한 곳에는 나타나지 않았다. 히라타는 더 이상 인기척 없는 해안가를 걸으면서도 움찔움찔하지 않게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이제까지와 달리 조금 먼 곳까지 산책했다. 저벅저벅 걷는 사이에 어느 틈엔가 밤의 어둠이 막을 내렸다. 주위는 넓은 모래사장. 인기척도 없이 첨벙……쏴, 첨벙……쏴하고 거듭되는 파도 소리만이 어딘가 불길한 소식이라도 되는 양 꺼림칙하게 울리고 있었다.
 그는 서둘러 여관 쪽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꽤나 걸어야만 했다. 자칫하면 반도 못 가는 사이에 해가 완전히 져버릴지 몰랐다. 그는 뻘뻘뻘 땀을 흘리며 발걸음을 서둘렀다.
 뒤에서 누군가가 따라오는 것처럼 들리는 자신의 발걸음 소리에, 히라타는 그만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무언가가 숨어 있는 듯한 나무 뒤편의 그림자도 마음에 걸렸다.
 잠시 걸어가니 작은 모래 언덕 건너편에 그림자가 보였다. 그걸 본 히라타는 어느 정도 마음을 놓았다. 빨리 저기까지 가 말을 걸면 이 묘한 기분도 풀어지리라. 히라타는 더욱이 빠른 걸음으로 그림자에 다가갔다.
 다가가보니 제법 나이가 있어 보이는 한 남자가 먼 곳을 바라보며 자세를 낮춘 채 앉아 있지 않던가. 마치 일사불란 생각에 잠겨 있는 듯했다.
 그 사람은 히라타의 발소리를 들었는지 깜짝 놀라서는 돌아보았다. 잿빛 배경 속에 창백한 얼굴이 떠올랐다.
"앗."
 그걸 본 히라타는 얻어맞은 듯한 소리를 질렀다. 그리고는 대뜸 달리기 시작했다. 쉰 살의 남자가 마치 술래잡기라도 하는 아이처럼 그 뒤를 쫓았다.

 이제까지 안전하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 츠지도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어이쿠."
 무아몽중으로 달리던 히라타가 무언가에 걸려 넘어지니 한 청년이 다가왔다.
"왜 그러세요? 아, 다치셨네요."
 히라타는 갈라진 손톱을 보여주며 고개를 끄덕였다. 청년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솜씨 좋게 상처를 묶어주고는 극도의 공포와 마음의 상처로 한 걸음도 못 내디딜 정도로 약해진 히라타를 거의 안다시피 하여 여관까지 바래다주었다.
 스스로도 이래도 몸져 눕는 거 아닐까 걱정스러웠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다음 날이 되니 조금 기운을 되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다리가 아파 걸어 다닐 정도는 못 되었지만 밥 같은 건 평범하게 먹을 수 있었다.
 아침을 마치니 어젯밤 신세를 진 청년이 상태를 보러 왔다. 그 또한 같은 여관에서 묵고 있었던 것이다. 문병으로 시작된 대화는 점점 잡담으로 옮겨 갔다. 히라타는 마침 말상대가 필요했다며 평소 이상으로 쾌할하게 입을 움직였다.
 자리를 함께하던 히라타의 종자가 사라진 후, 청년은 마치 기다렸다는 양 말투를 바꿔 이렇게 말했다.
"사실 저는 당신이 이곳에 오실 적부터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았는데요……무슨 일 있으신 거죠? 말해주실 수 있나요?"
 히라타는 적잖이 놀랐다. 처음 보는 이 청년이 대체 무엇을 안단 말인가. 게다가 이 얼마나 불손한 말투인가. 히라타는 이제까지 츠지도의 원령에 대해 남에게 이야기해본 적이 없었다. 너무나 바보 같은 소리 같아 부끄러워 말하지 못 했던 것이다. 그러니 지금 이 청년의 질문에도 사실을 밝힐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어찌나 신비한 화술이란 말인가. 짧은 문답을 오가는 사이, 청년은 마치 마법사처럼 그렇게나 무거웠던 히라타의 입을 아무렇지 않게 열어버린 것이다. 히라타가 조금 흘려 버린 게 계기였다. 만약 상대가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어떻게든 얼버무릴 수 있었겠지만 청년에게는 불가능했다. 그는 참 교묘하게 히라타의 말을 꺼내갔다. 어젯밤에 무서운 일을 겪은 탓도 있겠지만 히라타는 마치 자유를 잃은 사람처럼 말을 돌리려면 돌릴 수록 좀 더 깊은 곳에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끝내는 츠지도의 원령에 관한 모든 것을 남김없이 꺼내게 되었다.
 제 듣고 싶은 만큼 들어낸 청년은 이번에도 교묘한 화술을 통해 다른 화제로 이야기를 옮겨 갔다. 청년이 너무 오래 있었다 사과하며 방을 나갈 적, 히라타는 억지로 말하게 된 것을 불쾌하게 느끼지 않은 것도 모자라 그 청년이 어딘가 듬직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로부터 열흘 동안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다. 히라타는 이미 주변에 질려버렸지만 아픈 다리를 이끌고 무리하게 귀가해 한산한 주택가에 자리를 트는 것보다는, 이 소란스러운 여관 거리에 있는 쪽이 편할 것 같아 줄곧 엉덩이를 붙였다. 새로 지인이 된 청년이 이따금 재미난 말상대가 되어준 것도 그를 붙잡는 요인 중 하나였다.
 청년이 오늘도 히라타의 방을 찾았다. 대뜸 괜한 웃음을 짓더니 이런 말을 하지 않던가.
"이제 어딜 가셔도 괜찮습니다. 유령은 나오지 않을 테니까요."
 히라타는 순간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당황한 표정 안에는 아픈 곳을 찔린 불쾌함이 섞여 있었다.
"갑작스러우니 놀라시는 것도 이해는 합니다. 하지만 결코 농담은 아니랍니다. 유령은 이미 사라졌어요. 이걸 보시죠."
 청년은 한 손에 쥔 전보 한 통을 펼쳐 히라타에게 보여주었다. 안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추측한 대로 자백했다."

"이건 도쿄에 사는 제 친구가 보낸 것입니다. 자백했다는 건 츠지도의 유령 아니, 유령이 아닌 살아 있는 츠지도가 자백했다는 뜻이죠."
 너무나 갑작스러운 나머지 판단을 내릴 여유도 없었던 히라타는 그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청년의 얼굴과 전보를 번갈아 볼 뿐이었다
"사실 저는 이런 일을 쫓는 남자랍니다. 이 세상 구석구석에서 무언가 비밀스러운 일, 기묘한 사건을 찾아내 해결하는 게 제 취미죠."
 청년은 싱글싱글 웃으며 꽤나 적당히 설명했다.
"지난 번에 당신이 그 괴담을 이야기해주실 때도 제 감이 작동했죠. 뭔가 장치가 있는 게 분명하다고요. 척 보기에 당신은 스스로 유령을 만들 법한 약한 정신의 소유주 같지는 않았습니다. 게다가 당사자는 깨닫지 못 했을지 모르지만 유령이 나타나는 장소가 제한되는 듯했죠. 확실히 여행지까지 쫓아오는 걸 보면 어디든지 자유자재로 나타날 거 같지 않습니까?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그 대부분이 옥외로 한정되어 있는 걸 알 수 있죠. 가령 실내라 해도 극장 복도니 빌딩 내부처럼 누구나 출입할 수 있는 곳이었죠. 집에도 나타났다 하셨던가요? 하지만 사진이나 전화 말고는 누구나 오갈 수 있는 문 앞에 잠깐 얼굴을 보인 게 전부였죠. 유령하고는 조금 다른 거 같죠? 그래서 제가 이래저래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조금 성가신 점이 있어서 시간을 들여버렸지만 끝내 유령을 생포하는데 성공했죠."
 그런 말에도 히라타는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히라타도 한 번은 츠지도가 살아 있지 않을까 의심하여 재적등본마저 떼보지 않았나. 그리고 실망하였다. 대체 이 청년은 어떤 방법으로 이렇게 간단히 유령의 정체를 밝혀낼 수 있었던 것일까.
"무얼, 아주 간단한 장치였습니다. 오히려 너무 간단한 탓에 깨닫지 못 한 걸지도 모르겠군요. 하기사 그런 대대적인 장례식까지 벌였으니 당신이 아니더라도 속아 넘어갔을지 모르겠네요. 번역된 해외의 탐정 소설도 아니고 설마 도쿄 한가운데에서 그런 연기가 벌어질 거라고는 상상하기 어려우니까요. 하물며 츠지도가 참을성 강하게 아들과 거리를 둔 것도 아주 컸습니다. 다른 범죄도 그렇지만 상대를 속이는 비결은 자신의 감정을 억누르고 세간의 평범한 인정하고 정반대로 행동하는 것이니까요. 인간이란 생물은 항상 자신을 기준으로 남의 생각을 추측하기 마련이니 한 번 어긋난 판단을 내리면 실수를 깨닫기 어렵답니다. 또 유령을 드러내는 순서도 아주 좋았죠. 당신이 요전 번에 말씀하신 것처럼 여기저기 따라다녀서야 누구나 꺼림칙하기 마련이니까요. 그렇게까지 상대의 감정을 끌고 와 재적등본으로 마무리를 한 거죠. 조금은 의심해보시지 않았나요?"
"그야 물론이죠. 만약 츠지도가 살아 있었다면 도무지 납득이 안 가는 건 그 사진입니다. 물론 이건 제가 잘못 보았다 해도 말씀하신 것처럼 행선지를 아는 것이나 재적등본은 이상하죠. 설마 재적등본이 잘못되었을 거라고는 생각을 안 할 테니까요."
 어느 틈엔가 청년의 이야기에 빨려 들어간 히라타는 그만 그렇게 물었습니다.
"저도 주로 그 세 점을 생각했답니다. 이런 부조리하게 보이는 사실을 합리화시키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요. 그리고 결국 이 전혀 다른 세 사안의 공통점을 발견했습니다. 뭐, 대단한 건 아니지만요. 하지만 이 사건을 해결하는 데에는 아주 중요했습니다. 그건 하나같이 우편물과 관련이 있다는 거죠. 사진은 우편으로 왔을 테죠? 재적등본도 마찬가지일 테고요. 그리고 당신의 외출처 또한 그날의 우편과 관계가 있지 않습니까. 하하하하, 이제 좀 아시는 거 같군요. 츠지도는 당신의 집 주변 우편국에서 배달부 일을 했던 겁니다. 물론 변장은 했을 테지만요. 잘도 이제까지 안 들켰다 싶군요. 댁에 오는 우편도 댁에서 나가는 우편도 전부 훑어봤을 겁니다. 봉인된 곳에 열기를 대면 조금의 흔적도 없이 개봉할 수 있으니까요. 사진이나 등본은 이렇게 꺼내 세공한 것이겠죠. 당신의 행선지도 다양한 편지를 훑어보면 자연스레 알 수 있을 테니 쉬는 날이나 구실을 만들어 결근한 날에 당신 주변을 돌며 유령 연기를 한 겁니다."
"하지만 사진이야 조금 고생을 하면 불가능할 것도 없겠지만 재적등본을 그렇게 급히 위조할 수 있는 것일까요."
"위조가 아니죠. 그저 등본의 필적을 흉내 내 덧붙이면 그만인걸요. 등본의 종이는 내용을 지우는 건 어려워도 덧붙이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동사무소 서류에도 허점은 있는 모양이군요. 말투가 좀 이상하지만 재적등본에는 사람이 살아 있는지 증명할 힘이 없답니다. 호주면 힘들어도 다른 사람이라면 그저 이름 위에 붉은 줄을 긋고 그 위에 사망 신고를 한 날만 기입하면 산 사람도 죽은 것처럼 구밀 수 있으니까요. 누구나 나라에서 떼주는 것이면 의심하지 않는 버릇이 있으니 쉽게 깨닫지 못 하는 법이죠. 저는 그날 당신이 부탁한 츠지도의 등본을 다시 한 번 보내달라 부탁해보았습니다. 그리고 온 걸 확인해보니 제 생각이 맞았죠. 이거입니다."
 청년은 그렇게 말하며 품 안에서 한 통의 재적등본을 꺼내 히라타 앞에 놓았다. 그곳에는 호주로 츠지다의 아들이, 그다음 란에 츠지도의 이름이 기재되어 있었다. 그는 사망을 겉꾸미기 전에 이미 은거를 시작한 것이다. 이름 위에 선도 없을뿐더러 위에는 주소지를 옮긴 기록만 있을 뿐, 사망의 사자도 적혀 있지 않았다.
 기업가 히라타의 교우록에 아마추어 탐정 아케치 코고로의 이름이 기록된 것이 이쯤부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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