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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에도가와 란포

D언덕 살인사건 下. 추리 - 에도가와 란포

by noh0058 2021. 2.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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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살인사건으로부터 열흘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아케치 코고로 집을 찾았다. 아케치와 나는 그 열흘 동안 이 사건에 관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리고 어떤 결론을 내렸는지 의논했다. 독자는 그러한 것들을 이날 나와 그가 나눈 대화를 통해 충분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
 이전까지는 카페에서만 만날 뿐으로 집을 찾는 것은 처음이었다. 미리 위치를 들어둔 덕에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나는 그럴싸한 담배 가게 앞에 서서 안주인에게 아케치가 집에 있는지 물었다.
"네, 있지요. 잠시 기다려주세요. 지금 부를 테니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계단을 올라 큰 소리로 아케치를 불렀다. 그는 이 집의 2층을 빌려 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자,
"에ー"
 그런 이상한 대답과 함께 아케치가 삐걱거리는 계단을 내려왔다. 나와 얼굴이 맞으니 놀란 얼굴을 하고는 "이런, 올라오시죠."하고 말했다. 나는 그의 뒤를 따라 2층으로 향했다. 그런데 그의 방에 발을 들인 순간, 나는 그만 앗하고 깜짝 놀라고 말았다. 방의 상태가 너무나도 이상했던 것이다. 아케치가 독특한 사람이란 건 모르는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 해도 너무 이상했다.
 네 첩 반 짜리 방이 서적으로 가득 매워져 있지 않던가. 다다미는 정중앙에서 살짝 보일 뿐으로, 그 외에는 전부 산더미 같은 책뿐이었다. 사방의 벽이나 후스마를 따라 아래쪽은 거의 방 한가득, 위쪽은 폭이 좁은 채로 천장 근처까지. 온 방안에 책으로 된 둑을 쌓아 놓았다. 외출 도구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체 이런 방에서 어떻게 자는 건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물며 주인과 손님 고작 둘이 앉을 자리도 없었다. 자칫 잘못 움직였다가는 그대로 책으로 된 둑이 무너져 깔려버릴지 몰랐다.
"영 비좁지 않나요. 게다가 방석도 없어서 말이죠. 죄송하지만 부드러워 보이는 책 위에라도 앉아 주세요." 
 나는 서적산을 가르며 겨우 앉을 자리를 찾아냈지만, 참 어처구니가 없어 멍하니 그 주위를 삥 둘러보았다.
 이 이상한 방의 주인인 아케치 코고로라는 인물을 한 번 설명해두는 게 좋을 거 같다. 다만 나 또한 그와 오래 지낸 것은 아니기에, 그가 어떤 경력을 지녔고, 무엇을 입고 무엇을 먹으며, 어떤 목적으로 삶을 보내는지는 알지 못 한다. 단지 그가 이렇다 할 직업을 가지지 않은 채 일종의 유랑민으로 살아간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굳이 따져보자면 서생 정도일까. 서생이라 쳐도 꽤나 독특한 서생이다. 그는 언젠가 "저는 인간을 연구하고 있답니다"하고 말한 적이 있다. 당시의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 잘 알지 못 했다. 단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그가 범죄나 탐정 일에 평범하지 않은 관심과 무서울 정도로 풍부한 지식을 가졌다는 점이었다.
 나이는 나와 비슷한 정도로 스물다섯을 넘지는 않았을 것이다. 굳이 집자면 마른 편이며 전에 말한 것처럼 걸을 때에는 어깨를 흔드는 이상한 버릇이 있다. 그럼에도 결코 호걸을 떠올리게 하지는 않으며, 묘한 남자를 끌어내거나 한 쪽팔이 불편한 야담가 칸다 하쿠류를 방불케하는 걸음 거리다. 그러고 보니 아케치는 얼굴부터 목소리까지 하쿠류――하쿠류를 모르는 독자라면 제군이 아는 범위 내에서 소위 미남은 아니어도 어딘가 애교 있고 가장 천재적인 얼굴을 상상하면 된다――와 똑 닮았다. 다만 아케치는 머리가 좀 더 길게 뻗어 있고 산발처럼 덥수룩하다. 그리고 그는 사람과 이야기할 때에도 손가락으로 머릿결을 잡아당기고 돌리는 버릇을 지녔다. 안 그래도 산발인 머리를 한층 더 산발로 만들기 위함인 것처럼. 복장에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지 언제나 무명 옷에 꾸깃꾸깃한 병대오비를 묶고 있다.

"잘 찾아오셨네요. 한동안 못 봤는데 D언덕 사건은 어떤가요. 경찰 쪽에서는 아직도 범인을 짐작하지 못 하고 있나요?"
 아케치는 역시나 머리를 빙빙 돌리며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실은 그 일로 조금 할 이야기가 있어 찾아온 겁니다." 나는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망설이며 운을 뗐다.
"그 이후로 이래저래 생각해봤습니다. 생각뿐일까요. 탐정처럼 직접 사정 청취도 했지요. 실은 그렇게 하나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오늘은 그걸 당신에게 보고하고 싶어서……"
"호오, 그거 멋지군요. 자세히 듣고 싶은걸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그의 눈동자에 뭔지 알겠다는 듯한, 경멸과 안도의 색이 떠오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한 사실은 망설이는 내 마음을 격려해주었다. 나는 기세를 담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친구 중에 신문기자 한 명이 있습니다. 그 녀석이 D언덕 사건을 맡은 코바야시 형사란 사람과 제법 친하지요. 그래서 저는 그 신문기자를 통해 경찰의 상황을 자세히 들을 수 있었습니다. 듣자 하니 경찰은 조사 방침조차 세우지 못 하는 모양이더군요. 물론 이 방면 저 방면으로 활동은 하고 있다지만 이렇다 할 진보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전등 스위치 있죠? 그것도 도움은 안 되었나 보군요. 거기에는 당신의 지문이 묻어 있었으니까요. 경찰에서는 당신의 지문이 범인의 지문을 지웠다 생각하는 듯합니다. 그렇게 경찰이 곤란해하는 걸 알고 저는 한층 더 열심히 조사해볼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제가 도달한 결론이 무엇일 거 같습니까? 엄청난 내용이지요. 그리고 그걸 경찰에게 알리기 전에 당신에게 말하러 온 건 무엇 때문이라 생각하나요?
 어찌 되었든, 저는 그 사건이 벌어진 날부터 어떤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당신이라면 기억하고 계시겠죠? 두 학생이 범인으로 추정되는 옷의 색을 전혀 다르게 진술한 것을요. 한 사람은 검다 하였고, 한 사람은 하얗다 하였습니다. 아무리 사람의 눈이 부정확하다지만 정반대 색으로 착각하는 건 이상하지요. 경찰이 두 진술을 어떻게 해석하였는지는 몰라도, 저는 양쪽 모두 옳다 봅니다. 아시겠나요? 바로 범인이 흰색과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얼룩무늬 옷을 입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컨대 두툼한 검은 세로 줄이 들어 간 유카타 같은 거 말이죠. 여관의 대여 옷에서 자주 찾아 볼 수 있는……그럼 한 사람은 흰색만 보고 또 한 사람은 검은색만 보았느냐. 두 사람이 격자 사이로 안을 들여다보았기 때문이죠. 마침 그 순간, 한 사람의 눈이 격자의 틈과 옷의 하얀 부분과 일치한 위치에 있었고, 또 한 사람의 눈은 검은 부분과 일치하는 위치에 있었던 것입니다. 보기 드문 우연일지는 몰라도 결코 불가능하지는 않지요. 그리고 이 경우엔 이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 범인의 옷 무늬는 알게 되었군요. 하지만 이걸로는 조사 범위가 축소되었을 뿐, 아직 결정적이라 할 수는 없지요. 두 번째 논거는 전등 스위치의 지문입니다. 저는 아까 이야기한 신문 기자 친구의 도움으로 코바야시 형사에게 부탁해 그 지문을――당신 지문이죠――을 조사했습니다. 그 결과 드디어 제 생각이 틀림없다는 걸 확인해냈고요. 그건 그렇고 혹시 벼루 있으시면 하나 빌려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하나의 실험을 해보였다. 먼저 벼루를 빌린다. 나는 오른 엄지에 얇게 먹을 묻히고는 품에서 붓글씨용 종이를 꺼내 그 위에 지문을 찍었다. 그리고 그 지문이 마르는 걸 기다린 후, 다시 한 번 같은 손가락에 먹을 묻혀 이전 지문 위로, 이번에는 방향을 바꾸어 정성스레 찍었다. 종이 위에 서로 교차한 이중의 지문이 또렷이 나타났다.
"경찰에서는 당신 지문이 범인 지문 위에 찍혀 지워버렸다 해석하고 있지요. 하지만 지금 실험만 봐도 아는 것처럼 그런 건 가능하지 않습니다. 아무리 강하게 찍어도 지문이란 게 선으로 되어 있는 이상, 선과 선 사이에 이전 지문 흔적이 남기 마련이니까요. 만약 앞뒤의 지문이 정확히 동일하고 찍는 법도 같았다고 하면 지문의 각선이 일치하게 되니 어쩌면 나중 지문이 먼저 지문을 지우는 것도 가능할지 몰라도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하물며 설령 가능하다 쳐도 결론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 전등을 끈 게 범인이라면 스위치에 그 지문이 남아야 하죠. 저는 혹여 경찰이 당신의 지문 선과 선 사이에 남은 먼저 지문을 놓친 건가 싶어 직접 조사해보았습니다. 물론 그런 흔적은 조금도 없었죠. 즉 그 스위치에는 먼저 지문도 나중 지문도 당신의 지문만 찍혀 있을 뿐이란 겁니다. 이유는 잘 몰라도 아마 전등을 종일 켜놓은 채 한 번도 끄지 않은 것이겠지요.
 이러한 사실이 무엇을 가리키는 걸까요.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줄무늬 옷을 한 남자가――그 남자는 아마 죽은 여자와 잘 아는 사이일 테고, 실연 같은 이유도 떠올릴 수 있겠군요――고서점 주인이 밤마다 자리를 비우는 걸 알고, 그가 없는 틈에 여자를 덮친 것이지요. 소리를 내거나 저항한 흔적이 없으니 여자는 그 남자를 잘 알고 있었을 게 분명합니다. 그리고 어렵지 않게 목적을 달성한 남자는 시신 발견을 늦추기 위해 전등을 끄고 도망쳤습니다. 이 남자의 하나뿐인 실수는 장자의 격자가 열려 있다는 걸 몰랐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놀라서 격자를 닫을 적에 우연히 가게 앞에 있던 두 학생에게 모습을 보이고 맙니다. 그 후, 남자는 일단 바깥으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문득 전등을 끌 때에 지문을 남겼다는 걸 깨닫고 말죠. 남자는 어떻게든 지문을 지워야 했을 겁니다. 그렇다고 또 다시 같은 방법으로 방 안에 들어가는 건 위험하지요. 그때, 남자는 좋은 생각 하나를 떠올립니다. 바로 자신이 살인 사건의 발견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불을 켤 수 있을 테고, 이전 지문을 통한 혐의도 벗을 수 있습니다. 그뿐일까요. 설마 발견자가 범인일 거라 누가 생각이나 하겠습니까. 이만한 이득도 없습니다. 그렇게 그는 내키지 않는다는 얼굴로 경찰의 행동을 지켜봅니다. 대담히 증언까지 했지요. 결과는 그가 바라던 바였습니다. 닷새가 지나도 열흘이 지나도 아무도 그를 체포하러 오지 않았으니까요."
 나의 그런 이야기를 아케치 코고로는 어떤 얼굴로 들었던가. 나는 아마 이야기 도중에 무언가 이상한 표정을 짓거나 말을 자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아무리 평소부터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라지만 너무나도 아무렇지 않았다. 그는 시종 머리만 빙글빙글 돌리며 조용히 듣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참 뻔뻔한 사내다 생각하며 이야기를 마무리에 끌고 갔다.
"당신은 분명 그래서야 범인이 어디로 들어가고 어디로 도망쳤느냐 반문하겠지요. 확실히 그게 밝혀지지 않으면 다른 모든 게 밝혀져도 보람이 없겠군요.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그것마저 제가 알아냈습니다. 그날 밤 조사 결과 상, 범인이 출입한 흔적은 없었다고 했지요. 물론 살인이 있었던 이상 범인이 오고 갈 수밖에 없었으니, 형사의 조사에 어딘가 빈틈이 있었다고 밖에 생각할 수 없습니다. 경찰에서도 이걸로 꽤나 어려워하는 모양이던데, 불행히도 그들은 일개 서생인 제게도 못 미쳤다는 뜻이 됩니다.
 무얼, 그다지 대단치도 않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경찰이 이렇게나 청취를 했으니 주변 사람들을 의심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범인은 만에 하나 누군가의 눈에 들어도 범인이라 들통나지 않을 방법으로 지나간 건 아닐까. 목격한 사람에게도 실제로 아무 문제없었던 것은 아닐까, 하고서요. 즉, 인간의 주의력이 가진 맹점――우리의 눈에 맹점이 있듯이 주의력에도 맹점이 있죠――을 이용해, 마술사가 큰 소품으로 작은 소품을 숨기듯이 자신을 숨겨버렸을지도 모르니까요. 그렇게 제가 주시한 것은 그 고서점의 옆에 위치한 아사히야라는 국숫집이죠."
 고서점 오른쪽으로 시계집, 과자집이 있고, 왼쪽으로 양말집, 국숫집이 있는 것이다.
"저는 그곳으로 가 사건 당일 여덟 시 경에 화장실을 빌린 남자가 없는지 물었습니다. 그 국숫집은 당신도 아는 것처럼 가게에서 다다미방이 이어져 뒷문까지 갈 수 있도록 되어 있고, 그 문 바로 옆에 화장실이 있지요. 화장실을 빌리는 척 뒷문으로 나갔다, 다시 들어오면 그만인 겁니다. 아이스크림 장수는 뒷골목에 위치해 있으니 발견할 리가 없지요. 하물며 국숫집이니 아주 자연스럽게 화장실을 빌릴 수 있을 겁니다. 듣자 하니 그날 밤은 안주인이 없이 주인장만 있었다니 더욱 어려울 게 없지요. 당신도 참 멋진 생각을 했어요.
 그리고 예상대로 마침 그 때 화장실을 빌린 손님이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국숫집 주인은 남자의 얼굴이나 옷 무늬를 조금도 기억하지 못 했지만요――저는 바로 기자 친구를 통해 코바야시 형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형사도 국숫집을 조사했지만 그 이상 아무것도 알 수 없었습니다――"
 나는 잠깐 말을 끊어 아케치에게 발언의 여유를 주었다. 그는 입장 상 무어라도 한 마디 해야 할 터이다. 그런데도 그는 여전히 머리를 빙빙 돌리며 이렇다 할 기색을 내비치지 않았다. 나는 이제까지 경의를 보인다는 의미로 뱅뱅 돌리던 말을 직접적으로 고쳐야만 했다.
"아케치 씨 당신이라면 제 말 뜻을 이해할 겁니다. 꼼짝달싹 못 할 증거가 당신을 가리키고 있어요. 솔직히 말하면 저는 당신을 의심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증거가 모인 이상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저는 혹여 그 주택 안에 두꺼운 세로줄 유카타를 입은 사람이 또 있지 않을까 싶어 꽤나 열심히 조사해보았습니다만 한 사람도 찾지 못 했습니다. 당연하지요. 같은 세로줄 유카타라도 그 격자와 일치할만한 화려한 옷을 입는 사람은 드무니까요. 게다가 지문 트릭도, 화장실을 빌린다는 트릭도 아주 교묘해서 당신 같은 범죄 악자가 아니라면 도무지 흉내낼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가장 이상한 것은 당신이 죽은 안주인과 아는 사이라 했으면서 그날 밤, 안주인의 신원을 조사할 때에 옆에 있었음에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러면 그나마 의지할 게 알리바이 밖에 없군요. 하지만 그것도 어렵겠습니다. 기억하고 있나요? 그날 밤 돌아오는 도중, 하쿠바이켄에 올 때까지 당신이 어디 있었는지를. 당신은 한 시간 정도 주변을 산책했다 말했지요. 가령 당신이 산책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더라도 산책 도중에 국숫집 화장실을 빌리는 일은 아주 자주 있으니까요. 어떤가요, 아케치 씨. 제 말이 잘못되었나요? 가능하다면 당신의 변명을 듣고 싶군요."
 독자 제군. 제가 이렇게 몰아붙였을 때 괴인 아케치 코고로는 어떻게 했을까요. 재미 없게 고개 숙인 채 받아들였을 거 같나요? 그는 도무지 제가 생각지 못 한 방면으로 저의 간담을 빼놓았습니다. 갑자기 껄껄껄 웃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런 죄송하군요. 절대 웃을 생각은 없었는데 워낙 진지하셔서 말이죠." 아케치는 변명하듯 말했다. "당신 생각은 꽤나 재미있군요. 당신 같은 친구를 만나 정말 기쁩니다. 다만 아쉽게도 당신의 추리는 너무나 외면적이고 물질적입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당신은 저와 그 여자가 어떤 감각의 친구였는지를 내면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조사하셨나요? 제가 이전에 그 여자와 연애 관계가 있었는지, 혹은 현재 그녀를 미워하는지 어떤지. 당신은 그 정도 고찰도 하지 못 한 걸까요? 그날 밤, 왜 그녀를 안다고 말하지 않았나. 이유는 간단합니다. 저는 참고가 될만한 사정은 아무것도 몰랐던 것입니다. 저와 그녀는 초등학교도 들어가지 못 했을 적에 갈라졌으니까요. 물론 얼마 전에 우연히 알고서 두세 번 정도 대화를 나눈 적은 있었습니다만."
"그럼 지문은 어떻게 생각해야 되죠?"
"제가 그 이후로 아무것도 안 했을 거 같나요? 저도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했죠. D언덕은 매일 같이 어슬렁거렸고요. 주로 고서점에 자주 갔습니다. 그리고 주인을 붙잡아 이래저래 조사했죠――그때 안주인을 아는 사이라 밝혔더니 이야기가 빨라지더군요――당신이 신문기자를 통해 경찰의 상황을 안 것처럼, 저는 그 고서점 주인을 통해 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문에 관한 것도 바로 알 수 있었죠. 저도 묘하다 싶어 조사해봤는데, 하하…… 재밌는 이야기더군요. 전구 선이 끊어져 있지 뭡니까. 아무도 끄지 않았던 겁니다. 제가 스위치를 비틀어 불이 들어왔다 생각한 건 착각이고, 워낙 황급히 전등을 움직인 통에 한 번 끊긴 덩스텐이 연결된 겁니다. 스위치에 제 지문 밖에 없는 것은 아주 당연한 겁니다. 그날 밤, 당신은 장자 틈으로 불이 들어온 걸 보았다고 했죠? 그럼 전구가 끊어진 건 그다음이 되겠군요. 오래된 전구는 혼자 끊어지고는 하니까요. 그리고 범인의 옷 색은 제가 설명하기보다도……"
 그는 그렇게 말하고는 주변 서적을 뒤져 이윽고 낡은 서양책 하나를 꺼냈다.
"이거 읽어 본 적 있으신가요? 휴고 뭔스터버그의 '범죄 심리학'이라는 책인데 이 '착각'이라는 장의 모두를 십 행 정도 읽어보시죠."
 나는 그의 자신만만한 논의를 듣는 사이 서서히 자신의 실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고로 시키는 대로 책을 받아 읽어보았다. 대강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한 건의 자동차 범죄 사건이 벌어졌다. 법정에서 진실을 밝히겠다 선언한 증인 중 한 명은 문제의 도로가 건조해 말라 있었다 주장했다. 또 한 명의 증인은 비 때문에 도로가 젖어 있었다 선언했다. 한 사람은 문제의 자동차가 서행하였다 말했고, 또 한 명은 그렇게 빨리 달리는 자동차는 본 적이 없다 말했다. 또한 전자는 그 길에는 두세 명 밖에 없다고 하였고, 후자는 남자나 여자, 아이 등으로 수많은 통행자가 있었다 진술했다. 두 사람의 증인은 모두 존경할만한 신사며, 사실을 왜곡하여 어떤 이득도 얻지 않을 사람들이었다.

 

 내가 그걸 다 읽은 걸 본 아케치는 다시 한 번 페이지를 넘기며 말했다.
"이건 실제로 있었던 일인데, 이번에는 이 '증인의 기억'이라는 장이 있죠? 그 중반쯤에 미리 계획하여 실험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마침 옷 색상 이야기도 나오니 귀찮겠지만 한 번 읽어 보시죠."
 그건 다음과 같았다.
 

(전략) 하나 예를 들자면 재작년(이 책의 출판 년도는 1911년이었다) 괴팅겐에서 법률가, 심리학자 밑 물리학자의 학술 집회가 개최된 적이 있다. 고로 그곳에 모인 사람은 다들 세밀한 관찰에 도가 튼 사람들이라는 뜻이었다. 그 도시에서는 마침 카니발 같은 축제 소동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이 학문적 모임 도중에 문이 벌컥 열리더니 화려한 의상을 입은 한 광대가 미친 듯이 뛰쳐 들어온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보니 뒤에서 한 흑인이 손에 권총을 든 채 달려오고 있었다. 둘은 홀 한가운데에서 번갈아 무서운 말들을 내뱉었는데, 이윽고 광대 쪽이 털썩 마루에 쓰러지니 흑인이 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탕하고 권총 소리가 울렸다. 그들은 곧장 사라지듯이 방을 빠져나갔다. 다 해서 이십 초가 채 걸리지 않았다. 물론 사람들은 크게 놀랐다. 의장 외에는 그 말과 행동이 미리 예습되었고, 그 광경이 사진으로 남겨졌다는 걸 알지 못 했다. 의장이 이 일이 언젠가 법정에 서게 될 테니 의원 모두가 각자 정확한 기록을 남기도록 부탁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처럼 보였다.(중략, 그들의 기록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가 퍼센트 테이지로 기록되어 있었다) 흑인이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은 것을 맞춘 것은 마흔 명 중 고작 네 명뿐이었으며, 그 외 사람들은 중산모자를 하고 있었다 적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실크햇을 하고 있었다 적는 사람마저 있었다. 옷 또한 어느 사람은 붉다 하였고, 누군가는 갈색이라 밝혔으며, 아무개는 줄무늬라, 또 어떤 자는 커피색이라 기술하는 등, 다양한 색이 그를 설명해주었다. 다만 당시 흑인은 하얀 바지에 검은 상의를 입고, 커다란 빨간 넥타이를 하고 있었다.(후략)


"휴고 뭔스터버그가 설파한 것처럼" 아케치는 그렇게 운을 뗐다. "인간의 관찰이나 기억 따위 의지할 게 못 됩니다. 예로 든 것처럼 똑똑한 학자들마저 옷 색을 구분하지 못 한 걸요. 그날 밤 학생들이 색을 잘못 보았다 생각하는 건 어려운 걸까요? 그들이 누구를 보았는지도 알지 못 하는데요. 단 그 사람은 세로줄 옷 따위 입고 있지 않았을 겁니다. 물론 저도 아니었고요. 격자 틈으로 세로줄 유카타를 떠올린 당신의 착안은 제법 재미있지만 너무 짜 맞추기 같군요. 적어도 그런 우연의 일치보다는 제 결백을 믿어주셨으면 하는데요. 그럼 마지막으로 국숫집의 화장실을 빌린 남자로군요. 이건 저도 같은 생각입니다. 그 아사히야 말고는 범인이 오갈 통로가 없겠지 싶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그곳을 조사해봤는데 아쉽게도 당신하고는 정반대의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화장실을 빌린 남자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던 거죠."

 독자들도 깨달았을까. 아케치는 이렇게 증언을 부정하고, 범인의 지문을 부정하고, 범인의 통로마저 부정해 자신의 무죄 증거로 만들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범죄 그 자체를 부정하는 것처럼도 들렸다. 나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조금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당신은 범인을 아신다는 건가요."
"알고 있죠." 그는 머리를 산발로 만들며 대답했다. 제 방식은 당신과 조금 다릅니다. 물질적인 증거는 해석 차이에 따라 얼마든지 갈라지지요. 가장 좋은 조사법은 심리적으로 상대의 마음 밑바닥을 간파하는 것입니다. 다만 이건 탐정 본인의 능력 문제라서요. 어찌 됐든 저는 이번에 그런 방향에 중점을 두고 조사를 했습니다.
 가장 먼저 제 주의를 끈 것은 고서점 안주인의 온몸에 난 상처였죠.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국숫집 안주인도 같은 상처를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건 그쪽도 알지요? 다만 두 사람의 남편은 그리 난폭하지도 않다는 듯합니다. 고서점이든 국숫집이든 얌전하고 분간할 줄 아는 남자이니까요. 저는 바로 그 점에 비밀이 숨어 있는 거 아닐까 의심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먼저 고서점 주인을 잡아 그 입에서 비밀을 드러내려 했죠. 제가 죽은 아내분의 지인이라니 어느 정도 마음을 열어주셔 비교적 간단했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상한 사실을 들을 수 있었죠. 그리고 이번에는 국숫집 주인인데, 그는 그리 봬도 꽤나 견실한 남자라 파고드는 게 꽤나 고생이었습니다. 그래도 뭐, 저는 어떤 방법으로 잘 성공했습니다만. 
 당심도 심리학의 연상 진단법이 범죄 조사 방면에도 이용되기 시작한 걸 알고 있지요? 간단하고 많은 자극어를 제시하여 용의자의 반응 속도를 재는 법말입니다. 꼭 심리학자 같은 개니 집이니 강 같은 간단한 자극어에 한정될 필요도 없고, 꼭 크로노 스코프의 도움이 필요한 것도 아니라 생각합니다. 연상진단법의 요령을 깨달은 자에게는 그런 형식은 크게 필요가 없죠. 그 증거로 과거에 명판사나 명탐정이라 불렸던 사람들은 심리학이 오늘처럼 발달하기 전부터 그저 천성을 따라 자신도 알지 못 하는 사이에 이 심리적 방법을 실행하였으니까요. 오오카 에치젠도 그중 한 사람이랍니다. 소설에서 들자면 에드거 앨런 포의 '모르그 가 살인사건'의 시작 부분에 뒤팽이 친구의 몸집 하나로 그가 생각하는 걸 알아맞히는 부분이 있죠. 코난 도일도 그걸 흉내 내 '장기 입원 환자'에서 홈즈에게 같은 추리를 하게 했죠. 이 모든 것들이 어떤 의미에서는 연상 진단법이니까요. 심리학자들의 기계적인 방법은 이런 천부적인 통찰력을 지니지 못 한 평범한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진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야기가 옆으로 샜군요. 저는 그런 의미에서 국숫집 주인을 향해 일종의 연상 진단법을 해본 겁니다. 저는 그에게 수많은 말을 했습니다. 그것도 지독히 지루한 세상 이야기를요. 그리고 그의 심리적 반응을 연구했습니다. 단 이건 매우 개인적인 심리 문제이고 꽤나 복잡하니 자세한 것은 천천히 이야기토록 하고, 어찌 됐든 그 결과 저는 하나의 확신에 이르렀습니다. 즉 범인을 찾은 거지요.
 다만 물질적 증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니 경찰에 신고할 수도 없는 노릇이죠. 만약 신고하더라도 받아 주지 않을 겁니다. 게다가 제가 범인을 알면서 뒷짐 지고 지켜보는 또 하나의 이유는, 그 범죄에 조금의 악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말로 하면 이상한데 이 살인 사건은 범인과 피해자의 동의 하에 이뤄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피해자 자신의 희망으로 이뤄진 것일지도 모르죠."
 나는 이런저런 상상을 해보았지만 도무지 그의 생각을 알 수 없었다. 내 실수를 부끄러워하는 것도 잊고, 그의 괴상한 추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럼 제 생각을 말해보죠. 살인자는 아사히야의 주인입니다. 그는 흔적을 감추기 위해 화장실을 빌린 남자에 대해 말한 겁니다. 다만 그건 그가 생각한 게 아닙니다. 저희가 잘못한 거죠. 당신이든 저든 그런 남자가 없었냐 캐물으며 교사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게다가 그는 저희를 형사나 무언가로 착각한 모양입니다. 그럼 그는 왜 살인을 범했는가……저는 이번 사건으로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이 세상 뒤편에 얼마나 예상치 못 한 음험한 비밀이 숨어 있는지 발견한 것만 같았습니다. 진실은 그야말로 악몽 속 세계에서나 찾아 볼 법한 종류였죠.
 아사히야의 주인은 사드 후작 같은 지독한 사디스트, 가학성애자였던 거지요. 무슨 운명일까요. 마침 한 블록 옆에 마조히스트 여자를 발견하고 만 것입니다. 고서점의 안주인은 그에게 지지 않는 피학성애자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런 환자 특유의 교묘함으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고 불륜을 저지른 겁니다. ……이제 합의의 살인이라는 말을 이해하시겠나요?……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자신들의 남편과 아내에게서 그 병적인 욕망을 간신히 충족시켜 왔지요. 고서점의 안주인도, 아사히야의 안주인도 같은 상처를 한 게 그 증거입니다. 다만 그들이 그걸로 만족할 수 있었을까요? 그러니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서 서로가 추구하던 사람을 발견한 순간, 그들 사이에는 매우 빠른 이해관계가 성립해버렸죠. 그런 상상은 어렵지 않을 듯합니다. 하지만 그 결과는 그야말로 운명의 장난. 두 사람의 천성과 행동이 더해져 광기는 끊임없이 증가해 갔던 것입니다. 그리고 끝내 그날 밤, 둘도 결코 바라지 않았을 사건이 벌어지고 말았죠……"
 나는 아케치의 이상한 결론을 듣고 그만 몸부림쳤다. 이건 엄청난 사건이로군!
 그때, 담배집 주인이 석간을 가지고 왔다. 아케치는 신문을 받아 사회면을 펼쳤고, 이윽고 한숨을 내쉬었다.
"아아, 끝내 버틸 수 없다 생각했는지 자수했군요. 묘한 우연이군요. 마침 이 이야기를 한 차에 이런 보도를 접할 줄이야."
 나는 그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작은 지면이 할애된 열 줄 짜리 기사로, 국숫집 주인이 자수했다는 요지가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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