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후키야 세이치로가 왜 앞으로 기록할 무서운 나쁜 짓을 떠올리게 되었는가. 그 동기는 자세히 알지 못 한다. 설령 안다고 하여도 이 이야기하고는 큰 관계가 없다. 그가 반쯤 고학에 가까운 형태로 어떤 대학을 다닌 점을 고려하면 학자금에 쫓긴 것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는 보기 드문 천재이자 뛰어난 노력가였던 만큼, 학자금을 위한 지루한 돈벌이에 시간을 빼앗겨 좋아하는 독서나 고찰에 할애할 여유를 얻지 못 해 매우 아쉬워한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인간이 그 정도 이유로 그런 큰 죄를 범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그는 선천적인 악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학자금뿐만 아니라 다양한 욕망을 갖추었던 것일 수도 있다. 어찌 되었든, 그가 그러한 발상을 떠올린지 벌써 반 년이 되었다. 그동안 그는 수도 없이 고민하고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결과, 끝내 해내기로 결심한 것이다.
어느 날, 그는 자그마한 인연으로 사이토 이사무라는 동급생과 친해지게 되었다. 그게 사건의 발단이었다. 물론 당초에는 아무런 생각도 없었다. 그러나 도중부터 그는 어떤 어슴푸레한 목적을 품고 사이토에게 접근하기 시작했다. 후키야가 사이토에게 가까워질수록, 그 어슴푸레한 목적도 차츰 확실해져 갔다.
사이토는 일 년 전부터 고지에 위치한 어떤 썰렁한 주택가에 하숙집 하나를 두고 있었다. 그 집 주인은 관리의 미망인으로, 예순에 가까운 노파였다. 먼저 떠난 주인이 남기고 간 몇 채의 셋집이면 생활은 곤란하지 않았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조차 가지지 못 한 그녀는 "믿을 건 돈 밖에 없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믿을만한 지인에게 소액을 대출해주는 식으로 저금을 늘려가는 걸 둘도 없는 즐거움으로 삼았던 것이다. 사이토에게 방을 빌려준 것도 여자 혼자 살아서야 불안하다는 이유도 있었을 테지만, 한 편으로는 다달이 들어오는 월세만으로도 저금액을 늘릴 수 있다는 타산 또한 섞여 있었음이 분명했다. 또한 그녀는 표면적인 은행 예금 외에도 막대한 현금을 은밀히 보관한, 그야말로 시대착오적인 공간을 지녔다는 소문이 향간을 떠돌았다. 수전노의 심리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비슷비슷한 것이겠지.
후키야는 그 돈에 이끌리고 만 것이다. 그런 늙은이가 그 큰돈을 품고 있어봐야 무슨 의미가 있으랴. 자신 같은 장래 유망한 청년의 학자금에 사용하는 편이 지극히 합리적이지 않은가. 간단히 말하자면 이것이 그의 논리였다. 고로 그는 사이토를 통해 노파에 관한 지식을 얻으려 했다. 돈이 숨겨진 비밀 장소를 찾으려 했다. 하지만 그 또한 사이토가 어느 날 우연찮게 그 장소를 발견했다는 말을 듣기 전까지는 꼭 그런 생각만 품었던 것은 아니었다.
"참 대단한 노친네셔. 보통 돈을 숨겨봐야 엔가와 밑이니 천장 뒤편처럼 흔해 빠진 장소기 마련이잖아? 그 양반은 조금 독특한 곳에 숨겨 놨더라고. 안방 토코노마에 커다란 단풍 분재가 놓여 있지? 그 화분 밑바닥에 숨겨 놓은 거였어. 어떤 도둑이 설마 분재에 돈이 숨겨져 있을 거라 생각하겠어? 그 할머니는 그야말로 천제 수전노야."
그때, 사이토는 그렇게 말하며 재밌다는 양 웃었다.
그 이후로 후키야의 생각은 조금씩 구체적으로 변해 갔다. 노파의 돈을 자신의 학자금으로 바꿀 경로 하나하나에 갖은 가능성을 상정하여 가장 안전한 방법을 떠올리려 했다.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어떤 복잡한 산수 문제라도 이보다는 못 할 것 같았다. 방금도 말한 것처럼, 그는 생각을 정리하는 데에만 반 년을 소모해버린 것이다.
난점은 말할 것도 없이 어떻게 형벌을 피하는가. 윤리 상의 장애, 요컨대 양심의 가책 따위 후키야에게는 큰 문제도 아니었다. 그는 나폴레옹 같은 대규모 살인이 범죄라 여겨지고 않고 되려 찬미 받는 것처럼, 재능 넘치는 청년의 능력 향상을 위해 관에 한 발을 걸친 늙은이가 희생되는 정도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라 여긴 것이다.
노파는 외출이 드물었다. 종일 묵묵히 안방을 차지하였다. 이따금 외출을 하더라도 자리를 비울 때면 촌뜨기 여종이 시종일관 정직하게 집을 지켰다. 후키야의 갖은 고심에도 불구하고 노파의 조심성에는 조금의 틈도 없었다. 노파와 사이토가 없는 시간을 틈타, 여종을 속여 심부름이든 뭐든 보내버리면 그 틈에 분재를 들어 올려 훔칠 수 있지 않을까. 당초 후키야는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보았다. 실제로는 무분별한 생각일 뿐이었다. 가령 잠깐이라도 그 집에 홀로 남았다는 게 알려지면 지극히 간단히 혐의를 받기 마련이지 않은가. 이렇듯 후키야는 그런 다양하고 어리석은 방법을 생각했다 떨치고 생각했다 떨치는데 한 달을 고스란히 소모했다. 예를 들어 사이토나 여종, 혹은 평범한 도둑이 훔친 것처럼 꾸며진 트릭이니, 여종 혼자 있을 때에 소리도 없이 숨어들어 눈에 들지 않고 훔치는 방법이니, 달리 떠오를만한 갖은 상황을 떠올려 본 것이다. 하지만 하나같이 발각의 가능성을 크게 내포하고 있었다.
결국 노파를 치울 수밖에 없다. 그는 끝내 그런 무서운 결론에 이르렀다. 노파가 돈을 얼마나 쌓아 두었는지는 몰라도 여러 관점에서 생각해볼 때, 살인의 위험마저 범할 정도로 집착할만한 큰돈 일 것 같지는 않았다. 몇 푼 안 되는 돈을 위해 아무 죄 없는 사람을 죽인다니 너무나 가혹한 일이지 않을까. 물론 가령 세간의 기준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라도, 가난한 후키야에게는 충분히 만족스러운 돈이었다. 하물며 그의 사고방식에 따르자면 문제는 금액의 크기가 아닌 범죄의 발각 가능성을 완전히 죽여놓는 것이었다. 그걸 위해서라면 아무리 큰 희생을 치르더라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살인은 얼핏 단순한 절도보다도 몇 배는 위험한 일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런 건 일종의 착각에 지나지 않는다. 그야 발각될 것을 예상한 채 저지르는 것이라면 살인은 갖은 범죄 중에서도 가장 위험할 게 분명하다. 단지 범죄의 경중보다도 발각의 어려움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경우에 따라서는(예를 들어 후키야의 경우 같아서는) 되려 절도 쪽이 위험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반면에 목격자를 처리하는 방법은 잔혹한 대신 걱정거리가 없다. 옛날부터 위대한 악인은 아무렇지 않게 사람을 죽여왔다. 그들이 쉽게 잡히지 않은 것은 되려 그런 대담한 살인 덕택은 아닐까.
그럼 노파를 해치운다 하면 과연 위험하지 않을까. 후키야는 그 문제에 직면하여 다시 몇 달 동안 생각에 잠겨야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그가 어떤 생각을 키워 왔는가. 이야기가 진행됨에 따라 독자도 차츰 알게 될 테니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어찌 되었든, 그는 평범한 사람은 미처 따라하지 못 할 정도로 자잘한 분석과 종합을 거듭한 결과 먼지 한 톨 빠져 나갈 수 없는 절대적이고 완전한 방법을 떠올려 낸 것이었다.
이제는 그저 적절한 시기가 찾아 오기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어느 날, 사이토는 학교 문제로, 여종은 심부름을 나가 두 사람 모두 저녁 때까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는 게 확인된 것이다. 마침 후키야가 마지막 준비를 끝낸지 이틀째가 되는 날이었다. 그 마지막 준비라는 것은(이것만은 미리 설명해둘 필요가 있다) 이전 번에 사이토에게 돈을 숨겨 둔 위치를 들은 이후로 반 년이나 지나버린 현재, 돈이 여전히 자리에 남아 있는지 확인하는 것이었다. 후키야는 그 날(즉 노파를 죽이기 이틀 전), 사이토를 찾는 겸하여 처음으로 노파의 방인 안방에 들어 서 그녀와 별다를 것 없는 세상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이야기를 서서히 한 방향으로 끌고 갔다. 요컨대 노파의 재산에 관한 이야기. 그녀가 어딘가에 돈을 숨겨 놓았다는 소문을 입에 올린 것이다. 그는 "숨긴다'는 말이 나올 때마다 은근히 노파의 눈을 주시했다. 그러자 그녀의 눈은 후키야의 예상처럼 도코노마의 분재(그때는 단풍이 아닌 소나무가 심어져 있었지만)로 향한 것이다. 후키야는 그런 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의심할 여지는 조금도 없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2
드디어 당일이 되었다. 그는 대학의 정복과 정모 위에 학생 망토를 두르고 흔해 빠진 장갑을 찬 채 목적지로 향했다. 그는 한껏 생각한 끝에 결국 변장하지 않기로 결정한 것이다. 괜히 변장을 했다가는 재료 구입, 옷을 갈아입을 장소 등 수많은 요소가 범행 발각의 증거로 남아 버리고 만다. 그래서야 일을 불필요하게 복잡하게 만들 뿐, 대단한 효과도 얻지 못 하는 것이다. 범죄 방법이란 발각의 우려가 없는 범위 안에서는 되도록 단순하며 뻔해야 한다는 게 그가 가진 유일한 철학이었다. 요컨대 범행 장소에 들어가는 것만 누가 보지 않으면 그만. 가령 집 앞을 지난 것 정도는 들켜도 별지장이 없다. 그는 이 근처를 자주 산책하고는 하니까 그날도 마찬가지였다며 잡아뗄 수 있다. 동시에 만에 하나 범행 장소로 가던 도중에 지인을 만나게 될 경우(이것만은 어떻게든 상정 범위 안에 넣어둬야 했다) 묘한 변장을 하는 편이 좋은가, 평소처럼 정복에 정모를 하고 있는 편이 좋은가. 생각해 볼 필요나 있을까. 범죄 시간도 그랬다. 밤까지 기다리면 사이토도 여종도 자리를 비운다는 걸 알면서 왜 일부러 위험한 낮 시간대를 택했는가. 복장과 마찬가지로 불필요한 비밀성을 배제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막상 목적지 앞에 섰을 대에 한해서는 아무리 그라도 평범한 도둑처럼, 아니 아마 그들 이상으로 움찔움찔 몸을 떨며 전후좌우를 둘러보았다. 노파의 집은 양옆으로 산울타리를 둔 단독 주택이며 반대편에는 어떤 부호의 저택을 지키는 높은 콘크리트 울타리가 줄곧 이어져 있다. 썰렁한 주택가인 만큼 낮 시간대에도 곧잘 행인을 찾아 볼 수 없게 된다. 후키야가 집에 이르렀을 때에도 운 좋 개 한 마리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하게 열면 엄청나게 큰 금속음을 내는 격자문을 살금살금 소리 없이 열어 갔다. 그리고 현관 앞에서 지독히 작은 목소리로(옆집을 속이기 위함이었다) 안내를 부탁했다. 노파가 나오자, 그는 사이토에 관해 은밀히 할 이야기가 있다는 구실을 들어 안방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하필 여종이 자리에 없어서 말이죠."하고 운을 뗀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나 차를 끓이러 향했다. 후키야가 이제야 저제야 기다리던 기회였다. 그는 노파가 후스마를 열기 위해 몸을 자시 낮춘 틈을 타 뒤에서 달려들어 양팔에(장갑은 했지만 되도록 손가락 흔적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힘을 한껏 담아 목을 졸랐다. 노파는 목에서 귀에 거슬리는 둔탁한 목소리만 낼 뿐 큰 저항도 하지 못 했다. 다만 괴로움에 하늘을 붙들던 손가락 끝에 마침 근처에 놓여 있던 병풍에 닿아 약간의 상처를 내버렸다. 두 장으로 이루어진 세월이 느껴지는 금병풍으로, 극채색의 육가선이 그려져 있었는데, 오노노 코마치의 얼굴 부분이 무참히도 찢어져 버린 것이었다.
노파가 숨을 거둔 것을 확인한 후키야는 시체를 옆으로 눕혀두었다. 가장 먼저 마음에 걸린 건 찢어진 병풍이었다. 하지만 막상 뚫어져라 잘 바라보니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이런 게 증거가 될 리도 없는 것이다. 고로 목표였던 토코노마로 향해 소나무를 붙들고 흙과 뿌리째로 뽑아버렸다. 예상대로 그 밑바닥에는 기름종이로 이루어진 봉투가 담겨 있었다. 그는 침착히 포장을 풀고는 오른 주머니에서 새로 구한 대형 지갑을 꺼냈다. 지폐 절반가량(오천 엔은 족히 되었다)을 그 안에 넣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고, 남은 지폐는 기름 봉투로 싸 분재 밑에 돌려놓았다. 물론 이건 돈을 훔쳤다는 상황 증거를 흔들기 위함이었다.
그 후, 그는 방에 있던 방석을 노파의 가슴에 얹고(피가 튀지 않도록 꾸민 것이다) 왼쪽 주머니에서 꺼낸 잭 나이프를 심장을 향해 푹 찔러 넣었다. 안에서 한 번 비튼 후 뽑아낸다. 이번에는 방석 천으로 나이프의 피를 깔끔하게 닦아내고는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교살만으로는 자칫 의식을 되찾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요컨대 마무리를 지었다 봐야겠지. 그럼 왜 처음부터 날붙이를 쓰지 않았는가. 혹여라도 옷에 피가 튀는 것을 피하기 위함이었다.
여기서 한 번 그가 사용한 지갑과 잭나이프에 관해 설명해둬야겠다. 후키야는 그러한 물건들을 오로지 이 순간만을 위해 구비해두었다. 어느 장날, 그는 가장 붐비는 시간, 가장 손님이 많은 가게를 택했다. 미리 준비한 정확한 금액으로 물건을 받들고는, 상인은 물론이요 손님들의 기억에도 남지 않을 정도로 매우 빠르게 모습을 감추었다. 그리고 양쪽 모두 특별히 인상에 남지 않을 지극히 흔해 빠진 물건으로 골라왔다.
그렇게 후키야는 조금의 증거도 남지 않도록 자세히 확인한 후, 후스마를 닫는 것도 빼먹지 않고 느긋이 현관으로 나왔다. 신발 끈을 묶으면서는 발자국을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본다. 다만 크게 걱정할 것은 없을 듯했다. 현관은 단단한 회반죽으로 이루어졌고, 바깥은 요 며칠간의 좋은 날씨로 바짝 말랐지 않은가. 이제는 격자문을 열고 밖에 나서는 것만 남았다. 물론 여기서 실수해서야 모든 노력이 물거품이 되겠지. 그는 가만히 귀를 기울이며 참을성 좋게 바깥 길가의 발소리를 들으려 했다. ……적막한 것이 이렇다 할 인기척은 없다. 어디선가 거문고를 튕기는 소리만이 느긋하게 들려올 따름. 마음을 굳힌 후키야는 조용히 격자문을 열었다. 그리고 아무렇지 않게 막 볼일을 마친 손님의 얼굴을 하고서 길가로 나왔다. 예상대로 인기척은 없었다.
그 주변은 어느 길이나 썰렁한 주택가였다. 노파의 집에서 네다섯 블록쯤 떨어진 아무개 신사의 오래된 돌 울타리가 길 한 면에 쭉 이어져 있었다. 후키야는 아무도 보지 않는 걸 확인하고는 돌 울타리 틈새로 잭나이프와 피가 묻은 장갑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산책 때면 익히 들리던 근방의 작은 공원을 향해 터덜터덜 걸었다. 그는 공원 벤치에 앉아 그네 타는 아이들의 모습을 참으로 느긋하게 바라보며 오랜 시간을 보냈다.
돌아가는 길, 그는 경찰서를 찾았다.
"오늘 이 지갑을 주웠습니다. 꽤나 많은 돈이 들어 있더군요. 맡겨도 될까요?"
그렇게 말하며 노파의 돈을 주워 담은 지갑을 꺼낸 것이다. 그는 순사의 질문에 주운 장소와 시간(물론 가능성이 있는 엉터리였다) 자신의 신원(이쪽은 진짜였다)을 대답했다. 그렇게 인쇄된 종이에 그의 이름과 금액 등을 적은 영수증 같은 것을 받았다. 오호라, 이는 꽤나 멀리 돌아가는 길이다. 다만 안전성으로는 최상이리라. 노파의 돈은(절반이 되었다는 건 아무도 몰라도) 본래 위치에 남아 있으니, 이 지갑의 주인이 나타날 리가 없다. 일 년 후에는 틀림없이 후키야의 손에 떨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조금도 개의치 않고 거창하게 사용할 수 있다. 후키야는 수많은 고심 끝에 이 수단을 택했다. 괜히 어딘가에 숨겨두었다가는 우연찮은 계기로 남에게 뺏길지도 모를 일. 그렇다고 직접 들고 다니는 건 위험하기 짝이 없다. 반면 이 방법이라면 만에 하나 노파가 지폐의 고유 번호를 다 적어두었다 해도 걱정할 게 없는 것이다.(물론 이는 극단적인 예상이니 꽤나 안심하고 있다지만.)
"설마 제가 훔친 걸 경찰에 전달하는 녀석이 있을 거라고는 부처님도 생각 못 하시겠지."
후키야는 웃음을 죽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음 날. 후키야는 하숙방에서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간에 일어났다. 하품을 하며 배게맡에 배달된 신물을 펼쳐 사회면을 둘러본다. 생각지 못 한 사실을 보고 크게 놀랐다. 하지만 결코 걱정할만한 사안은 아니었고, 되려 예상치 않은 도움이 될만한 일이었다. 친구인 사이토가 용의선상에 오른 것이다. 혐의를 받은 이유는 그가 출처 불명의 거금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 기술되어 있었다.
"나는 사이토하고 가장 친한 친구니까 경찰에 출두해서 증언하는 게 자연스럽겠지."
후키야는 재빨리 옷을 갈아입고는 황급히 경찰서로 향했다. 어제 후키야가 지갑을 전달해준 곳이었다. 왜 지갑을 다른 관할서에 전달하지 않았는가. 아니, 이것 또한 후키야 특유의 무가공주의를 따라 일부러 택한 일이었다. 그는 과하지 않을 정도로 걱정스러운 얼굴을 꾸미고는 사이토와 만나게 해달라 청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허락받지 못 했다. 그는 사이토가 혐의를 받은 이유 등을 물어 어느 정도까지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후키야는 다음처럼 상상했다.
어제, 사이토는 여종보다 먼저 귀가했다. 후키야가 목적을 이루고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참이다. 당연히 노파의 시체도 발견한다. 하지만 경찰에 바로 신고하기 전에 어떤 것을 떠올렸을 게 분명하다. 분재 말이다. 만약 도적이 벌인 짓이라면 저 안의 돈이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아마 아주 잠깐의 호기심이었으리라. 그는 분재를 조사했다. 하지만 의외로 돈은 포장되어 똑똑히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걸 본 사이토가 나쁜 마음을 든 것은 아주 얕은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숨겨둔 장소는 아무도 모르는 데다가, 노파를 죽인 범인이 훔쳤다 해석될 게 분명할 테니까. 이런 일은 누구라도 피하기 어려운 강한 유혹을 느낄 게 분명하다. 그는 어떻게 했는가. 경찰의 말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사람이 죽은 걸 경찰에 알렸다고 한다. 심지어 생각이 얼마나 얕았는지 훔친 돈을 복대 사이에 넣은 채 마냥 쫄래쫄래 걸어온 것이다. 설마 그 자리에서 신체검사를 당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한 채.
"잠깐만. 그 녀석 대체 어떻게 변명할 거지? 경우에 따라서는 위험해질 거 같은데." 후키야는 이래저래 생각해보았다. 그는 돈이 발견되었을 때, "내 돈이다"하고 대답했을지 모른다. 노파의 재산은 막대해도 숨겨둔 장소는 아무도 모르니 당장은 성립될지 모른다. 하지만 돈이 지나치게 많지 않은가. 그는 결국 사실을 밝힐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재판에서 그게 받아들여질까. 다른 용의자가 나오면 모를까, 그전까지는 무죄로 도망칠 수도 없을 것이다. 잘 풀리면 그가 살인죄까지 뒤집어 쓸지 모른다. 그렇게만 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지만……재판관이 그를 문책하는 사이에 이런저런 사실이 밝혀질 터이다. 이를테면 돈을 숨겨둔 장소를 내게도 이야기했다던가, 흉행 이틀 전에 내가 노파의 방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다던가, 나아가서는 자신이 빈곤해 학자금에도 궁해한다는 것까지도.
하지만 전부 후키야가 계획을 세우기 전에 미리 상정 범위에 넣어둔 것들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생각해도 사이토의 입에서 그 이상 불리한 사실이 끌려 나올 것 같지는 않았다.
경찰에서 돌아온 후키야는 뒤늦은 아침을 먹고(그때 밥을 가져온 여종에게 사건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언제나처럼 학교로 향했다. 학교는 사이토의 소문으로 들썩거렸다. 그는 꽤나 의기양양이 소문의 중심에 서 입을 떠벌렸다.
3
자, 독자 제군. 탐정 소설의 성질에 통달한 제군이라면 이야기가 이런 곳에서 끝나지 않을 거란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을 터이다. 당연한 이야기다. 사실 여기까지는 이야기의 전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작가가 정말로 읽기 바라는 것은 이 이후의 이야기다. 요컨대 열심히 꾸민 후키야의 범죄가 어떻게 발각되는가, 하는 것이다.
이 사건을 담당한 예비판사는 유명한 카사모리 씨였다. 그는 평범한 의미로 통하는 명판사였을 뿐만 아니라, 제법 독특한 취미를 가진 덕에 한 층 더 유명했다. 그는 일종의 아마추어 심리학자로, 평범한 방법으로는 도무지 판단을 내릴 수 없는 사건에 한해 마지막으로 그 풍부한 심리학상 지식을 이용해 꽤나 많은 공적을 올렸다. 그는 경력이 얕고 나이는 젊었음에도 지방재판소 제일의 예비 판사로서는 부족함이 없을 정도의 수재였다. 이번 노파 살인 사건도 카사모리 판사의 손에 들어가면 곧 해결되리라 모두가 생각했다. 당사자인 카사모리 씨 본인 또한 같은 생각을 하였다. 언제나처럼 예비심에서 확실히 조사하여 공판 때에 어떤 귀찮은 일도 없도록 처리하려 했다.
하지만 취조를 진행함에 따라 사건의 곤란한 면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경찰서는 단순히 사이토의 유죄를 주장했다. 카사모리 판사 또한 그 주장에 일리가 있음을 인정해야 했다. 생전 노파의 집에 출입한 흔적이 있는 자들은, 채무자든, 세입자든, 단순한 지인까지 남김없이 소환해 면밀히 조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 하나 수상쩍은 사람이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키야 세이치로도 물론 그중 한 명이었다. 달리 용의자가 나타나지 않는 이상 가장 의심스러운 사이토를 범인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이토에게 가장 불리했던 것은 그가 천성적으로 성미가 유약해 법정의 분위기에 금세 겁을 먹고 심문에도 똑바로 대답하지 못 했다는 것이었다. 혼란스러웠던 그는 이전의 진술을 번복하거나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잊거나, 분명히 불리한 진술을 하는 둥, 서두르면 서두를수록 되려 더 큰 의심만 살 뿐이었다. 사이토는 제법 머리가 좋은 사람이다. 만약 노파의 돈을 훔쳤다는 약점만 없었다면 설령 마음이 약해졌어도 그런 실수는 하지 않았으리라. 그는 매우 안타까운 상황에 놓였다 해야겠지. 그럼 사이토를 살인범으로 인정해야 할까. 아쉽게도 모리사카 씨에게는 그럴 자신이 없었다. 사이토에게는 그저 그런 의혹이 있을 뿐이었다. 본인은 결코 자백하지 않았고, 달리 이렇다 할 확증도 얻지 못 했다.
그렇게 한 달이 흘렀다. 예비심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판사는 조금 조급해졌다. 마침 그때, 노파 살인 사건의 관할 경찰 서장이 그에게 좋은 보고 하나를 올렸다. 사건 당일, 오천이백몇십 엔이 들어간 지갑 하나가 노파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견되었는데, 그 습득자가 용의자 사이토의 친구인 후키야 세이치로라는 학생이라는 것이 관계자의 소홀로 오늘에 와서야 밝혀졌다는 것이다. 그런 거금을 잃은 사람이 한 달 지난 지금까지 나타나지 않은 걸 보면 뭔가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고 혹시 몰라 보고를 올린다는 내용이었다.
곤란해하던 카사모리 판사는 그 보고가 한 줄기 광명처럼만 느껴졌다. 바로 후키야 세이치로 소환 절차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의기양양했던 판사의 생각과 달리 후키야의 심문으로도 큰 수확은 얻어내지 못 했다. 왜 사건 당시 조사 때 거금을 습득한 사실을 밝히지 않았냐는 질문에, 그는 그 일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 못 했기 때문이라 대답했다. 그럴싸한 대답이었다. 노파의 재산은 사이토의 복대 안에서 발견되지 않았나. 그 이외의 거금이, 특히 길가에서 발견된 돈이 노파의 재산 중 일부라 누가 상상이나 하겟는가.
하지만 이게 우연일 수 있을까. 사건 당일 현장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심지어 제1용의자의 친구라는 남자가(사이토의 진술에 따르면 그 또한 분재의 밑에 돈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만한 거금을 주었다는 게 정말로 우연일 수 있을까. 판사는 분명 무언가의 의미가 있으리라 괴로워했다. 판사가 가장 안타까워한 것은 노파가 지폐의 일련번호를 적어두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그것만 있다면 이 수상쩍은 돈이 사건에 관련이 있는지 바로 알 수 있을 터이거늘.
"아무리 작은 거라도 좋아. 뭔가 확실한 단서 하나만 있으면 되는데." 판사는 모든 재능을 기울여 생각했다. 현장 취지도 몇 번이나 거듭했다. 노파의 친족 관계도 충분히 조사했다. 역시 이렇다 할 수확은 없었다. 그렇게 다시 한 번 보름 정도가 지났다.
판사가 떠올린 단 하나의 가능성. 그건 후키야가 노파의 저금을 절반가량 훔쳐, 절반은 본래 위치에 돌려놓고 훔친 돈을 지갑에 넣어 길가에서 주운 것처럼 꾸몄다 추정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 지갑도 조사해보았지만 이렇다 할 증거는 찾아볼 수 없었다. 하물며 후키야는 아무렇지 않게 당일 산책 겸 노파의 집 앞을 지났다 진술하지 않았나. 범인이 이런 대담한 말을 할 수 있을까. 애당초 가장 중요한 흉기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후키야의 하숙방도 수색해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게다가 흉기를 찾을 수 없는 것은 사이토 또한 마찬가지. 대체 누구를 의심해야 한단 말인가.
확증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다. 서장이 말하는 것처럼 사이토를 의심하면 사이토가 범인인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후키야도 의심스러운 건 사실. 하나 알 수 있는 것은 이 한 달하고도 보름간의 조사 결과 그 둘을 제외하고는 새로운 용의자를 찾을 수 없었다는 점이었다. 달리 방법이 없다 판단한 카사모리 판사는 드디어 비장의 카드를 쓸 때가 되었다 생각했다. 그는 두 용의자에게 이제까지 수없이 성공해 온 심리 시험을 해보자 결심한 것이다.
4
후키야 세이치로는 사건의 며칠 뒤 첫 소환을 받았을 때, 담당 예비 판사가 유명한 아마추어 심리학자인 카사모리 씨라는 걸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이미 자신이 끝내 처하게 될 상황을 예상하여 적지 않게 당황했다. 아무리 후키야라도(제아무리 개인의 취미라도) 일본에서 심리 시험이 이뤄질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기 때문이다. 그는 여러 책을 통해 심리 시험이 무엇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대타격에 후키야는 아무렇지 않게 학교를 다니를 여유를 잃고 병이라 둘러댄 채 하숙방에 틀어박혔다. 그대로 이 난관을 대체 어떻게 이겨내야 할지 만을 생각했다. 살인을 실행하기 전에 생각에 잠긴 것처럼, 혹은 그 이상으로 세밀히 그리고 열심히 생각해 갔다.
카사모리 판사는 어떻게 심리 시험을 진행할까.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고로 후키야는 자신이 아는 방법을 전부 떠올려 그 하나하나를 어떻게 대책해 갈 수 없지 않을까 생각해 보았다. 물론 심리 시험이란 것 자체가 거짓 증언을 밝히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니 그 위에 거짓을 덧씌운다는 게 이론적으로 불가능해 보이기는 했다.
후키야가 생각하기를 심리 시험은 크게 두 개의 성질로 구분할 수 있었다. 하나는 순수한 생리 반응. 또 하나는 말을 통해 이뤄지는 것. 전자는 시험자가 범죄와 관련된 수많은 질문을 하여 피험자의 몸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반응을 적당한 장치를 통해 기록하여 평범한 심문으로는 절대 알 수 없는 진실을 얻어내는 방법이다. 인간이 설령 말과 표정으로 거짓말을 해도 신경의 흥분을 숨기지 못 해, 아주 작은 반응이라도 몸을 통해 드러난다는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예를 들어 자동운동 기록기 등의 힘을 빌려 손의 미세한 움직임을 발견하는 방법, 어떤 수단을 통해 안구의 움직임을 확인하는 방법, 호흡 운동 기록기로 호흡 속도를 재는 방법, 맥파 기록기로 맥박의 고저 속도를 재는 방법, 혈량계로 사지의 혈량을 재는 방법, 검류계를 통해 손바닥의 미세한 땀발산을 발견하는 방법, 무릎 관절을 가볍게 때려 근육 수축을 보는 방법 등 수많은 방법이 존재한다.
가령 불쑥 "네가 노파를 죽인 범인이지?"하고 묻는다면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시죠?"하고 대답할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 부자연스럽게 맥박이 높아지거나 호흡이 빨라지지는 않을까. 그걸 막는 방법은 절대 존재하지 않는 거 아닐까. 후키야는 다양한 방법을 상정하여 속으로 시험을 시뮬레이션 해보았다. 신기한 것은 자신을 향한 심문은 그게 제아무리 지독하고 허를 찌르는 내용이라도 육체상의 변화를 유발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야 사사로운 변화를 확인할 도구를 지닌 것도 아니니 확언은 할 수 없겠지. 그러나 신경 자체가 흥분하지 않는 이상, 그 결과인 육체상의 변화도 일어날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렇게 여러 실험이나 측량을 계속하는 사이, 후키야는 불쑥 어떤 생각에 이르렀다. 연습 자체가 심리 시험의 효과를 막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같은 질문을 하더라도 첫 번째보다는 두 번째가, 두 번째보다는 세 번째가 신경의 반응이 미약해지지는 않을까 했던 것이다. 요컨대 익숙해진다 해야겠지. 다른 다양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알 수 있는 것처럼, 꽤나 가능성이 높은 추측이었다. 스스로 진행한 심문에 반응이 없는 것도 같은 이유로, 심문을 하기 전에 스스로 예상해버리는 탓임이 분명했다.
고로 그는 사전 안에서 몇 만 단위의 단어를 하나도 남김없이 조사하여 심문에 사용될만한 말을 전부 적어내렸다. 그리고 일주일을 들여 단어들에 대한 신경 "연습"을 진행했다.
다음으로는 말을 통해 시험하는 방법이다. 이건 두려울 게 업다. 되려 말인 만큼 얼버무리기 쉬웠다. 다양한 시험 방법 중에서 가장 자주 이뤄지는 것은 정신분석가가 환자를 볼 때에 사용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 연상 진단이란 녀석이다. "미닫이"니 "책상", "잉크"나 "펜" 같은 특별하지 않은 단어를 몇 개인가 순서대로 읽어주고는, 되도록 빨리 조금도 생각지 않고 단어를 듣고 떠오른 말을 기록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미닫이"에는 "창문"이니 "안방", "종이", "문" 같은 것이 연상될 텐데, 무엇이든 상관없이 말을 들은 당시 문득 떠오른 말을 전하면 된다. 그리고 그런 의미 없는 단어 사이사이에 "나이프"나 "피", "돈", "지갑" 등 범죄와 관련된 단어를 몰래 섞어 넣어 그에 대한 연상을 조사하는 것이다.
이번 노파 살인 사건에 대해 대입해볼까. 생각이 얕은 자라면 "화분"라는 단어에 그만 "돈"이라 대답할지 모른다. "분제" 밑바닥에서 "돈"을 훔친 게 가장 인상 깊게 남아 있는 탓이다. 사실상의 범죄 자백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생각이 깊은 자라면 설령 "돈"이라는 말이 떠올라도 억눌러 죽인 후 "도자기"라 대답하리라.
그렇게 속임수 방지에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하나는 한 번 시험한 단어 일람를 조금 텀을 둔 후 한 번 더 반복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나온 대답은 대체로 차이가 없으나, 고의로 만든 답은 십중팔구 어긋나기 마련. 예를 들어 당초에는 "화분"에 "도자기"라 대답해놓고 두 번째에는 "흙"이라 대답하는 꼴이다
또 하나의 방법은 질문과 대답 사이의 시간을 어떤 장치로 정확히 기록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미닫이"에 "문"이라는 대답을 내놓는데 1초가 걸렸는데도, "화분"에 "도자기"라 대답하는 시간이 3초 걸렸다면(실제로 이렇게 단순하지는 않아도), "화분"을 듣고 처음 떠오른 연상을 억누르기 위해 시간을 들였다는 뜻이니 그 피험자가 수상하다는 게 된다. 이런 시간 차이는 당면의 단어에 떠오르지 않고 그다음에 이어진 의미 없는 단어에 나타나는 경우도 있다.
또한, 범죄 당시 상황을 자세히 들려주어 그걸 복창하게 하는 방법도 있다. 진범이라면 복창할 때에 미세한 점에서 들은 것과 다른 진실을 저도 모르게 입으로 흘려 버릴 때도 있는 것이다.(심리 시험을 이미 알고 있는 독자에게 너무나 너저분한 서술을 해버린 것을 사과하겠다. 하지만 만약 이걸 생략해서야 그 외의 독자가 이야기 전체를 애매하게 받아들여 버릴 수 있기에 정말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시험에 또한 이전과 마찬가지로 "연습"이 필요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겠지. 하지만 후키야는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있었다. 바로 순수할 것과, 괜한 잔재주를 부리지 않는 것이었다.
"화분"에는 되려 "돈" 내지는 "소나무"라 대답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 설령 범인이 아닌 사람이라도 판사의 취조나 다른 경로로 현장에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리고 화분 밑바닥에 돈이 있었다는 사실은 가장 최근에 들었고, 가장 인상 깊게 남을 테니까. 연상 작용이 그렇게 움직이는 건 지극히 당연하지 않을까.(또 이 수단은 현장 상황을 복창하는 경우에도 안전하다). 다만 문제는 시간 쪽이었다. 이것만은 진득히 "연습"할 수밖에 없다. "화분"이라 들으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돈" 내지는 "소나무"라 대답할 수 있도록 연습해둬야 한다. 후키야는 이 "연습"에 더욱이 며칠을 소모했다. 그렇게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한 편, 후키야는 또 하나의 유리한 상황을 상정에 넣어두었다. 그걸 생각하면 예상치 못 한 심문은 물론이고 예상한 심문에 불리한 반응을 보인다 한들 조금도 두려워할 게 없었다. 피시험자는 후키야 한 명이 아닌 것이다. 신경과민이 심한 사이토지 않은가. 제아무리 제가 한 일이 아니라도, 수많은 심문 사이에서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일까. 아마 그 또한, 적어도 후키야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 게 자연스럽지는 않을까.
그렇게 생각이 진행될수록 후키야의 마음도 조금씩 편해져 갔다. 어쩐지 콧노래라도 부르고 싶어졌다. 이제 와서는 카사모리 판사의 호출을 기다릴 지경이었다.
5
카사모리 판사의 심리 시험은 어떻게 이루어졌는가. 신경과민 사이토는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후키야가 얼마나 침착히 시험에 임했는가. 그런 구질구질한 서술을 늘어놓는 걸 피하고 곧장 그 결과만을 이야기하겠다.
심리 시험이 벌어진 다음 날의 일이었다. 카사모리 판사가 자택 서재에서 시험 결과를 정리한 서류를 앞에 두고 고개를 갸우뚱거리던 차에 아케치 코고로의 명함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D언덕 살인사건"을 읽은 자라면 이 아케치 코고로라는 남자가 어떤 인물인지 잘 알고 있을 터이다. 아케치는 그 사건 후, 어려운 범죄 사건에 수없이 관여하여 그 보기 드문 재능을 드러냈다. 이제는 전문가들은 물론이요 세간에서도 인정을 받는 인물이 된 것이다. 카사모리 씨 또한 어느 사건을 계기로 마음을 열게 되었다.
여종의 안내를 받은 아케치가 싱글싱글 웃는 상으로 판사의 서재를 찾았다. 이 이야기는 "D언덕 살인사건"으로부터 몇 년 지난 일로, 그는 이미 서생 딱지를 뗀지 오래였다.
"꽤나 힘들어 보이십니다."
아케치가 판사의 책상 위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거 참. 이번은 영 곤란하군요."
판사가 손님 쪽으로 몸을 틀며 말했다.
"노파 살인 사건이지요? 심리 시험 결과는 어땠습니까?"
아케치는 사건 이후로 카사모리와 빈번히 만나 사정을 주워듣던 중이었다.
"결과는 명백한데 말이죠." 그렇게 말하는 판사. "근데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더군요. 어제는 맥박 시험과 연상 진단을 해봤는데 후키야 쪽은 거의 반응이 없습니다. 물론 맥박 쪽에서는 꽤나 수상쩍은 부분도 있었습니다만 사이토에 비하면 문제 되지 않을 정도입니다. 이거 좀 보시죠. 여기에 질문 사항과 맥박 기록표가 있습니다. 사이토 쪽은 반응이 아주 현저하지요? 연상 시험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화분"이라는 자극어에 대한 반응 시간을 봐도 알 수 있죠. 후키야 쪽은 다른 무의미한 말보다 짧은 시간에 대답했는데 사이토 쪽은 어떻습니까. 육 초나 걸려버렸죠.
판사가 가리킨 연상 진단 기록은 다음과 같았다.
굵게 표시된 것은 범죄와 관련된 단어. 실제로는 백 개 가량의 단어를 두 그룹, 세 그룹 준비해 차례로 시험하지만 위쪽의 표는 알기 쉽게 간단히 정리해둔 것이다.
"어때요. 매우 명확하죠?" 판사는 아케치가 기록을 훑는 걸 기다리고는 말을 이었다. "이걸 보면 사이토가 이런저런 고의 가공을 하는 건 명백하죠. 가장 잘 알 수 있는 건 늦은 반응 속도지만 문제 단어는 물론이고 그 직후의 것이나 그다음 단어에게도 영향을 미쳤죠. 또한 "돈"에 "철"로 대답하거나 "훔치다"에 "말"로 대답하는 등 제법 연결되기 힘든 연상을 하고 있어요. "화분"에 가장 오래 걸린 것은 아마 "돈"이나 "소나무"라는 두 연상을 억누르기 위한 것이었겠죠. 반면 후키야 쪽은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화분"에 "소나무", "기름종이"에 "숨기다", "범죄"의 "살인"처럼 가령 범인이라면 반드시 숨겨야 하는 연상을 아무렇지 않게, 그것도 짧은 시간 만에 대답했죠. 그가 살인자가 맞는데 이런 반응을 보였다면 어지간한 저능아로 볼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그는 대학생이며 꽤나 재능도 뛰어난 모양이니까요."
"그렇게 볼 수도 있겠네요."
아케치는 골똘히 생각한 후 말했다. 판사는 아케치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조금도 알아차리지 못 하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말이죠. 이걸로 후키야 쪽은 의심할 여지가 없어졌지만 사이토가 정말 범인이 맞는지는 도무지 확신할 수 없더라고요. 시험 결과는 이렇게 확실한데도 말이죠. 예비심에서 유죄를 내린다 해도 그게 꼭 마지막 결정인 것도 아니니 뭐 이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싶지만 잘 아시다시피 저는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니 말이죠. 공판에서 제 생각이 뒤집어지는 게 탐탁치 않아서 말입니다. 사실 그런 연유로 아직도 고민하는 중이랍니다."
"꽤나 재밌는 결과로군요." 아케치가 기록을 손에 들었다. "후키야도 사이토도 공부를 열심히 한다더니 "책"이라는 단어에 두 사람 모두 "마루젠"이 튀어나올 줄이야. 성질 반영이 아주 잘 되어 있는 거 같아요. 좀 더 재밌는 것은 후키야 쪽은 하나같이 어딘가 물질적, 이지적인 반면 후키야 쪽은 참으로 상냥한 거 같지 않나요? 서정적이라 해야 할까요. 이를테면 "여자", "옷", "꽃", "인형", "경치", "동생" 같은 대답은 말하자면 감상적이고 여리여리한 남자를 방불케하니까요. 그리고 사이토는 분면 몸이 약할 겁니다. "싫다"에 "병"이라 대답하고 "병"에는 "폐병"이라고 대답했으니까요. 평소부터 폐병에 걸리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있다는 증거죠."
"그렇게 볼 수도 있군요. 연상 진단이란 건 참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이래저래 재밌는 판단이 가능한가 봅니다."
"그건 그렇고." 아케치는 살짝 말투를 바꾸어 말했다. "판사님께서는 심리 시험의 약점에 관해 생각해보신 적이 있으십니까? 페드루 페르난데스 데 퀘이로스는 심리시험의 제창자 휴고 뭔스터버그의 생각을 비평했죠. 이 방법은 고문을 대신하도록 고안되었지만 그 결과는 고문과 마찬가지로 없는 죄를 만들어 엉뚱한 죄인을 만들 가능성이 있다면서요. 뭔스터버그 본인도 심리 시험의 진정한 효능은 용의자가 어떤 장소, 어떤 인물, 어떤 물건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는 경우에는 확정적이지만 다른 경우에는 꽤나 위험하다는 서술을 남겨두었습니다. 당신에게 이런 말을 하는 건 주제넘은 일일지도 모르지만요. 하지만 이건 아주 중요한 점이라 봅니다.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야 나쁜 면을 보면 그렇게 되겠지요. 물론 저도 알고 있답니다."
판사는 조금 언짢다는 얼굴을 했다.
"그 나쁜 면이란 게 의외로 가까이 있을지 모를 일이니까요. 이렇게 말할 수는 없을까요. 예를 들어 아주 신경이 예민한 무고한 남자가 어떤 범죄의 용의를 받았다고 가정해봅시다. 그 남자는 범죄 현장에서 붙잡혔고 범죄 사실도 아주 잘 알고 있죠. 이 경우 그는 과연 아무렇지 않게 심리 시험을 받을 수 있을까요? '아, 이건 나를 시험해보는 거로군. 어떻게 해야 의심받지 않을까'하고 흥분하기 마련이겠죠. 그러니 이런 사정 하에 이뤄진 심리 시험이야말로 데 퀘이로스가 말한 '무고한 자가 죄를 뒤집어쓰는' 경우인 건 아닐까요?"
"사이토 이사무를 말씀하시는 거로군요. 저도 비슷한 건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니 방금 말한 것처럼 아직도 망설이는 거지요."
판사는 더더욱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듯 사이토가 무죄라면(물론 돈을 훔친 죄는 면할 수 없겠지만) 대체 누가 노파를 죽인 걸까……"
판사는 아케치의 말을 도중에 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당신은 달리 짐작 가는 범인이라도 있다는 겁니까?"
"있지요." 아케치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저는 이 연상 시험 결과를 보아 후키야가 범인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확실한 단언은 할 수 없습니다만. 그 남자는 이미 귀가했지요? 어떻습니까. 티 안나게 여기로 불러보실 수는 없을까요? 그러면 제가 진상을 밝혀 드릴 수 있을 거 같습니다."
"뭐라고요? 무슨 확실한 증거라도 있으신 겁니까?"
판사가 적잖이 놀란 투로 말했다.
아케치는 의기양양한 투도 없이 자신의 생각을 자세히 전했다. 판사는 그에 홀딱 넘어 가 감탄해버렸다.
아케치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후키야의 하숙방으로 심부름꾼이 향했다.
"친구분인 사이토 씨께서 유죄 판결을 받으셨습니다. 그에 관해 할 이야기가 있으니 번거로우시겠지만 저희 집까지 좀 와주시겠습니까?"
이게 호출의 구실이었다. 후키야는 마침 학교에서 귀가하던 차로, 이야기를 듣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아무리 그라도 이런 좋은 소식에는 적잖이 흥분할 수밖에 없었다. 기쁜 나머지 그 끝에 무서운 함정이 있다는 것은 전혀 알아차리지 못 했다.
6
카사모리 판사는 사이토에게 유죄를 내린 이유를 설명한 후 이렇게 덧붙였다.
"당신을 의심해서 정말로 죄송합니다. 실은 오늘은 사과를 올릴 겸 사정을 이야기해볼까 해서 이렇게 모셨습니다."
그리고 후키야를 위한 홍차를 내오는 등 편안한 분위기를 잡아 잡담을 시작했다. 아케치도 대화에 참가했다. 판사는 아케치를 지인 변호사이자 죽은 노파의 유산 상속자에게 절차 처리를 의뢰받은 남자라 소개했다. 물론 절반 가량은 거짓이었지만 친족 회의 결과 노파의 조카가 유산을 상속받기로 결정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세 사람은 사이토의 이야기를 비롯하여 다양한 화제를 이야기했다. 완전히 마음을 놓아버린 후키야는 그중에서도 가장 열심히 대화를 끌어갔다.
그러는 사이 어느 틈엔가 창밖에서 노을빛이 들어 오기 시작했다. 불쑥 그 사실을 깨달은 후키야는 귀가 준비를 하며 물었다.
"이만 실례해야겠네요. 달리 용건은 없으신가요?"
"아차, 그만 잊을 뻔했군요." 아케치가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만 겸사겸사해서요……아시는지 모르겠는데 살인 사건이 벌어진 방에 두 장짜리 금병풍이 세워져 있었다네요. 그런데 그중 한 장에 난 흠집이 문제시되고 있지 뭡니까. 듣자 하니 그 병풍은 노파의 것이 아니라 저당 삼아 맡고 있던 물건이라네요. 소유주 쪽은 살인 사건이 벌어진 때에 생긴 상처가 분명하니 배상하라 하지, 조카 쪽은 노파랑 똑닮은 수전노라서 말이죠. 원래 있었던 흠집일지 모르니 절대 배상할 수 없다지. 정말 사사로운 일로 난처하게 됐습니다. 그야 병풍 값이 만만찮은 탓이겠지만요. 그래서 묻는 건데 후키야 씨께서는 그 집에 자주 출입하셨지요? 병풍도 보셨을 텐데 혹시 이전부터 상처가 나있지는 않았는지 기억하고 계시진 않습니까? 역시 병풍 따위 집중해서 볼 게 못 되려나요. 실은 사이토에게도 물어보았는데 흥분하는 통에 대답이 확실하지 않아서요. 게다가 여종은 고향으로 돌아 간 것도 모자라 편지에 답장 한 번 없으니 조금 곤란한 참인데……"
병풍이 저당물인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외의 이야기는 물론 창작에 지나지 않았다. 후키야는 병풍이란 말에 그만 등골이 오싹해졌다.
하지만 잘 들어보니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라서 크게 안도했다. "뭘 깜짝깜짝 놀래. 사건은 이미 종결되었는데."
잠시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생각에 잠긴 후키야였지만, 여느 때처럼 있는 그대로 대답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인 듯싶었다.
"판사님께서도 잘 아시다시피 저는 그 방에 한 번 밖에 들어가 보지 못 해서요. 그것도 사건 이틀 전에요."
그는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이런 식으로 말하는 게 유쾌해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다만 그 병풍이라면 기억하고 있습니다. 제가 봤을 때에는 아무 상처도 없었죠."
"그렇군요. 분명하겠죠? 오노노 코마치의 얼굴 부분에 아주 작은 흠집이 생긴 정도인데."
"아, 기억나네요." 후키야는 마치 지금 막 떠올린 것처럼 말했다.
"육가선의 그림이었죠. 오노노 코마치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역시 그때 상처가 있었다면 놓칠 리가 없죠. 화려한 코마치의 얼굴에 흠집 같은 게 나있으면 단숨에 알아 볼 테니까요."
"그럼 귀찮으시겠지만 증언해주실 수는 없으시겠습니까? 병풍 주인이 욕심이 많은지 아주 시끄러워서요."
"물론이죠. 언제라도 편할 때 불러주세요."
의기양양해진 후키야는 변호사라 소개받은 남자의 부탁을 받아들였다.
"감사합니다." 아케치는 손가락으로 산발을 뒤적이며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아케치가 흥분할 때면 나오는 일종의 버릇인 것이다. "사실 저는 처음부터 당신이 병풍을 알고 있으리라 생각했답니다. 어제 진행했던 심리 시험의 기록을 보니 "그림"이라는 물음에 "병풍"이라고 대답하셨으니까요. 병풍이야 하숙집에서는 보기 드문 물건이고 당신은 사이토 이외에는 딱히 친한 친구도 없는 모양이니, 분명 노파의 안방에 위치한 병풍이 모종의 이유로 깊은 인상에 남았으리라 상상했답니다."
후키야는 살짝 놀랐다. 변호사의 말이 옳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왜 어제 병풍 따위를 입에 올려버린 걸까. 심지어는 이제까지 눈치도 채지 못 했다니. 위험해진 것은 아닐까. 하지만 무엇이 위험해졌단 말인가. 분명 흔적을 잘 조사해서 아무런 단서도 되지 못 하리라 확인하고 오지 않았나. 무얼, 아무렇지 않은 척 하면 그만이다. 생각을 되짚어 본 후키야는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도 그럴까. 그는 지나칠 정도로 명백한 큰 실수를 저질러놓고도 조금도 깨닫지 못 하는 중이었다.
"그렇군요. 생각지도 못 했는데 듣고 보니 그렇군요. 관찰력이 남다르시네요."
후키야는 끝까지 무가공주의를 잊지 않으며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대답했다.
"설마요. 우연히 눈치챘을 뿐입니다." 변호사를 가장한 아케치도 겸손히 대답했다. "그런데 실은 또 하나 눈치챈 게 있어서요. 아, 아니. 결코 걱정하실 건 없습니다. 어제 이뤄진 연상 시험 중에는 여덟 개의 위험한 단어가 섞여 있었지만 후키야 씨께서는 전부 통과하셨으니까요. 아주 완벽할 정도군요. 조금이라도 켕기는 있어서야 그렇게 안 되죠. 여기 보시면 굵게 표시된 여덟 단어가 보이죠? 이거랍니다." 그렇게 말한 아케치는 기록이 적힌 종이를 가리켰다. "이런 단어에 대한 반응 속도가 정말 빠르시더군요. 아주 약간이지만 다른 무의미한 단어보다도 빠를 정도니 말이죠. 예를 들어 "화분"에 "소나무"라 대답하는데 고작 0.6초 할애하셨지요. 이 정도로 순박한 연상력은 아주 보기 드물답니다. 이 서른 단어 중에서 가장 연상하기 쉬운 단어라면 역시 "녹색"일까요. 후키야 씨는 "청색"이라 대답하는 데에 0.7초 사용하셨군요."
후키야는 매우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이 변호사는 대체 무슨 이유로 이렇게 열심히 혀를 놀리는 것일까.
호의인가 혹은 악의인가. 무언가 깊은 흑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는 전력을 기울여 그 의미를 깨달으려 했다.
""화분"도 "기름종이"도, "범죄"도, 물론 그 이외의 여덟 단어도 "머리"나 "녹색" 같은 평범한 단어보다는 연상하기 어려운 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키야 씨는 이 어려운 연상들을 지극히 빠르고 간단히 대답하셨고요. 이게 무슨 뜻일까요. 제가 눈치챘다는 게 바로 이겁니다. 어디, 한 번 당신의 심리를 맞춰 볼까요. 어디까지나 여흥으로 말이죠. 만약 틀렸더라도 봐주셔야 합니다?"
후키야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하지만 무엇 때문에 몸을 떨었는지는 스스로도 알지 못 했다.
"당신은 심리 시험의 위험성을 잘 알고 미리 대비해둔 겁니다. 범죄에 관련된 단어를 미리 예상해서 이렇게 물으면 저렇게 대답하자고 계획을 세워둔 것이지요. 아, 저는 결코 당신의 방식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실제로 심리 시험이란 경우에 따라서는 아주 위험해지니까요. 진짜 범인을 놓치고 무고한 자에게 죄를 덮어 씌울 가능성 또한 분명히 내포하고 있고요. 하지만 준비가 너무 지나쳤던 걸까요. 물론 그럴 생각은 없었겠지만, 준비한 말들이 빨리 나와 버린 것은 사실이죠. 아주 큰 실수를 하셨어요. 답이 늦어지는 것만 고민한 탓에 지나치게 빠른 것 또한 비슷하게 위험하다는 사실을 조금도 깨닫지 못 한 거죠. 그야 아주 잠깐의 차이니까 어지간히 주의 깊은 관찰자가 아닌 이상 그만 놓쳐버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제 말은, 거짓말이란 어딘가에서 반드시 꼬이고 어긋나기 마련이란 거죠." 이것이 아케치가 후키야를 의심한 이유였다. "그런데 당신은 왜 "돈"이니 "살인"이니 "숨긴다"니 혐의를 받기 쉬운 말을 골라 답한 걸까요. 말할 것도 없죠. 후키야 씨께서는 무고하니까요. 만약 후키야 씨가 진짜 범인이었다면 결코 "기름종이"란 말에 "숨긴다"고 대답할 리가 없으니까요. 그런 위험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무엇도 켕기는 것이 없다는 증거죠. 안 그런가요? 제 말이 맞죠?"
후키야는 변호사의 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어찌 된 영문인지 시선을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코와 입 부근의 근육이 경직되어 웃을 수도, 울 수도, 놀랄 수도 없이 그 어떤 표정도 지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물론 입은 열지 않았다. 만약 억지로라도 입을 열어서야 공포의 절규가 터져 나왔을 게 분명했다.
"이렇게 꾸밈이 없는 것, 요컨대 잔재주가 없는 게 당신에게서 두드러지는 특징입니다. 저는 그걸 알고서 그런 질문을 한 거예요. 아시겠나요? 병풍 말입니다. 저는 당신이 조금의 꾸밈도 없이 있는 그대로 대답해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어요. 실제로도 그랬고요. 그나저나 카사모리 씨, 문제의 육가선 병풀 말입니다만, 노파는 그걸 언제 집에 들여놓으신 건가요?"
아케치는 시치미 뚝 떼는 얼굴로 판사에게 물었다.
"사건 전날입니다. 요컨대 지난달 4일이죠."
"전날이라고요? 정말인가요? 이상하네요. 후키야 씨는 지금 사건 전전날, 요컨대 3일에 방에서 병풍을 보았다 말했는데요. 서로 맞지를 않군요. 판사님께서 잘못 아신 게 아니라면."
"후키야 씨께서 뭔가 착각하신 거겠죠." 판사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했다.
"4일 저녁까지는 소유주가 가지고 있었다. 이건 명백히 확인된 일입니다."
아케치는 흥미롭다는 양 후키야의 표정을 관찰했다. 당장이라도 울음을 터트리려는 어린아이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이것이 아케치가 계획해둔 함정이었다. 이틀 전까지는 노파의 집에 병풍이 없었다는 사실을 판사에게 미리 확인해둔 것이다.
"이거 참 곤란해졌군요." 아케치는 골치 깨나 썩는다는 투로 말했다. "돌이킬 수 없는 실수로군요. 왜 보지도 않으신 걸 봤다고 하셨을까요? 당신은 사건 이틀 전 날 이후로는 한 번도 그 집에 찾지 않았을 텐데요. 특히 육가선의 그림을 입에 올린 건 치명상이에요. 아마 사실을 말하자 사실을 말하자 하다 그만 거짓말을 해버린 것이겠죠. 안 그런가요? 사건 이틀 전날, 그 안방에 들어갔을 때 병풍이 있는지 없는지 주의 깊게 확인하셨나요? 그럴 리가 없지요. 당신의 계획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데다가 설령 병풍이 있었더라도 마침 세월이 흘러 색이 바란 탓에 다른 장식품 중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당신이 사건 당일 본 병풍이 이틀 전에도 똑같이 있었다 착각한 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제가 그렇게 착각하도록 물었으니까요. 마치 대단한 것처럼 보여도 잘 생각해 보면 일상 속에 흔히 있는 일이죠. 하지만 만약 평범한 범죄자였다면 결코 당신처럼 대답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들은 뭐든지 숨기면 그만이라 생각하니까요. 제게 행운이었던 건 당신이 어지간한 재판관이나 범죄자보다 열 배, 스무 배는 우수했다는 점일까요. 즉 급소에 닿지 않는 한에서는 되도록 있는 그대로 말해버리는 편이 되려 안전하다는 신념을 가진 덕이었죠. 생각의 허점의 허점을 찌르는 방식이로군요. 고로 저는 다시 한 번 그 허점을 파고든 겁니다. 당신도 설마 이 사건과 아무 관계도 없을 변호사가 당신을 자백케 하기 위한 함정을 파고 기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 했겠죠. 하하하하."
후키야는 새파래진 얼굴을 식은땀으로 가득 젖히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이렇게 된 이상 변명하면 변명할수록 되려 무덤만 파게 될 거라 생각했다.
머리 좋은 후키야다. 자신의 실언이 얼마나 명백했는지 잘 알 수 있었다. 참으로 묘한 일로, 그의 머릿속에서는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있었던 수많은 일들이 주마등처럼 어지럽게 나타났다 사라져 갔다.
긴 침묵이 계속됐다.
"들리시나요?" 아케치가 잠시 뒤 운을 뗐다. "왜, 사각사각, 사각사각하는 소리 들리죠? 옆방에서 저희의 문답을 적고 있는 거랍니다. ……이제 됐으니 가져다주시겠습니까?"
그러니 후스마가 열리며 한 서생이 양피지를 들고 나타났다.
"한 번 읽어주세요."
남자는 아케치의 명령을 따라 내용을 낭독했다.
"그럼 후키야 씨. 서명 삼아 지장을 찍어주시겠습니까? 설마 싫다고는 못 하실 테고요. 방금 전에 병풍에 관한 거라면 언제라도 증언하겠다 약속하셨으니까요. 물론 이런 증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하셨겠지만."
후키야도 여기서 서명을 거부해본들 의미가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아케치의 놀라운 추리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서명날인을 했다. 이제는 완전히 포기한 사람처럼 푹 고개 숙이고 있었다.
"방금 말씀드린 것처럼." 아케치는 마지막으로 설명했다. "뭔스터버그는 심리 시험의 진정한 효능은 용의자가 어떤 장소, 어떤 인물, 어떤 물건을 알고 있는지 알아내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이번 사건에 대입해보자면 후키야 씨가 병풍을 보았느냐 보지 못 했느냐가 바로 그 경우겠군요. 그 외에는 아무리 많은 심리 시험이라도 별 효과를 내지 못 할 겁니다. 상대가 모든 걸 예상하고 세밀히 준비하는 남자였으니까요. 또 하나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심리 시험이란 게 꼭 책에 적힌 것처럼 일정한 자극어를 사용하고 일정한 기계를 준비해야만 가능한 게 아니란 겁니다. 지금 제가 보여드린 것처럼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로도 충분히 가능하니까요. 과거의 명판관, 이를테면 오오카 에치젠 같은 사람은 아마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최근의 심리학이 발명한 방법을 잘 써먹을 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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