뻔한 작법서를 읽게 하는 스토리텔링
뻔하게 정형화된 작법서들을 책장 한 켠에 몰아 넣는다면 얼마나 공간을 잡아 먹게 될까. 책을 많이 읽어라. 경험을 많이 해라. 네가 잊고 있던 기억 속에서 영감을 받아라. 그런 걸 스토리에 녹여라. 문장은 이렇게 다듬어라... 그런 이야기"만" 담은 숱한 책들 말이다.
그런 의미에선 "유혹하는 글 쓰기"가 왜 아직도 작법서 계열에서 손에 꼽히는지도 알 거 같다. 유혹하는 글 쓰기는 작법서인 동시에 작가의 전기기도 했으니까.
때문에 이 책도 그런 작법서 중 하나였다면 나는 그냥 스쳐 지나가는 걸 택했으리라. 무엇보다 난 픽사 작품도 많이 보거나 크게 인상 깊게 본 게 없다. 고작해야 <토이 스토리> 시리즈 정도이고, 이마저도 4가 나올 때 OTT로 몰아 본 게 고작이었다.
그럼에도 이 책을 손에 집은 건, 이 책 또한 "유혹하는 글쓰기"처럼 작가의 전기 요컨대 스토리텔링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글이나 또 어떤 프레젠테이션이나 스토리텔링을 담아라, 하는 작가의 말은 이 책 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책을 읽고 이에 맞는 다른 책을 찾아 볼 필요 없이 이 책 자체가 좋은 예시가 된다는 건 꽤 마음에 드는 독서 경험이었다.
이 책에는 크게 세 개의 줄기가 담겨 있다. 작가와 아버지,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담은 스토리. 그 스토리를 녹여 작품을 만드는 행위, 또 스토리텔링을 녹인 회사 경영과 비즈니스. 얼핏 서로 따로 놀기 좋은 세 장르가 한데 뒤엉켜 복잡하지만 아름다운 나무의 형상을 띄고 있다. 단순히 설명과 충고에만 치중된 작법서가 질렸다면 권해볼만 하다.
픽사 스토리텔링
그렇다면 나는 어쩌다 스토리텔러가 되었을까?
21p, 들어가며
고찰점: 책을 펼친지 얼마 되지 않은 순간부터 이 책은 평범한 작법서와 달라진다. 마치 프롤로그나 1화에서 이미 꿈을 이룬 주인공이 작품 전체를 회상하듯이, 작가 또한 궁금증을 끌기 위한 후크를 던져 독자들의 마음에 건다. 이렇게 시작된 이야기는 장난감 가게를 연 할아버지부터 작가가 픽사의 스토리텔러가 될 때까지 단편적으로 이어진다. 이 스토리의 엔딩이 궁금해사라도 독자는 책을 놓지 않으리라.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집중력이 지속되는 시간은 평균적으로 8초라고 한다. 누군가 떠나기 전에 등을 돌리기 전에 계산하기 전에 무언가 가치 있다고 확신시키는데 단 8초가 주어진다는 말이다.
47p, 1장 후크
고찰점: 다 제쳐두고 멋있는 말이다! 후크가 달린 밧줄을 붕붕 저어 던져서는 독자와 청중의 마음에 걸으라니! 으레 하는 이야기인 도입부 내지 첫 문장의 중요성이지만 표현 하나로 흥미진진 해진다. 작가는 후크란 표현을 사용했는데, 이게 이전부터 있었는지 작가의 독자적 표현인지는 모르겠다. 일단 내 부족한 지식으론 이 책이 처음이긴 하다. 어찌 됐든 앞으로는 더욱 후크를 의식해보자. 늘 노력하지만 쉽지 않은 일이다.
냉정히 말하자면 스토리텔러의 진심이 담기지 않은 스토리는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조종당하는 느낌을 준다. (중략) 속았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진정한 감정에 다가가는 스토리와 경험을 들려줘야 한다.
95p, 4장 진심
고찰점: 어느 순간부터 쓰는 소설에 내 이야기를 많이 녹이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캐릭터를 만들데 정형화된 남의 캐릭터를 빌려왔다면 이제는 내 조각의 일부를 떼어내 쓰고 있다.
이전에 쓴 걸 말하자면 남자 주인공은 나의 약함과 미진함을, 여자 주인공은 나의 이상향과 허세, 희망 따위를 담았다. 이는 물론 두 캐릭터가 (설정상) 표리일체이며 상대의 약점이 자신의 강점이며 반대로 상대의 강점이 자신의 약점이 되도록 짰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어찌 됐든 이전보다 글은 훨씬 잘 써졌고, 결과와 무관하게 내 마음에 안착하게 되었다. 적어도 내 글에 싫증을 느끼는 일은 없게 됐단 소리기도 하다. 진심은 독자만 아니라 작가 또한 그 안에 담기 위해 필수불가결이지 않을까.
메세지는 관객이 스스로 찾게 해야 한다. 오손 웰스 감독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관객에게한 장면 정도로만 힌트를 주고 싶다. 딱 거기까지다. 지나치게 힌트를 많이 주면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없어진다. 관객에게는 그저 제안만 하고 스토리에 참여하게 해야 한다.(후략)"
105p, 4장 진심
고찰점: 이는 나의 약점이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은지라 글이 결론에 휩쓸기기 좋다. 조금씩 고치려 하고 있으나 어깨에 힘을 주는 순간 그렇게 되고 만다. 특히 하이라이트를 망쳐 놓기 우습다. 아니, 정말 우스운 건 나도 이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창작물을 싫어한단 점일까.
글쓰기와 스토리텔링의 세계에 뛰어드는 것은 어렵고 겁이 나고 두렵기까지 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첫 습작은 늘 엉망진창이다. 거울 앞에서 연습하는 영업용 멘트는 어색하고 서툴기 짝이 없다. 하지만 점점 쉬워진다. 내 말을 믿어보시라. 누구나 훌륭한 스토리텔러가 되는 법을 다시 배울 수 있다. 당신은 그저 꾸준히 헤엄쳐 나가면 된다.
216p, 9장 영감
고찰점: 작법서에 가까운 분량을 생략하니 조금 껑충 뛰었다. 양해 바란다. 으레 그렇듯 무난한 마무리이나 책 전체에 작가의 생활과 인생이 녹아내려 있는 만큼 와닿기가 쉽다. 그도 마냥 순풍만 탄 건 아니었고 항상 굴곡이 있었으니, 나도 이 굴곡을 넘어 새로운 발전을 이루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품게 된다.
'독서노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독서노트] 잘 그리기 금지 (0) | 2022.09.04 |
---|---|
[독서노트] 내 이름은 샤이앤﹒말랑, 나는 트랜스젠더입니다 (0) | 2022.08.31 |
[독서노트] 우리는 모두 자살 사별자입니다 (0) | 2022.07.21 |
[독서노트] 히토리 봇치의 OO 생활 (0) | 2022.07.08 |
[독서노트] 코지마 히데오의 창작하는 유전자 (0) | 2022.05.22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