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란 걸 구태여 '많은 사람'에게 보이는 거라 생각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연극"이란 게 있어도 된다. "다른 사람에겐 재미없는 연극"이 있어도 도리가 없다.
먼저 '이건 연극이다'하고 말할 수 있을 법한 연극을 쓰고 싶다.
'이것도 연극이다'하는 연극도 쓰고 싶다.
'이게 연극이다'하는 연극은 평생 중 쓸 수 있을지 어떨지 모르겠다.
'어떤 걸' 말하기 위해 연극을 쓰는 게 아니다.
연극을 쓰기 위해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화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비평을 쓰는 것과 어떻게 다른가. 어라, 다른 모양이다.
'극적'이란 말은 '아름답다'는 말 정도로 통속적으로 변했다.
누구나 '극적'이라 부르는 '어떤 종류의 감동'이 꼭 '예술적 감동'이란 건 아니다.
그런 감동을 생명으로 삼는 연극도 '우리의 연극'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자신이 연극을 쓰지 못한다는 걸 깨닫는 건 자신은 예술을 모른다는 걸 아는 정도로 어려운 건 아니다.
누구나 연극을 쓰려는 생각을 하진 않는다.
하지만 연극으로 보러 가는 게 싫어진 정도로 연극을 쓰는 걸 멈추진 않는다.
과거에 우타를 지은 적이 있다.
"이 남자 달을 어느 정도 따지 못하면……박사의 강의, 들은 적도 있다."
우타는 글렀지 싶었다.
연극을 쓰려 생각했기에 연극을 보러 갔다.
연극이 좋다고도 말했다.
"최신식"이라 말하면 대포도 그렇다.
"그런 건 필요 없다."
"필요한가 아닌가를 묻지 않았다."
"너는 일본 이야기는 안 쓰냐" 한 친구가 분개해 말했다.
"지금은 안 써."
"거짓말 마." 다른 한 친구가 말한다. "네가 쓰는 건 일본 이야기잖아."
"그렇겠지."
작가에게 영감을 줄 법한 배우는 없는가.
――배우를 살리는 작가는 없는가.
먼저 배우가 나와야……
――아니, 작가가 먼저다.
다 조용히 해라. 둘 다 제대로 된 인사를 나눠라.
'읽는 희곡'은 불행한 작가의 손짓에 지나지 않는다.
불행한 극작가란 배우에게 버려진 극작가이다.
오늘의 '읽는 희곡'이 내일의 우수한 '상연 각본'이 아니라곤 할 수 없다.
예를 하나 들까, '사랑은 놀이로 할 게 못 된다'.
'오늘의 무대'는――극장은, 배우는――'내일의 희곡'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하고 생각해 봐도 되지 않을까.
'희곡을 읽지 않는 사람'이 있다――
'악보를 읽지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누구나 읽을 수 있는 희곡'은 대개 '못 봐줄 연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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