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연한 기회로 어떤 영화 운동에 관여하였다. 단지 나로선 현재 그 방면에 이렇다 할 포부를 지니고 있지 않다.
카이죠샤의 요청으로 발표를 주저했던 시나리오풍 이야기를 활자로 삼을 결심을 하였는데 이는 실패한 듯하다. 문예작품으로선 형식상으로나 표현상으로나 완성하곤 거리가 먼 것만 같다. 그렇더라도 그런 건 영화가 되지 않는다는 일부 전문가의 비평을 간접적으로 들어 조금 의아하게 느낀 건 사실이다. 되느냐 되지 않느냐는 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다. 내가 되리라 생각하는 '이유'와 그들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이유'란 게 어쩌면 똑같은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굳이 강짜를 부리자면 마사무네 하쿠쵸 씨의 흉내를 내는 건 아니라도 영화가 되지 않는다면 딱히 영화란 이름을 붙이지 않아도 된다. 옛날처럼 활동사진이라도 상관없다――뭐 이건 농담이지만――
설명 같은 것도 여럿 듣고 있으나 결국 없으면 없는 거고 있으면 있는 거다. 대신 없으면 없어도 되고 있으면 있어야 비로소 생기는 효과 같은 영화 창작술이 있어야만 하지 싶다.
게다가 변사――라고 하면 안 됐던가――설명자라고 해야 하나, 그건 이런저런 내적 사정도 있겠지만 도무지 시대착오적이다. 설명이라 말하니 어폐가 생기는데 그건 가부키의 타케모토 내지 그리스극의 합창단 등과 완전히 같지는 않더라도 그와 비슷한 역할을 해낼 수 있으면 재미도 있고 유익하지 싶다. 그걸 위해선 설명 문구는 영화의 가치에 걸맞는 문학적 표현으로 승화될 필요가 있으며 특히 음성상의 소질이나 수련, 노력 등을 좀 더 합리적으로 연구해야지 싶다. 소위 변사 말투가 형태서 벗어나 영화의 성질에 맞춰 같은 설명자가 다양한 분위기를 그 설명 스타일 위에 얹을 수 있게 되면 더할 나위 없다.
이런 건 배우가 꼭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연기해도 되지 않는 것처럼 설명자 본인이 대본을 만들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그 대본 제작자의 문학적 소질에 주의를 들여야 하리라.
영화란 이런 것이다――하고 단정 짓지 말고 어떤 것이든 영화가 된다. 그리고 문제는 단지 그걸 어떻게 영화하느냐이다――하는 신념에 도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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