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 극단에서 연극의 독립성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건 겨우 가부키극뿐이다. 비할 바 없는 전통의 아름다움은 어떤 침략도 용납하지 않고 또 어떤 힘도 빌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한편으로 시대와 함께 추이하는 연극――희곡 중심의 연극――소위 신파 이후의 연극은 어떠한가. 이는 아직 연극으로서의 독립성을 얻지 못했다. 어쩌다 두세 명의 사람 손에 시도된 '신극 운동'은 그 독립성을 목표로 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란히 실패로 끝나 버렸다.
그동안에는 물론 약간의 기록적 상연도 있었으나 대다수는 우연의 축복을 받은 일시적인 승리일 뿐이었다.
이렇게 신시대의 연극은 연극 자체의 매력만으론 관중을 이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연극으로서의 독립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뜻이다.
신파의 쇠퇴, 신극의 미진 모두 이에 원인을 두고 있다. 또 요즘엔 극단 전체서 하나의 노골적인 경향이 이러한 사실을 잘 말해주고 있다.
그건 두말할 것도 없이 소설의 각색과 영화의 무대화이다. 그 소설이나 영화는 테마 내지 줄거리의 재미도 있으니 이제까지 평판이 좋았던 것 중 사람 입에 오르내린 걸 선택하게 된다.
이는 흥행면에서 현명한 생각이며 각색 담당으로서도 안전한 일이다. 이를 상연하는 배우 또한 '예술'로 겉꾸밀 수 있는 데다가 관객은 '아는 것밖에 모르는' 속된 대중인 이상 대부분은 만족하고 만다.
하지만 어떤 동기가 있을지언정 이런 경향은 연극의 진화에 조금의 자극도 주지 않는다. 만약 일본 극단이 주저앉아 있다면 이런 데서 새로운 발견에 이를지도 모른다. 단지 연극의 순수함을 꿈꾸는 어떤 자는 이 '비상수단'이 연극 무대의 본질을 해치며 배우와 희곡을 영원히 떼어놓을지 모른다 우려하고 있다.
실제로 희곡으로 만들어진 희곡은 대개 오늘날의 무대 위에서 그 예술적 가치를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또 어쩌다 발휘하더라도 그만한 흥행 가치를 일궈내지 못하는 건 물론 그 실패는 되려 앞서 말한 각색물의 실패 이상으로 참담한 결과를 가지고 온다. 왜냐면 전자는 이 실패를 갚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배우의 '기술을 살리는 요소'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연극을 다시 연극으로 만드는 운동은 필연적으로 두 개의 길을 찾아야만 한다. 즉 초기의 츠키지 소극장식 상설 연구단 조직과 과거의 자유 극장식 직업 배우단의 정기 흥행이다.
전자는 어찌 되었든 후자는 앞으로 뜻을 가진 배우, 작가, 관객의 협력을 통해 의외로 쉽게 실현될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싶다. 단 이 운동은 얼핏 상업주의에 도전하는 듯 보이나 실제론 현재 극장 조직과 멀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약간 곤란한 문제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이해 있는 극장 주인은 눈앞의 이익을 내려놓고 이 기획을 협조하여 '극도구제' 전선에 참가하리라.(193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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