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과거에 '희곡 시대'란 말을 정의 내린 것에 따르면 '잡지 창작란이 어제까지는 소설로 채워져 있었던 반면, 읽을거리로서의 희곡이 꽤나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게 된 오늘날의 상황'인 듯한데 그런 상황도 작년 중반쯤부터 또 움직이기 시작한 듯하다. 찾아보지 않아 확실히는 말하지 못하나 어찌 됐든 2월 호 잡지에는 구색 맞추기 같은 희곡은 한 편도 실려 있지 않다. 이는 물론 우연이나 이런 경향은 확실히 주목할만하다.
본래 희곡 작가는 그 제작 동기면에서 소설가와 경향이 살짝 달라서 어떻게 무대에 올릴까 하는 생각 없이 써진 소설이라도 이 창작적 노력은 상연이 아니고선 보답받지 못하는 성질을 지닌다. 그와 동시에 소설가가 끝없이 사상과 생활에서 직접 그 소재와 영감을 받고 그걸 통해 제작 동기를 유발 받는 반면에 희곡 작가는 '오늘날의 무대'서 항상 귀중한 암시와 자극을 받지 않고선 매끄러운 작품을 쓰지 못하는 게 아닐까.
일반적으로 문단 부진을 소리 높이는 때이나 개중에서도 희곡 작가의 불성실은 그런 외적 사정이 커다란 원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싶다.
단적으로 말하자면 '오늘날의 무대'에 많은 불만을 느끼고 그 안에서 거의 어떤 자극도 받지 못하는 오늘날의 희곡 작가는 저도 모르는 사이 감흥 없는 일을 질질 끌거나 혹은 감흥이 없기에 일을 하지 않게 된다.
물론 재능 문제도 있다. 하지만 어느 나라 어떤 극작가가 그 시대 그 나라의 무대에 관심도 없이 훌륭한 일을 해냈는가. 특히 또 어떤 시대 어떤 극작가가 자신이 믿는 배우 혹은 자신을 이해하는 배우 없이 그 작품의 가치를 세상에 물을 수 있었던가.
나는 소위 '희곡 시대'가 지나간 걸 슬퍼하지만은 않는다. 오히려 그게 당연한 일이지 싶다. 단지 슬픈 건 그 화려했던 '희곡 시대' 뒤에 오는 게 아마 더욱 큰 신극의 암흑시대이지 않을까 하는 점이다. 하지만 그 결과 현재의 소위 신극이 사라진다면 그건 그것대로 좋다. 기형아의 요절은 어떤 의미에선 '서로를 위한' 일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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