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달 23일부터 츠키지좌가 비행회관에서 상연하는 희곡 중 하나에 '이십육 번 관' 3막이란 게 있다. 작가는 카와구치 이치로 군, 아마 아직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진 않았으리라.
오늘까지의 신극은 대개 잡지 문학의 영향을 받아 창작 희곡이라 칭해지는 것도 진정한 의미로 무대적 사실의 묘경에 이른 작품은 전무하다 해도 좋았다. 그런 의미에서 카와구치 이치로 군은 이 처녀작을 통해 시대의 스노비즘을 뒤로한 채 희곡의 본질적 생명을 주도면밀한 관찰 속에서 찾아 전편서 당당한 '무대적 맥박'을 느끼게 하는 대희곡을 써낸 건 시기상 유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무대는 뉴옥이나 인물은 모두 우리나라 이민자들이다. 그 안에선 '뿌리내린 것'의 모습이 특수한 분위기 속에서 제각기 재밌게 그려지고 흥겨운 심리적 리듬이 이 무색무취에 가까운 '빌딩 이야기'를 절절한 '생활의 시'로 바꿔내고 있다. 특히 놓쳐서 안 될 건 이 희곡이 참으로 '무대를 아는' 수많은 기교를 세밀하나 아낌없이 사용했다는 점에 있다. 심지어 그 기교란 아마 작가가 미국 무대를 보고 온 사람이었기에 가능했을 일본 무대서는 이제까지 보지 못한 종류의, 말하자면 '무대를 살리기' 위한 희곡적 작법으로 이 또한 감탄할 점은 조금도 꾸며진 기색 없이 참으로 교묘히 필요한 장소에서만 사용된다는 데 있다.
그것만으로도 '신극'의 무대는 이 희곡을 상연하는 걸 통해 연극상의 혁명을 강요받는다 해도 좋다. 물론 이제까지 번역극이 그 역할을 다 해야 했으나 그게 번역이기 때문에 자타 모두 놓치고 만 걸 생각해 보면 그런 면에서 '이십육 번 관'은 신비한 운명을 짊어지고 있는 셈이다.
요컨대 우리나라 창작극은 이 작품을 통해 비로소 '신극적'으로 눈을 뜨는 거라 나는 생각한다. 요컨대 이 희곡이 오늘날에 주는 존재 이유는 그야말로 '오늘까지 찾아도 나오지 않았던 게 드디어 나타났다'는 점에 있다. 겉면뿐인 테마에 종속되지 않고 틀에 박힌 드라마트루기를 배제하여 하염없이 '혼의 운율'을 포착하는 데에만 그 노력과 재능을 기울인 점이 특히 듬직하다 해야 하리라.
상연 결과가 어찌 되든 나는 이 희곡이 아직 마땅히 읽어야 할 사람들이 읽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이번 기회에 세상의 애호가들이 츠키지좌의 무대를 보러 가주길 바란다.
내 이름도 연출자로 올라가 있긴 하나 이 희곡 상연에 연출가의 궁리는 필요하지 않았다. 배우들이 그 기량을 충분히 발휘한다면 그걸로 족하다. 다행히 이 희곡이 뉴옥을 잘 아는 이토 키사쿠를 장치가로 둔 점은 더할 나위 없는 효과를 이뤄내리라.(193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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