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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키시다 쿠니오

상복을 입은 인형 - 키시다 쿠니오

by noh0058 2022. 8.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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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극 협회의 어느 연습날, 이자와 란쟈는 나를 방구석으로 불러 보자기 하나를 풀었다. 뭘 꺼내나 싶었더니 여느 때처럼 소녀처럼 웃으며――"이거 잘 만든 건 아닌데……" 같은 소리를 하면서 내 손에 인형 같은 걸 건넸다. 그건 서양풍 상복을 입은 여자 인형이었다. 그녀의 설명을 들을 것도 없이 '티롤의 가을' 속 스텔라임에 분명했다. 정확히는 스텔라를 연기하는 그녀 본인임에 분명했다.

 내 손에 인형을 건네면서 다른 사람에겐 보여주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를 풍겼으나 그건 아무래도 좋았으리라. 그런 점에서도 '일본 소녀' 이자와 란쟈의 전통적인 교태가 담겨 있었다. 또 나도 아름다운 여배우에게 그런 선물을 받아 기쁘지 않을 리도 없다. 돌아갈 때엔 그 인형을 소중히 안고서 '티롤의 가을' 첫 상연 당일을 떠올렸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 추억이란 내게 고마운 게 못 됐다. 물론 이자와 란쟈의 잘못은 결코 아니나, 나는 그 무대의 기억을 그녀의 모든 기억에게서 떼어내고 싶었다.

 자작을 두고 이야기하자면 '온실 앞' 속 마키코는 확실히 그녀의 일대 걸작이리라. 이 각본은 내가 처음으로 배우를 상정하며 쓴 것인데, 다른 역할은 조금 어긋남이 생겨 반쯤은 당초 예정을 바꿔야만 했고 배우에게도 딱 맞지 않았으나 마키코만은 이자와 란쟈의 비교적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천재적 특징 중 한 면을 충분히 살려냈다 믿고 있다. 실제로 그녀는 그 무대에서 처음으로 명배우의 관록을 보여주었다.

 이자와 란쟈는 일부 팬이 상상하는 것처럼 모던 마담의 대표격이 아니다. 하물며 변두리 거리의 생활력 넘치는 아내형 배우도 아니다. 메이지 가정의 소설식 색채로 대중에게 환영을 받는 한편으로, 실은 예술적 진가는 다른 데에 존재한다. 되려 평범하고 밋밋하며 깊은 고민을 품은 과도시대의 여성――아마 이것이 딱 맞는 역할이라 해도 좋다.

 나는 그녀가 그 평생을 통해 그런 역과 조우했는지를 알지 못한다. 이제 와 생각하면 이자와 렌쟈는 앞으로의 무대, 앞으로의 신극을 배경으로 중요한 역할을 맡아야 할 하나의 유력한 여배우였다.

 상복을 입은 인형이 우연이나마 그녀가 가진 과거의 면모를 말하고 있다면 그 점에 깊은 기념의 의미가 담겨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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