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이 전문 분야라 생각하는 이유는 얼마든지 있으나 또 전문 분야가 아니라 생각하는 일면 또한 있으리라.
전문가만이 관심을 가지는 문학과 전문가는 관심이 없는 문학(?)이 확실히 구별되는 점에 우리나라 현대 문화의 특수성이 있다고 본다. 때문에 나는 오늘날에 일하면서 그런 고난을 수없이 느끼고 있다.
개개인의 문제는 잠시 제쳐두고 문학자들이 얼마나 먼 곳에서 세간을 바라보고 있는가. 또 세간은 문학자를 얼마나 '특이한 존재'로 다루는가. 이 점은 모두가 아는 듯 실제론 그리 신경 쓰지 않는 사실을 나는 신기하게 생각한다.
요즘 세상에 문단이란 별개의 특수한 국가나 다름없어서 세간에 통용되지 않는 풍습과 언어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를 따르거나 존중하지 않으면 전문가 자격을 잃게 되며 순문학은 이를 통해 심경을 갈고닦으며 순문학은 이를 통해 짙은 화장을 한다. 이렇게 말하면 더더욱 알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순문학과 대중문학을 같은 울타리 안에 살게 할 생각은 없다. 순문학은 세간을 상대하지 않으며 대중문학은 독자 위주로 만들어진다는 구별 정도는 알고 있다. 단지 세간이란 대중만으로 이뤄져 있지 않다는 점도 알고 있다. 요컨대 우수한 문학이 대중에 녹아내리지 못한다 해서 그걸로 세간 전체를 경멸하고 적시할 게 못 되며, 그 경향이 '일반 사회에 호소하는 말'을 문학자에게서 뺏고 있다는 관찰을 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문학자만 잘못하는 게 아니다. '세간'에도 죄는 있으나 세간은 문학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 문학자가 이를 깨닫고 세간의 주의를 돌릴 노력을 해야만 한다. 물론 일본이란 나라를 살기 좋은 나라로 만들기 위함이다. 그걸 위해서는 무엇보다 '공통된 말'을 찾는 게 급선무다. 문학자가 가지는 관심이 지극히 직업적이며 고립적인 데다가 그 말이, 그 '말투'는 도무지 은어이자 암호가 되고 만다. 평범한 교양으로 해석하고 얻을 수 있는 표현으론 문학이 성립되지 않는단 말인가?
문학자 동지가 아니고선 통용되지 않을 말과 몸짓이 문학 자체를 얼마나 비좁게 하며 때로는 얼마나 무력하게 하는가. 나는 수많은 사례를 들어 이야기할 수 있다.
문학의 독자성이란 그렇게 비좁고 갑갑한 게 아니다. 시나 소설은 세간의 누구나 이를 논해도 이상할 게 없는 성질이다. 정치가든 군인이든 사업가든 기술직이든 원하는 때 원하는 장소서 문학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한다. 현대 일본에는 이를 용납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 빈틈일까, 장애물일까? 아마 양쪽 모두이리라.
우리는 번번이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직업을 입에 올렸을 때 주위 분위기가 굳고 화제는 얇은 줄 위를 타는 듯하다 위태롭게 끝내는 게 고작이다. 때문에 우리 문학자는 현재, 어떤 시대를 살며 어떤 역할을 연기해야 할지가 문제시되고 있다.
문학에 대한 국가적 관심이나 문학자의 사회적 지위, 모양새가 무너져도 도리가 없다는 의견이 성립되는 동시에 그런 목소리가 있는 만큼 실질적인 무언가가 만들어지리란 견해도 못 믿을 건 없다. 일본이란 나라는 예로부터 그런 기이한 현상이 많은 나라다. 그런 정세 속에서 우리가 가장 성가시다 느끼는 건 문학에 나타난 '문단적 악습과 방언'의 존재이다. 문학이 '세간'을 그리면서도 그 안에 '세간'을 들이지 않는 비좁은 그릇과 결벽증이다. 우리 안에 없는걸 있는 것처럼 보여주는 유치한 마술은 왕왕 비문학적이고 불쾌한 냄새를 뿜곤 한다. 무너지는 표준어와 마찬가지로 세간 식자를 망연자실하게 만드는 이유이다.
실제로 성을 내며 이런 문제를 꺼내본들 문학의 면모가 일신되는 데에는 족히 오십 년은 걸리리라.(193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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