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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다자이 오사무

근심의 패배 - 다자이 오사무

by noh0058 2022. 5.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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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심은 저세상에서 말해라. 그런 말이 있다. 진짜 사랑의 실증은 이 세상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는 지정할 수 없는 걸지 모른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는 건 도무지 불가능한 일 아닌가. 신뿐이 사랑할 수 있다. 정말로?
 다들 잘 알고 있다. 내 외로움을 다들 잘 알고 있다. 이것도 내가 오만하기 때문일까. 무어라 말할 수 없다.

 나카타니 타카오 씨의 "봄의 에마키" 출판 기념회 자리서 이부세 씨가 낮은 목소리로 축사를 읊었다. "진지하고 솔직한 작가가 진지하고 솔직한 작가로 인정 받는 일은 정말 중요한 일로" 어미가 떨리고 있었다.

 가끔씩, 조금 쓰는 것이니 충분히 생각하고 생각한 끝에 써야 한다. 넌센스.

 칸트는 내게 생각의 넌센스를 가르쳐주었다. 말하자면 순수한 넌센스를. 
 지금 문득 댄디즘이란 말을 떠올리고 그 말의 근원이 단테 아닐까 하고 조금의 두근거림을 품은 채 책상 위 사전을 훑었다. 그러나 내 빈곤한 영일 사전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아아, 단테의 강함을 가지고 싶다. 아니, 가져야만 한다. 너도, 나도.
 단테는 지옥의 수많은 계곡에 자리한 수를 셀 수 없는 망자들을 단지 보고 지나갔다.

 사람은 사람을 구할 수 없다. 정말로?

 무얼 쓸까. 이런 말을 어떨까. "사랑은 이 세상에 존재한다. 분명 존재한다. 찾을 수 없는 건 사랑의 표현이다. 그 작법이다."

 X선은 울며불며 말했습니다. "제게는 당신의 위장과 뼈만 보이지 당신의 하얀 피부는 보이지 않아요. 저는 슬픈 장인입니다" 이는 독자를 위한 서비스. 작가란 게 꽤나 바쁘다.

 루소의 참회록이 독특한 건 그 참회록의 상대가(누가 전에 썼을까?) 신이 아니라 옆집 사람이란 점에 있다. 세간이 상대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함께 생각하면 루소의 더러움은 한 층 더 명확하다. 하지만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순수한 참회의 형식은 게세마니동산 위 예수의 무언의 배궤이다. 그렇다면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또한 속되다 해야 하리라. 다들 부족하다. 이 사실엔 말의 운명이 담겨 있다.
 안심해도 좋다. 루소도 아우구스티누스도 좋은 사람이다.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선의 일을 했다.

 나는 지금 얼버무리려 하고 있다. 왜 루소의 참회록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보다 더 널리 읽히고 있는가. 또 읽히는 게 당연한가.
 답하자면 말해본들 풍류가 없다. 정말로. 

 숙제 하나. "사소설과 참회"

 이렇게 쓰면서 나는 우습기 짝이 없다. 채소가게의 꼬맹이가 막 젊은 사장에게 들은 얕은 신지식을 팔짱을 끼며 의기양양히 늘어놓는 광경이 눈앞에 떠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동시에 또 생각한다. 이 광경, 제법 좋지 않은가.

 도무지, 응. 한 번 웃기 시작하면 도무지 진지한 얼굴로 돌아갈 수 없다. 손바닥을 두 개 맞대어 물을 한 모금 떠올렸더니 그 손바닥 안 작은 연못에 수많은 물주걱이 떠올라 있어 도무지 간지러워 가만히 선채로 그 감촉이 곤란해한다. 그런 식이다.

 이제까지 써온 걸 다시 읽어 보자 생각했지만 그건 이제 그만두고(더는 웃어서는 안 된다) 내 한 친구가 사오 일 전에 갑자기 죽었는데 그 일을 조금 적어보려 한다. 나는 이 친구를 굉장히 아꼈다. 마음에 걸려 하기 어려운 말이지만 "바람 한 번 맞지 않도록" 조심스레 길렀다. 그런데 나를 향해 한 마디도 남기지 않고 갑자기 죽었다. 나는 부끄럽다. 내 애정의 빈곤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자신의 사랑에 자아도취한 걸 부끄럽게 여긴다. 그 친구는 그 부모님에게마저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다. 나마저 이렇게 부끄러우니 부모님의 부끄러움과 괴로움은 어느 정도이랴.

 권위로 명한다. 죽을 것처럼 괴롭다면 그대의 어머니께 이야기하라. 열 마디 하라, 천 마디 하라.

 천 마디를 이야기해도 어머니가 바위처럼 움직이지 않는다면――바보 같다. 그런 일은 없다. 왜 그렇게 어깨에 힘을 주고 있는가. 부모자식은 사이 좋아야 한다. 당연한 이야기지 않은가. 사람이 가진 힘의 한도를 알아라. 자신이 가진 힘의 한도를 이야기하라.


 나는 지금 조금 너를 속이고 있다. 다른 게 아니라 네가 죽길 바라지 않기 때문이다. 부탁이다. 죽지 말아다오. 자신을 맹목적으로 사랑하라. 네가 죽으면 네 빈자리가 한사코 내 옆에 남으리라. 네가 생전에 앉았던 부드럽고 둥근 쿠션이 한사코 내 옆에 남으리라. 이 인기척 없는 차가운 의자는 영원히 네 의자로, 공석인 채로 존속하리라. 신 또한 이 공석을 채울 수 없다. 아아, 나의 이 맹목적이고 좀 먹은 곳 투성이인 사랑은 내가 원하지 않음에도 아집의 형태를 취하고 만다.

 길을 걸으면 소위 "반할만한 이야기" 모두의 상냥함, 모두의 괴로움, 모두의 외로움 따위를 고스란히 느껴 내 사전에는 '타인'이란 문자가 없는 듯하다. 누구라도 좋다. 당신과 함께라면 언제라도 죽을 수 있습니다. 아아, 이 하찮은 애정의 범람. 나는 대체 누구인가. "센티멘탈리스트". 우습지도 않다.

 올해 봄 아내와 헤어진 후로 나는 한 번 사랑을 했다. 그 상대 여자는 나를 거부하여 말하기는 "당신은 저 혼자 가지기엔 너무 과분해요". 나는 당황하여 실연가를 썼다. 이후 여자는 찾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없다. 잃을 게 없다. 진짜 출발은 여기서부터?(쓴웃음)

 웃음. 이는 강하다. 문화의 과실이요 불꽃놀이다. 이지도, 사색도, 숫자도 모든 교양의 극치는 결국 포절복도의 대폭소로 끝난다. 그렇다면 아아 교양은――역시 그에 매달리고 있으니 웃기기 짝이 없다.

 가장 속세를 신경 쓰는 건 예술가이다.

 약속 장수가 되지 않아 펜을 두고 배를 깎으며 한 입 베어물고 생각하길 "이래서는 도리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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