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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다자이 오사무

여인창조 - 다자이 오사무

by noh0058 2022. 2.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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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당연하지 않은가. 그렇게 실소할지 모르나 힘들어지면 내 처지를 여자로 바꾸어 여러 여자의 심리를 추측하고 있자면 별로 웃을 수 없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그야말로 말과 각로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다르다. 생각에 잠기는 사람들은 이를 깨닫는 게 굉장히 느리다. 나도 최근에야 깨달았다. 이름을 잊었는데 어떤 외국인이 쓴 쇼팽전을 읽었더니 그 안에 코이즈미 야쿠모의 "남자란 평생서 적어도 만 번은 여자가 된다"는 기괴한 말이 인용되었는데 그런 일은 없지 싶다. 그건 안심해도 좋다. 
 일본 작가 중에서 진짜 여자를 그리고 있는 건 슈코이리라. 슈코가 그리는 여자는 실로 지루하다. "흐음"이니 "그렇구나"하고 중얼거리기만 할 뿐으로 조금도 사색적이지 않다. 그건 정확하리라. 말하자면 그리운 현실이다.
 에도 시절 이야기서도 나오지 않는가. 아침에 울타리 너머로 옆집 정원을 들여다보니 잠옷 차림의 젊은 여자가 나와 정원의 풀과 꽃을 바라보고 쭉 뻗은 나팔꽃 한 송이를 꺾었다. 오, 풍류 있네. 그렇게 감탄하며 보고 있었더니 이윽고 젊은 여자는 그 나팔꽃으로 코를 풀었다.
 모파상은 여자가 읽는 것이다. 우리에게 도무지 재미가 없는 건 이따금 현실의 여자가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도무지 고매하지 않다. 모파상은 그만한 남자기에 그걸 인식하였다. 자신의 재능을, 모든 인격을 혐오했다. 작품 뒤편서 볼 수 있는 모파상의 우울과 번뇌는 일류이다. 미치광이다. 그곳에 모파상의 남성이 의연히 존재한다. 남자는 여자가 될 수 없다. 여장이야 할 수 있다. 이는 모두가 하고 있다. 도스토옙스키 등은 털난 정강이를 고스란히 드러낸 여장을 아주 진지하게도 한다. 스트린드베리도 이따금 열연한 나머지 가발을 떨구지만 그럼에도 아무렇지 않게 연기를 해낸다.
 여자를 그리지 못한다는 게 비단 작품의 결정적인 흠집이 되는 건 아니다. 여자를 그리지 못하는 게 아니라 여자를 그리지 않는 것이다. 그곳에 이상주의자의 사자분신이 있다. 아름다운 무지가 있다. 나는 한동안 이 태도를 고집하려 한다. 이 태도는 이따금 맹목과 닮고 한다. 때로는 우습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어머나, 간만이에요"하는 인사로 시작하는 여인의 실체를 묘사하더라도 어떤 감격도 고마움도 느끼지 못하니 도리가 없다. 나는 홀로 남아도 역시나 관념의 여자를 그려가리라. 오 척 칠 촌의 털복숭이 남자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그리는 여성이기에 웃음 많은 두세 명은 분명 배를 부여잡고 폭소하리라. 나 자신마저 조금 우습다. 남자 독자의 거의 전부가 여성적이란 반성에 괴로워한 경험을 가지고 있으리라. 하지만 그럴 때는 다시 한 번 여자를 잘 보면 된다. 여자의 움직임을 보는 사이에 제군은 안심할 수 있을 테지. 아아, 나는 여자가 아니구나. 여자는 명상하지 않는구나. 여자는 호령하지 않는구나. 여자는 창조하지 않는구나. 하지만 그런 현실한 여자를 드러내며 경멸해서는 안 된다. 이런 내용은 쓰다보면 얼굴이 붉어져 도리가 없다. 어머, 상냥하기도 해라.
 절망은 우아함을 낳는다. 그곳에는 아름다운 외모의 사탄 한 마리가 살고 있다. 하지만 그런 건 여기서 가볍게 단언할 만한 게 아니다.
 이런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를 질질 끌 생각은 없었다. 요즘 들어 다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여성을 묘사하는데 조금 비법을 알 듯 했다. 내게는 아직 이렇다 과시할만한 작품이 없으니까 거창한 소리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그건 조금 독특한 작법이다. 말하고 싶지만 역시 망설여지고 만다. 말해서는 안 되는 일일지 모른다. 이상하다. 무얼, 이전부터 무의식 중에 한 일을 어른이 되어 겨우 깨달은 것뿐일지 모른다. 말로 꺼내면 너무 당연한 일이라 뭐야 그게 할지 모르나 허투루 말을 꺼냈다 곡해 당해 손해를 보는 건 싫다. 역시 다물고 있다. "지혜란 악덕이다. 하지만 작가는 이를 잃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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