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5년에 우메바치 공장이란 곳에서 만들어진 C51형 기관차는 같은 공장서 비슷한 시기에 제작된 삼 등 객차 세 량과 식당차, 이등객차, 이등침대차 각각 한 량과 그 외에 우편이나 짐을 담는 화물차 세 량과 도합 아홉 개의 상자에 대략 이백 명의 여행객과 십만을 넘는 통신과 그에 따른 비통한 이야기를 싣고서 비 내리는 날도 바람 부는 날도 오후 두 시 반이 되면 기적을 울리며 우에노에서 아오모리를 향해 달렸다. 때에 따라선 만세 소리를, 때로는 손수건에 품어진 작별을, 때로는 오열을 동반한 불길한 인사를 받고는 했다. 열차번호는 103이었다.
번호부터 꺼림칙했다. 1925년부터 지금까지 8년이 지났는데 그동안 이 열차는 수만 면의 애정을 찢어발겼다. 실제로 나 또한 이 열차 탓에 지독한 꼴을 보았다.
작년 겨울, 시오타가 테시 씨를 고향으로 보낼 때의 일이다.
테시 씨와 시오타는 어릴 적부터 같은 고향에서 지낸 사이였다. 나도 시오타와 고등학교 기숙사 한 방을 쓰게 된 후로 이따금 이 연애담을 들었다. 테시 씨는 빈곤하게 자라 조금 유복했던 시오타의 집에선 둘의 결혼을 반대하였고 때문에 시오타는 그의 아버지와 번번이 격한 말싸움을 했다. 처음 싸울 때엔 시오타가 졸도할지 모를 정도로 흥분하여 끝내는 코피를 철철 흘렸다는데 그런 우직한 이야기는 젊은 내 가슴에 이상하리만치 울렸다.
그러는 사이 나도 시오타도 고등학교를 나와 함께 도쿄 대학에 들어갔다. 그로부터 삼 년이 지났다. 나는 이 시기를 어렵게 보냈는데 시오타는 별 일이 없었는지 매일 느긋하게 살아가는 듯했다. 내가 처음 빌린 집이 대학 근처여서 시오타도 입학 당초엔 번번이 들러주었으나 환경도 사상도 본격적으로 멀어지기 시작한 두 사람에게선 이전처럼 벽 없는 우정을 바랄 수 없었다. 내 비틀어진 성격 탓일 수도 있지만 만약 그때 테시 씨가 상경하지 않았다면 시오타는 분명 나와 영원히 멀어져 버릴 생각이었던 듯하다.
시오타는 나와 친근한 교제를 끊은 후로 삼 년째 되는 겨울에 대뜸 교외에 자리한 우리 집을 찾아 테시 씨의 상경을 고했다. 테시 씨는 시오타의 졸업을 기다려 홀로 도쿄로 도망쳐 왔다.
그때는 나도 어떤 무지한 시골녀와 결혼한 참이어서 새삼스러운 시오타의 이야기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듯한 젊은 기분은 사라져가던 참이었다. 그러니 시오타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조금 당황하긴 했어도 그 방문 속 저의를 간파하는 건 잊지 않았다. 한 소녀가 자신을 위해 뛰쳐나온 걸 지인에게 이야기하는 걸로 그의 자존감은 얼마나 채워졌으랴. 나는 그의 태도가 불쾌해져 테시 씨를 향한 그의 진의마저 의심했다. 나의 이러한 의혹은 비참하게도 적중해 있었다. 그는 내게 한껏 광희와 감격을 보인 끝에 미간에 주름을 잡고 어떻게 해야 좋을까? 하고 상담하기 시작한 것이다. 나는 이미 그런 한가로운 장난에 동정을 품을 수 없게 되었기에 너도 똑똑해졌구나, 네가 테시 씨께 옛날만큼의 사랑을 느끼지 않는다면 헤어질 수밖에 없지. 그렇게 시오타가 바라는 바를 직설적으로 말해주었다. 시오타는 입꼬리에 미소를 머금고는 하지만, 하고 생각에 잠겼다.
그로부터 사오 일이 지나 나는 시오타에게서 속달 우편을 받았다. 그 엽서에는 친구들의 충고도 있어 서로의 장래를 위해 테시 씨를 돌려보내겠다. 내일 두 시 반 기차로 돌아갈 예정이야, 하는 요지가 간단히 적혀 있었다. 나는 부탁받지도 않았음에도 테시 씨를 배웅하자고 곧장 마음 굳혔다. 내게는 그런 경솔한 일을 하는 슬픈 습성을 가지고 있었다.
배웅하는 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나는 내켜 하지 않는 아내를 재촉하여 함께 우에노 역으로 향했다.
103호 열차는 차가운 빗속서 검은 연기를 내뿜으며 발차 시각을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는 열차 창문을 하나하나 열심히 찾으며 걸었다. 테시 씨는 기관차의 바로 옆 삼등 객차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서너 해 전에 시오타에게 소개 받아 한 번 만난 적이 있는데 얼굴색이 많이 하얘지고 턱 주변도 퉁실하게 살이 올라 있었다. 테시 씨도 내 얼굴을 잊지 않아서 내가 말을 거니 곧장 창문으로 몸을 반쯤 빼 반갑게 인사를 해주셨다. 나는 테시 씨께 아내를 소개했다. 내가 일부러 아내를 데리고 온 건 아내 또한 테시 씨처럼 빈곤한 출신의 여자였기에 설혹 테시 씨를 위로하더라도 내가 하는 것보다는 적절한 태도나 말을 해줄 게 분명하다고 독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배신 당했다. 테시 씨와 아내는 서로 귀부인 같은 인사를 무언으로 나눌 뿐이었다. 나는 겸연쩍어서 무어라 부호인지 객차 옆구리에 페인트로 작게 써진 스하프 134273이란 문자 주변을 양산 자루로 툭툭 건드리기만 했다.
테시 씨와 아내는 날씨를 두고 두세 마디를 나누었다. 그 대화가 끝나자 다들 할 게 없어졌다. 테시 씨는 창가에 얌전히 얹은 열 손가락을 접었다 피었다 하면서 한곳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러한 광경을 도무지 볼 수 없어서 테시 씨께서 슬쩍 떨어나 긴 플랫폼을 헤매듯이 걸었다. 열차 아래서 뿜어져 나오는 증기가 차가운 습기가 되어 내 발밑서 하얗게 감돌았다.
나는 전기 시계 근처에 멈춰 서 열차를 바라보았다. 열차는 비로 축 젖어 검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세 량째의 삼등 객차 창문에서 고개를 한껏 내뺀 채 대여섯 명의 배웅인들과 울먹이며 인사하는 검푸른 얼굴이 보였다. 그 시절 일본에선 다른 어떤 나라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그에 동원된 병사들이리라. 나는 보면 안 될 걸 본 거 같아 질식할 것처럼 가슴이 갑갑해졌다.
몇 년 전 나는 어떤 사상 단체와 잠시 관계를 가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꼴사납게 그 단체와 헤어졌는데 지금 이렇게 병사를 눈앞에 두고 부끄럽게도 귀향하게 된 테시 씨를 바라봐서는 나의 그런 태도도 면목이 서네 안 서네 하는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다.
내 머리 위 전자시계를 올려다보니 발차까지 아직 삼 분이 남아 있었다. 나는 참을 수 없었다. 누구라도 그렇겠지만 배웅인에게 이 발차 전 삼 분만큼 갑갑한 것도 없다. 해야 할 말은 이미 다 했으니 그저 이유 없이 얼굴만 보고 있을 따름이다. 하물며 지금 나 같은 경우 해야 할 말마저 무엇 하나 떠올리지 못하고 있다. 아내가 더 재능 있는 여자였다면 나도 좀 더 편했을 테지만 보라, 아내는 테시 씨 옆에 서서 토라진 듯한 얼굴로 아까부터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은 채 서있기만 하다. 나는 마음을 먹고 테시 씨의 창문을 향해 다가갔다.
발차가 가깝다. 열차는 사백오십 마일 정도를 앞두고 플랫폼은 시끄러워졌다. 내 가슴에는 이미 타인을 신경 써줄 만한 여유가 없었기에 테시 씨를 위로하면서 "재난" 같은 무책임한 말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둔한 아내는 열차 옆벽에 걸린 하얀 철판서 물방울이 가득 맺힌 문자를 막 글공부를 마친 더듬더듬한 지식으로 FOR A-O-MO-RI하고 낮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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