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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정원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2.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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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

 그건 이 여관 본진에 해당하는 나카무라란 옛 가문의 정원이었다.
 정원은 메이지 유신 후 십 년 가량은 어떻게든 옛 모습을 유지하였다. 표주박 모양의 연못도 깔끔하였으며 살짝 솟은 언덕 위 소나무 가지도 늘어져 있었다.  세이카쿠켄, 센신테이――그러한 정자도 남아 있었다. 연못에 닿은 뒷산 기슭에는 하연 폭포도 졸졸졸 떨어졌다. 카즈노미야 님이 찾아오셨을 때 이름을 붙였다는 석등롱도 역시나 매년 넓어져 가는 황매화 나무속에 서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뿜어지는 폐허의 느낌은 감출 수 없었다. 특히 초봄――정원 안팎의 나뭇가지에 젊은 싹도 자랄 적에는 이 아름다운 인공 풍경을 등 뒤로 무언가 인간을 불안케하는 야만적인 힘이 한 층 더 노골적으로 느껴졌다.
 나카무라 가문의 늙은 주인――대장부 기질의 노인은 그 정원에 접한 큰 방의 코타츠서 두면창을 앓는 늙은 아내와 바둑을 두거나 화투를 치는 등 지루할 게 없는 나날을 보내왔다. 그러나 이따금 아내가 연속으로 대여섯 번을 이기면 괜히 화를 내는 일도 있었다. 집안을 이은 장남은 사촌지간인 아내와 복도에 이어진 좁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장남은 문실文室이란 별호를 가진 신경질적인 남자였다. 병약한 아내나 동생들은 물론이요 노인마저 그를 꺼리곤 했다. 단지 그쯤 이 여관에서 지내던 가난한 한량 세이게츠만은 종종 그를 찾아 놀곤 했다. 장남도 신기하리만치 세이게츠에게만은 술을 주고 글자를 써주는 등 후하게 대했다. "아직 꽃향기 나는구나 불여귀 나는 산에서, 세이게츠. 이곳저곳의 폭포 장엄함 드러내며, 문실" 그런 시를 주고받은 기록도 있다. 그 외에도 동생이 둘――차남은 곡물점하는 사돈집에 데릴사위로 들어갔고 삼남은 대여섯 리 떨어진 거리서 커다란 주조장에서 일했다. 두 사람 모두 마치 말을 맞춘 것처럼 본가를 자주 찾는 법이 없었다. 삼남은 사는 곳이 먼 데다가 현 당주와 마음이 맞지 않아서. 차남은 방탕에 빠진 결과 양가에도 거의 돌아가지 않았으니까.

 정원은 이 년 삼 년, 점점 더 폐허처럼 변해 갔다. 연못에는 마름 따위가 떠오르기 시작했고 나무에는 갈라진 것들이 섞이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노인은 어느 더위가 지독한 여름에 뇌출혈로 급사했다. 죽기 대여섯 날 전, 그가 소주를 마시고 있자니 연못 너머에 자리한 센신테이에 하얀 옷을 입은 귀족 하나가 몇 번이나 왕복을 반복하였다. 적어도 그는 그런 대낮의 환상을 보았다. 다음 해 봄 끝자락엔 차남이 양가의 돈을 훔쳐 매춘부와 도주했다. 또 가을에는 장남의 아내가 조산으로 남자아이를 낳았다.
 장남은 아버지가 죽은 후로 어머니와 큰 방에서 지냈다. 그 후 작은방을 빌린 건 주변 초등학교 교장이었다. 교장은 후쿠자와 유키치 옹의 실리주의를 숭배하였기에 정원에 과일 나무를 심으라며 이따금 장남을 설득하곤 했다. 그리하여 정원은 봄이 오면 익숙한 소나무나 버들 사이로 복숭아니 살구니 자두니 하는 다양한 색의 꽃을 피우게 되었다. 교장은 이따금 장남과 새로운 과수원을 걸으며 "이렇게 멋진 꽃구경도 되니까요. 일거양득이지요"하고 평했다. 하지만 그만큼 언덕이나 연못, 정자는 이전보다 한 층 더 존재감이 옅어졌다. 말하자면 자연스러운 폐허 이외에도 인공 폐허도 더해진 셈이었다.
 가을에는 또 뒷산서 근래에 찾아 볼 수 없는 화재가 벌어졌다. 그 이후로 연못에 떨어지던 폭포가 끊기고 말았다. 그런가 하면 눈이 내릴 적부터 당주가 앓기 시작했다. 의사가 말하기는 과거의 노증에 지금의 폐병이 더해졌다고 한다. 그는 눕다 일어났다 하면서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해 갔다. 실제로 다음 해 정월에는 연시에 찾아 온 삼남과 심한 말싸움 끝에 화로를 던지는 일마저 있었다. 삼남은 그날 이후로 형의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당주는 그로부터 일 년 후 아내가 지켜보는 밤에 모기장 안에서 숨을 거두었다. "개구리가 우는걸. 세이게츠는 어쩌고 있을까?"――그게 당주의 마지막 말이었다. 하지만 세이게츠는 주변 풍경에 질려버린 건지 진작에 구걸 조차 하지 않게 되었다.
 삼남은 당주의 일주기를 마치고는 가게 주인의 막내딸과 결혼했다. 그리고 작은 방을 빌리던 초등학교의 전임을 기회로 새신부와 거처를 옮겼다. 작은 방에는 검은칠이 된 장롱이 옮겨지거나 홍백 무명이 장식되곤 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 큰방의 아내가 앓기 시작했다. 병명은 남편과 같았다. 아버지와 헤어진 자그마한 아이――렌이치도 어머니가 피를 토한 이후로는 매일 밤 할머니와 잠을 잤다. 할머니는 잠에 들 때면 반드시 머리에 수건을 얹었다. 그럼에도 두면창 냄새 탓에 밤이면 쥐가 다가왔다. 물론 수건을 잊기라도 하면 쥐가 머리를 물기도 했다. 같은 해 당주의 아내는 촛불이 꺼지듯이 죽어갔다. 또 매장 다음날에는 언덕 뒤 세이카쿠켄이 대설로 무너지고 말았다.
 다시 한 번 봄이 돌아왔을 때, 정원은 그저 탁한 연못 옆에 센신테이의 초가지붕을 남긴 잡초밭으로 변모했다.

     중

 눈으로 어두운 어느 저녁, 도주하여 십 년이 된 차남이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왔다. 아버지의 집――하지만 그건 사실상 삼남의 집과 다를 바 없었다. 삼남은 별로 싫어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또 별로 기뻐하는 기미도 없었다. 말하자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양 나태한 형을 맞이해주었다.
 그 후로 차남은 큰 방의 불간에 아픈 놈을 눕히며 가만히 코타츠를 지켰다. 불간에는 커다란 불단에 아버지나 형의 위패가 모셔져 있었다. 그는 그 위패를 보지 않도록 불단 장자를 꽉 닫아두었다. 하물며 어머니나 동생 부부하고는 세 끼를 함께 하는 것 이외엔 거의 얼굴도 마주하지 않았다. 단지 고아인 렌이치만은 이따금 그의 방에 놀러갔다. 그는 렌이치의 종이석판에 산이나 배를 그려주었다. "저 반대편 섬에 꽃이 가득 피었네. 꽃집 누나야 놀러와라"――한 번은 그런 옛날 노래를 힘없는 필적으로 적어주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 또 봄이 되었다. 정원에는 뻗은 잡초 사이에 빈곤한 복숭아나 살구가 꽃피고 둔탁한 빛을 내뿜는 연못에서 센신테이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하지만 차남은 여전히 불간에 틀어박힌 채 낮에도 꾸벅꾸벅 졸고는 했다. 그러자 어느 날 그의 귀에 희미한 샤미센 소리가 들렸다. 또 동시에 노래하는 소리도 띄엄띄엄 들리기 시작했다. "이번에 찾는 싸움서 마츠모토 가문의 요시에 님을 뵙습니다……" 차남은 옆에 누운 채로 살짝 고개를 들어 보았다. 노래도 샤미센도 거실에 계신 어머니의 것임에 분명했다. "그날 나서는 화려하고 용맹한 움직임은 맑은 하늘 아래서 용사로 보이는……" 어머니는 손자에게라도 들려주는지 계속 읊어갔다. 하지만 그건 대장부 기질이 있던 아버지가 어딘가의 오이란에게 배웠다는 이삼 십 년 전의 유행가였다. "적의 대장을 보고 아쉽게 목숨을 잃는다. 하지만 풀과 잎의 이슬은 사라지더라도 이름은 영원히 남는구나……" 차남은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얼굴에 어느 틈엔가 묘한 빛을 두르고 있었다.
 그로부터 이삼 일이 지난 후, 삼남은 머위가 많이 자란 언덕 뒤에서 땅을 파는 형을 발견했다. 차남은 숨을 헐떡이면서 어렵게 어렵게 괭이를 휘두르고 있었다. 그 모습은 참으로 우스웠으나 진지함도 묻어나 있었다. "형님, 뭐 해?"――삼남은 담배를 물고 뒤에서 형에게 물었다. "이거?"――차남은 눈부시다는 양 동생을 올려다 보았다. "물줄기 하나 내고 있다." "내서 어쩌려고?" "정원을 원래대로 돌려놔야지."――삼남은 히죽히죽 웃으며 아무 말도 묻지 않았다.
 차남은 그 후로 매일 같이 괭이를 가지고서 열심히 물줄기를 냈다. 하지만 병으로 약해진 그는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그는 무엇보다 쉽게 지쳤다. 그런 데다 일에 익숙하지 않아 상처가 나거나 손톱이 벗겨지는 등 다치기 쉽상이었다. 그는 이따금 괭이를 던지고는 죽은 듯이 누워 있었다. 그의 주위는 정원에 내려오는 태양열에 흐려진 꽃이나 잎으로 무성했다. 하지만 몇 분 동안 조용히 있은 후 다시 비틀비틀 일어나서는 집요하게 괭이를 썼다.
 하지만 며칠이 지나도 정원에선 이렇다 할 변화를 찾아 볼 수 없었다. 연못에는 여전히 풀이 무성했고 들에서도 잡목이 가지를 뻗고 있었다. 특히 과일나무 꽃이 진 후로는 한 층 더 황폐해진 느낌이었다. 그뿐 아니라 집안의 누구도 차남의 일을 동감해주지 않았다. 투기꾼 기질로 충만한 삼남은 쌀 시세에만 몰두했다. 삼남의 아내는 차남의 병에 여성스러운 혐오를 느꼈다. 어머니도――어머니는 그의 몸 때문에 너무 흙을 만지는 걸 우려했다. 그럼에도 차남은 고집스럽게 인간과 자연에 등을 돌린 채로 조금씩 정원을 바꿔 갔다.
 그러는 사이 어느 비 오는 아침, 그가 정원으로 나가보니 머위 옆에서 돌을 늘어놓는 렌이치를 발견했다. "삼촌"――렌이치는 기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도 오늘부터 도울래." "그래, 도와줘라." 차남도 그때는 오랜만에 밝은 웃음을 지었다. 그 후로 렌이치는 밖에도 나가지 않고 열심히 삼촌을 도왔다――차남은 또 조카를 위로하기 위해 나무 그늘서 쉴 때면 바다나 도쿄, 철도처럼 렌이치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렌이치는 아직 익지 않은 매실을 먹으며 마치 최면술에라도 걸린 것처럼 그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장마철에는 비가 내리지 않았다. 그들――나이 먹은 폐인과 아이는 강한 햇살이나 잡초에도 지지 않고 연못을 파고 나무를 자르는 등 점점 일의 영역을 넓혀 갔다. 하지만 바깥의 장해는 어떻게 극복하더라도 내면의 장해만은 도리가 없었다. 차남은 이제 환상처럼 과거의 정원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나무 위치나 길의 방향 같은 세세한 부분의 기억은 또렷히 알 수 없었다. 그는 이따금 일하는 도중에 갑자기 괭이를 지팡이로 삼은 채로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곤 했다. "뭐 해?"――렌이치는 반드시 삼촌의 얼굴에 불안 섞인 시선을 보냈다. "여기가 원래 어떻게 되어 있었더라?"――땀을 흘리는 삼촌은 두리번거리며 혼잣말 밖에 하지 않았다. "이 단풍은 여기 없었는데." 렌이치는 흙묻은 손으로 개미라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내면의 장해는 그뿐이 아니었다. 서서히 여름이 깊어지자 차남은 끝없는 과로 탓인지 머리가 혼란스러워졌다. 한 번 판 연못을 메우거나 소나무를 뽑은 자리에 소나무를 심는 등――그런 일이 번번했다. 특히 렌이치를 화나게 한 건 연못의 뚝을 만들기 위해 물가의 버들을 자른 일이었다. "이 버들은 요전 번에 심은 건데"――렌이치는 삼촌을 노려보았다. "그랬나? 뭐가 뭔지 모르겠네"――삼촌은 우울한 눈초리를 지으며 햇살을 머금은 연못을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가을이 왔을 때엔 무성한 풀이나 나무 속에서 희미하게 정원의 모습이 떠올랐다. 물론 과거에 비하면 세이카쿠켄도 찾아 볼 수 없었고 폭포수도 떨어지지 않았다. 아니, 명성 높은 정원사가 만든 우아한 과거의 정취는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정원'이 그곳에 있었다. 연못은 다시 한 번 맑은 물에 둥근 언덕을 담고 있었다. 소나무도 다시 한 번 센신테이 앞에서 유유히 가지를 뻗었다. 하지만 정원이 완성됨과 동시에 차남은 드러누워 버렸다. 열이 도무지 내려가지 않고 온몸이 아팠다. "너무 무리하니까 그러지"――머리맡에 앉은 어머니는 늘 하던 불평을 반복했다. 하지만 차남은 행복했다. 정원은 물론 아직 고치고 싶은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그건 도리가 없었다. 어찌 됐든 노력한 보람만은 있다――그 사실에 그는 만족했다. 십 년의 고생은 체념을 가르쳐주고 체념은 그를 구원했다.
 그 가을 느즈막에 차남은 아무도 모르게 어느 틈엔가 숨을 거두었다. 그걸 발견한 건 렌이치였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복도 건너 작은 방으로 달렸다. 집안사람들은 곧장 고인 주변에 놀란 표정을 모았다. "보셔요, 형님 꼭 웃고 있는 거 같네"――삼남은 어머니를 돌아보았다. "어머, 오늘은 불단 장자가 열려 있네요."――삼남의 아내는 고인을 보지 않고 커다란 불단을 신경 썼다.
 차남을 묻어준 후, 렌이치는 홀로 센신테이에 앉아 있는 일이 많아졌다. 한사코 멍하니 늦가울 물이나 나무를 바라보면서……

     하

 그건 이 여관 본진에 해당하는 나카무라란 옛 가문의 정원이었다. 정원은 모습을 되찾은지 아직 십 년도 되지 않아 이번에는 집째로 파괴당했다. 파괴된 곳에는 정차장이 세워지고 정차장 앞에는 작은 음식점이 생겼다.
 그쯤 되어 나카무라 본가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머니는 물론 진작에 죽은 사람들 사이에 꼈다. 삼남도 사업이 실패한 끝에 오사카로 향했다고 한다.
 기차는 매일 같이 정차장에 와서는 다시 정차장을 떠나갔다. 정차장에선 젊은 역장 한 명이 커다란 책상에 앉아 있었다. 그는 한산한 사무 틈틈히 푸른 산들을 바라보거나 지역 역원과 대화를 나누곤 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 속에도 나카무라 가문의 이야기는 오르지 않았다. 하물며 그들이 서있는 곳에 언덕이나 정자가 있었단 사실은 누구 하나 생각해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 사이 렌이치는 도쿄 아카사카의 어떤 서양화 연구소에서 유화 캔버스를 마주하고 있었다. 천장의 빛, 유화 도구의 냄새, 머리 묶은 모델 소녀――연구소의 공기는 고향집과 어떤 연결 고리도 없었다. 하지만 브러시를 움직다 보면 이따금 그의 마음에는 쓸쓸한 노인 얼굴 하나가 떠올랐다. 그 노인 얼굴은 웃으면서 수없는 창작에 지친 그에게 이런 말을 걸곤 했다. "너는 어릴 적에 내 일을 도와줬잖아. 이번엔 내가 돕게 해다오"……
 렌이치는 지금도 가난한 와중에도 매일 같이 유화를 그리고 있다. 삼남의 소문은 누구도 듣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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