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다음 달에 저희 잡지에 실을만한 글을 써주실 수 있을까요?
작가 어렵습니다. 요즘 들어 몸이 안 좋아 도저히 뭔가를 쓸 상황이 아니에요.
편집자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이 사이에 글로 적으면 한 권은 나올 벽창호 같은 문답이 있다.
작가 ――그렇게 됐으니 이번만은 좀 넘어가주시죠.
편집자 곤란하네요. 내용은 상관 없습니다. 한두 장이든 석 장이든 괜찮아요. 선생님 성함만 있으면 됩니다.
작가 그런 걸 실는 건 실수 아닙니까? 독자에게 미안한 건 물론이고 잡지에도 손해만 되겠지요. 양머리를 걸어두고 개고기를 팔면 무슨 욕을 들을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편집자 아니, 손해 볼 건 없지요. 무명 작가의 작품을 싫을 때면 좋으면 좋은 대로, 나쁘면 나쁜 대로 잡지사가 책임을 지지만 유명한 대가의 작품이면 선악의 책임을 지는 건 항상 작가분 쪽이 되니까요.
작가 그래서야 더 받아 들이기 어려울 거 같지 않나요?
편집자 하지만 선생님만한 대가라면 하나나 둘 쯤 나쁜 걸 내놓아도 명성이 떨어질 우려는 없지요.
작가 꼭 5엔이나 10엔 정도 도둑 맞아도 생활이 어렵지 않다면 훔쳐도 된다는 식으로 말씀하시는군요. 도둑 맞는 쪽은 민폐가 따로 없는데.
편집자 도둑 맞았다 하면 불쾌하지만 기부했다 생각하면 경우가 또 다르지요.
작가 농담은 그쯤 하시죠. 잡지사가 원고를 사러 오는 건 즉 영업 아닙니까? 그럴싸한 주장이든 사명이든 간판은 얼마든지 있을 테지요. 하지만 손해를 봐가면서까지 주장이나 사명을 충실히 하려는 잡지는 많지 않겠지요. 팔리는 작가니 원고를 산다, 안 팔리는 작가는 애원해도 사지 않는다――그게 당연한 겁니다. 그럼 작가 또한 작가 자신의 이익을 중심으로 잡지사를 거절하거나 받아 들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편집자 10만 독자의 바람도 생각해주셔야죠.
작가 어린애나 속을 로맨티시즘이군요. 그런 걸 진지하게 받아 들이는 건 중학생 중에서도 찾기 힘들겠죠.
편집자 아니요, 저희는 진심으로 독자의 희망을 따르고 있습니다.
작가 그야 그렇겠지요. 독자의 희망을 따르는 게 장사 번영으로 이어지니까요.
편집자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아까부터 장사장사하시는데 선생님께 원고를 받고 싶은 게 꼭 장사속만은 아닙니다. 선생님의 작품을 좋아하기도 하니까요.
작가 그야 그럴지 모르죠. 적어도 제게 글을 부탁한다는 건 무언가의 호의도 섞여 있을 테니까요. 저 같이 무른 인간은 그만한 호의로도 움직이기 쉽죠. 쓰지 않는다 않는다 해도 써지기만 하면 쓰고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앞뒤 가리지 않고 받아 들였다가는 좋은 꼴을 못 봅니다. 제가 불쾌한 일을 겪지 않으면 반드시 선생님께서 불쾌한 꼴을 보게 되겠지요.
편집자 진심은 사람 마음도 움직인다지요. 제 진심 좀 느껴주세요.
작가 즉석에서 만든 진심은 느끼기 어렵지요.
편집자 너무 그러지 마시고 뭐라도 써주세요. 제 체면 세워주는 셈 치고.
작가 곤란하군요. 그럼 선생님과 나눈 문답이라도 적어야겠습니다.
편집자 정 안 되시면 그거라도 괜찮습니다. 그럼 이번 달 중에 적어주셔야 합니다.
복면 쓴 사람이 대뜸 두 사람 사이에 나타난다.
복면 쓴 사람 (작가에게) 네놈은 한심한 녀석이다. 건방진 소리나 하더니 눈앞의 상황을 넘기 위해 엉터리 글마저 쓰려 들지. 나는 과거에 발자크가 하룻밤에 멋진 단편 하나를 쓰는 걸 본 적이 있다. 그 녀석은 머리에 피가 오르면 족욕을 하며 글을 적었지. 그 굉장한 정력을 생각하면 네놈은 죽은 거나 다름 없어. 설령 한 순간을 넘기기 위한 거라 하여도, 왜 그 녀석을 보고 배우지 않으냐? (편집자에게) 네놈도 마음가짐이 좋지 않구나. 허울뿐인 원고를 실는 건 미국에서도 법률 문제가 되고 있다. 조금은 눈앞의 이익이 아니라 고귀한 걸 생각하거라.
편집자도 작가도 목소리를 낼 도리가 없어 멍하니 복면 쓴 사람을 바라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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