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여름 날, 삿갓을 쓴 중 두 사람이 조선 평안남도 용강군 동우리의 시골길을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단순한 행각승이 아니었다. 사실은 먼 일본에서 조선을 살피러 온 카토 키요마사와 코니시 유키나가였다.
두 사람은 주위를 바라보며 아직 익지 않은 밭 사이를 걸었다. 그러자 길에서 농부의 자제로 보이는 아이 하나가 둥근 돌을 베개 삼아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걸 발견했다. 키요마사는 삿갓 아래로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이상한 꼬맹이로군."
무서운 상관은 두 말 하지 않고 베갯돌을 걷어찼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어린아이의 머리는 땅에 떨어지기는 고사하고, 돌이 있던 공간을 베개로 삼더니 여전히 조용히 자고 있지 않은가!
"이 꼬맹이는 필시 보통내기가 아니로군."
키요마사는 갈색 법의에 숨겨두었던 계도 자루에 손을 얹었다. 왜국의 재해가 될 법한 싹을 미리 잘라두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유키나가는 비웃음을 터트리며 키요마사의 손을 붙들었다.
"이 꼬맹이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인가? 괜한 살생은 피하는 게 좋네."
두 중은 다시 밭 사이를 걸었다. 하지만 거친 수염을 기른 귀신 상관은 아직 무언가가 불안한지 이따금 그 아이를 돌아보았다.
30년 후, 당시의 두 중――카토 키요마사와 코니시 유키나가는 8조 8억의 병사와 함께 조선 팔도를 덮쳤다. 집이 불탄 팔도의 백성은 부모는 자식을 잃고, 지아비는 아내를 빼앗기며 우왕좌왕 도망쳤다. 경성은 이미 함락되었다. 평양도 지금은 왕토가 아니었다. 선조는 의주로 도망쳐 명의 원군을 기다렸다. 만약 이대로 손을 쓰지 않고 왜군의 유린을 방관하면 아름다운 팔도강산도 불타버린 평원으로 변할 게 분명하리라. 하지만 하늘은 다행히도 조선을 버리지 않았다. 과거에 밭두렁에서 기적을 보인 한 어린아이――김응서에게 나라를 구하게 한 것이다.
김응서는 의주의 총군정에 달려가 초췌해진 선조의 용안을 알연했다.
"제가 이렇게 있으니 마음 놓으시길 바랍니다."
선조는 슬픈 웃음을 지었다.
"왜장은 귀신보다 강하다 들었네. 만약 그대가 할 수 있다면 일단 왜장의 목을 잘라 오게나."
왜장 중 한 명――코니시 유키나가는 평양의 대동관에서 기생 계월향에게 총애를 주고 있었다. 계월향은 팔천 기생 중에서도 비할 자 없는 미인이었다. 하지만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은 머리에 꽂은 매화와 함께 단 하루도 잊는 법이 없었다. 그 밝은 눈동자는 웃고 있을 때마저 항상 긴 속눈썹의 그림자에 슬픈 빛을 깃들어 있었다.
어느 겨울 밤, 유키나가는 계월향이 따르는 잔을 받으며 그녀의 오라비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 오라비 또한 피부가 하얗고 풍채가 훌륭한 남자였다. 계월향은 평소보다 더 아양을 떨며 끊임없이 유키나가에게 술을 권했다. 그 술속에는 어느 틈엔가 수면제가 담겨 있었다.
얼마 뒤, 계월향과 오라비는 술에 취한 유키나가를 뒤로한 채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었다. 유키나가는 취금 장막 밖에 비장의 보검을 둔 채로 마냥 잠들어 있었다. 물론 꼭 유키나가의 방심만을 탓할 수는 없었다. 장막에는 방울이 달려 있었다. 누군가가 장막을 들어 올리면 기운찬 울림으로 유키나가의 잠을 깨우고 만다. 단지 유키나가는 계월향가 이 방울 또한 울리지 못 하도록, 어느 틈엔가 방울의 구멍을 줄로 묶어둔 걸 알지 못 했던 것이다.
계월향과 그의 오라비가 다시 돌아왔다. 계월향은 오늘 밤 입은 자수된 치마에 아궁이의 재를 두르고 있었다. 계월향의 오라비 또한――아니, 오라비가 아니었다. 왕명을 받은 김응서가 소매를 높이 걷은 손에 청룡도를 쥐고 있었다. 두 사람은 조용히 유키나가가 자리한 취금 장막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유키나가의 보검이 제 혼자 칼집을 벗어나더니 마치 날개라도 달린 것처럼 김장군을 덮쳤다. 하지만 김장군은 조금도 소리 내는 법 없이 보검을 향해 침을 뱉어냈다. 보검은 침에 젖는 동시에 신통력을 잃었는지 바닥 위로 떨어졌다.
김응서는 크게 으르렁거리며 청룡도를 휘둘러 유키나가의 목을 떨구었다. 하지만 이 무시무시한 왜장의 목은 분하다는 양 이를 갈며 본래의 몸으로 돌아가려 했다. 이 기현상을 본 계월향은 치맛자락에 손을 넣더니 유키나가의 목 단면에 재 몇 줌을 부렸다. 목은 몇 번이나 뜀박질하면서도 재투성이가 된 단면에 붙는 법은 없었다.
하지만 목이 없는 유키나가의 몸은 손을 더듬어 보검을 붙들더니 김장군을 향해 던졌다. 기습 당한 김장군은 계월향을 옆구리에 낀 채로 높은 들보 위로 뛰었다. 하지만 유키나가가 던진 검은 공중을 날아 김장군의 새끼발가락을 잘라냈다.
그 밤이 지나지도 않을 적. 왕명을 다 한 김장군은 계월향을 등에 업고 인기척 없는 들판을 달렸다. 들판의 끝에는 잔월의 끝자락이 어두운 언덕으로 지려던 참이었다. 김장군은 문득 계월향이 임신했단 걸 떠올렸다. 왜장의 아이는 독사나 다를 바 없다. 이틈에 죽이지 않으면 어떤 해를 끼칠지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이른 김장군은 30년 전의 키요마사와 마찬가지로 계월향 모자를 죽일 수밖에 없다고 각오했다.
영웅은 예로부터 감상을 짓밟는 괴물이었다. 김장군은 곧 계월향을 죽이고 배안의 아이를 끌어냈다. 잔월의 달을 받은 아이는 아직 모호한 핏덩어리였다. 하지만 그 핏덩어리는 몸을 떨더니 대뜸 인간처럼 소리를 질렀다.
"네 이 놈, 앞으로 삼 개월만 기다리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을 것을!"
목소리는 물소 울음처럼 어두컴컴한 들판에 울렸다. 동시에 한 줌의 잔월도 언덕의 뒤로 기울어 갔다. ………
이것에 조선에 전해지는 코니시 유키나가의 마지막이다. 물론 유키나가는 정한 당시에 죽지 않았다. 하지만 역사를 꾸미는 게 비단 조선의 일만은 아니다. 일본 또한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역사는――혹은 아직 어린아이나 진배없는 일본 남아에게 가르치는 역사는 이런 전설로 충만하다. 이를테면 일본의 역사 교과서는 한 번이라도 이런 패전의 기록을 실은 적이 없지 않은가?
"대당의 장군, 전함 백칠십 척을 이끌고 백강(조선 충청도 서천현)에 진열을 짜다. 무신년(텐치 텐노 2년 8월 27일) 일본(아마토)의 선사, 대당의 선사와 싸운다. 일본(아마토), 이익이 없어 물러난다. 기우(28일)……일본의 란오, 군사를 이끌고 당의 군을 친다. 당, 곧 좌우의 배로 협공하여 싸운다. 순식간에 관군이 패하다. 물에 빠져 익사하는 자도 많았다. 배를 돌리지도 못 했다."(일본서기)
어느 나라의 역사도 그 국민에게는 반드시 영광된 역사이다. 꼭 김장군의 전설만 비웃을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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