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 수행이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해야만 한다. 왜 사는가. 왜 문장을 쓰는가. 지금의 제게는 의무 수행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돈 때문에 쓰는 건 아닌 듯하다. 쾌락 때문에 사는 건 아닌 듯하다. 저번에도 길가를 홀로 걸으며 문득 생각했다. "사랑이란 것도 결국 의무 수행 아닌가?"
솔직히 말해 나는 지금 다섯 장의 수필을 쓰는 것도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열흘 전부터 무얼 써야 좋을지 생각해 보았다. 왜 거절하지 않았는가. 부탁받았기 때문이다. 이 월 십구 일까지 대여섯 장 써라. 그런 편지를 받았다. 나는 이 잡지(분가쿠샤)의 동인이 아니다. 또 장래에 동인이 될 생각도 없다. 동인 중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뿐이다. 그러니 꼭 써야 한다는 이유도 없다. 하지만 나는 쓰겠다 답했다. 원고료를 바랐기 때문도 아니었다. 동인 선배에게 아양 떨 생각도 없었다. 쓸 수 있는 상태일 때 부탁받았으니 반드시 써야 한다. 그런 규율 때문에 "쓰겠습니다"하고 대답했다. 흥이 올랐을 때에 남에게 부탁한다면 받아야 한다는 규율과 마찬가지이다. 도무지 내 문장의 vocabulary어휘는 거창하기만 해서 남의 반발을 사는 듯하나 나는 도무지 "북쪽의 백성"의 피를 듬뿍 받아서 "높은 건 지성地聲"이란 숙명을 가진 듯하여 그런 점에서는 괜히 경계하지 않아도 되지 싶다. 스스로도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이래서야 안된다. 자세를 고치자.
의무로 쓰는 것이다. 쓸 수 있는 상태일 때, 앞서 그렇게 말했다. 이는 고매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다. 요컨대 나는 지금 코감기에 걸려서 열도 조금 있으나 드러누울 정도는 아니다. 원고를 못 쓸 정도의 병도 아니다. 쓸 수 있는 상태이다. 또 나는 2월 25일까지 예정되어 있던 일을 다 해결했다. 25일부터 29일까지는 약속도 없다. 나는 그 4일 동안 다섯 장 정도라면 어떻게든 써낼 수 있을 터이다. 쓸 수 있는 상태이다. 그러니까 나는 써야만 한다. 나는 지금 의무 때문에 살아 있다. 의무가 나의 생명을 받쳐준다. 나 개인의 본능으로는 죽어도 좋다. 죽든 살든 병이 있든 없든 그리 차이는 없다. 하지만 의무는 나를 죽게 두지 않는다. 의무는 내게 노력을 명한다. 쉴 틈 없이 좀 더 좀 더 노력을 명한다. 나는 비틀비틀 일어나 싸우는 것이다. 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단순하기 짝이 없다.
순문학 잡지에 짧은 글을 쓰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일도 없다. 나는 허세가 강한 남자니까(쉰이 되면 이 허세도 괜한 냄새를 풍기지 않을 정도가 될까. 어떻게든 무심히 쓸 수 있는 경지까지 가고 싶다. 그게 유일한 기대감이다.) 고작해야 대여섯 장의 수필 속에도 내 전부를 담고 싶다고 힘을 준다. 그건 불가능한 일인 듯하다. 나는 항상 실패한다. 그리고 또 그렇게 실패한 짧은 글에 한해서는 선배나 친구가 곧잘 읽는 듯하여 모종의 충고를 듣는다.
결국은 아직 내 심경이 수필 같은 걸 쓸 처지가 못 되는 것이다. 불가능하다. 이 다섯 장의 수필도 "쓸게요"하고 대답을 하여 열흘 동안 이래저래 쓸만한 소재를 취사했다. 취사가 아니다. 버리기만 해왔다. 이것도 안 돼, 저것도 안 돼. 그렇게 버리기만 하다 결국 전부 사라져 버렸다. 좌담으론 할 수 있어도 순문학 잡지에 "어제 나팔꽃을 심었다"하고 적고 그걸 한 글자 한 글자 활자공이 주워내고 편집자가 교정하여(타인의 지루한 중얼거림을 교정하는 건 꽤나 괴로운 일이다.) 또 가게로 나와 한 달 동안 나팔꽃을 심었어요, 나팔꽃을 심었어요 하고 아침부터 밤까지 잡지 구석서 반복하는 건 도무지 참을 수 없는 일이다. 신문은 하루면 끝나니 차라리 낫다. 소설이라면 또 하고 싶은 말만 하면 그만이니 한 달 정도 가게서 소리쳐도 괜찮다는 각오도 되어 있다. 그러나 나팔꽃 이야기만은 한 달 동안 중얼거릴 용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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