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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어느 날의 오이시 쿠라노스케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2.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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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닫힌 장자에 아름다운 햇살이 드리우고 거칠고 늙은 매화나무의 그림자가 짧은 빛을 오른쪽 끝부터 왼쪽 끝까지 그림처럼 선명하게 점령하고 있다. 전 아사노타쿠미노카미 가문의 신하이자 당시엔 호소카와 가문서 가로家老로 있던 오이시 쿠라노스케요시카츠는 그런 장자 뒤에서 단정히 무릎을 꿇은 채로 독서에 여념이 없었다. 서적은 아마 호소카와 가문의 가신 중 한 명이 빌려 준 삼국지 중 한 권이리라.

 방을 쓰는 아홉 명 중 카타오카 겐고에몬은 막 측간으로 향했다. 하야미 토자에몬은 아랫방에 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 외에 요시다 츄자에몬, 하라 소에몬, 마세 큐다유, 오노데라 쥬나이, 호리베 야헤이, 하자마 키헤이의 여섯 명은 장자에 드리운 햇살도 잊은 것처럼 누군가는 책에 푹 빠져 있고 또 누군가는 편지를 쓰고 있다. 그런 여섯 명 모두가 오십 살 넘은 노인들인 탓인지 아직 봄이 무르익지 않은 방 안은 피부를 차갑게 할 정도로 조용했다. 이따금 기침 소리는 들려도 희미하게 감도는 묵 냄새를 흔들 정도는 아니었다. 
 쿠라노스케는 문득 삼국지에서 고개를 들고는 먼곳을 바라보며 조용히 옆의 화로 위에 손을 얹었다. 망을 얹어 둔 화로 안에는 불타는 숯 아래에 아름다운 붉은색이 어슴푸레하게 재를 비추고 있다. 그 불기운을 느낀 쿠라노스케의 가슴에는 평안한 만족이 새삼스럽게 감돌았다. 마침 작년 섣달 십오 일에 망군의 복수를 다 하여 센가쿠지로 올랐을 때 스스로 "아, 기쁨이 온몸에 감도는구나. 떠오른 달엔 구름 한 점 끼지 않았네"하고 읊은 그때의 만족감이 돌아 온 것이다.
 아코 성을 나온 이후로 이 년 가까운 세월을 초조함과 획책으로 허비하지 않았나. 조금만 움직여도 서두르고 마는 일당의 객기를 휘어잡으며 천천히 때가 무르익는 걸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심지어 상대 가문이 보낸 간첩은 시종 그와 주위를 살폈다. 그는 방탕함을 겉꾸며 그러한 간첩의 눈을 속이는 동시에 그 방탕함에 속은 동지의 의혹도 풀어야만 했다. 야마나시나 마루야마서 모의하던 과거를 떠올리면 당시의 고충이 다시 가슴 속에 떠오른다――하지만 모두 마땅한 곳에 안착했다.
 만약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게 있다면 일당 열일곱 명에게 해줄 공의公儀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리 머지 않은 일임에 분명하다. 그래, 모든 게 안착되었다. 그것도 단순히 복수의 쾌거만이 아니다. 모든 게, 그의 도둑상 요구와 완전히 일치하는 형태로 성취되었다. 그는 해야 할 일은 완성한 만족만 아니라 도덕을 실현한 만족 또한 동시에 맛볼 수 있었던 것이다. 심지어 그 목적은 복수의 목적으로 생각해도 또 수단으로 생각해도 양심을 좀 먹는 부분이 조금도 없었다. 그가 이 이상의 만족을 맛볼 일이 또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며 눈썹을 들어 올린 쿠라노스케는 역시나 책이 지루해졌는지 책을 무릎 위에 덮고 손가락으로 습자를 하고 있던 요시다 추자에몬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날이 꽤 따듯하군요."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있으면 날이 너무 좋아 잠들어 버릴 거 같습니다."
 쿠라노스케는 작게 웃었다. 정월 원단에 토미노모리 스케에몬이 세 잔의 도소주에 취해 "오늘 하루도 봄이 아쉽지 않은 잠든 무사랴"하고 외운 구가 문득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뜻도 요시카츠가 지금 느끼는 만족과 별로 다를 바가 없었다.
 "역시 뜻을 이루면 마음이 느슨해지는 걸 테지요."
 "그럼요, 왜 안 그럴까요."
 츄자에몬은 담뱃대를 들어 얌전히 연기 한 모금을 맛보았다. 연기는 이른봄의 오후를 희미하게 흔들며 밝은 조용함 속에 옅고 푸른 자국을 남기며 사라져 간다.
 "이렇게 나른한 날을 보내게 될 거라곤 서로 생각도 못 했으니까요."
 "아무렴요. 저도 두 번이나 봄을 맞이하게 될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죠."
 "저희도 운이 참 좋아요."
 두 사람은 만족스레 눈으로 웃었다――만약 이때 요시카츠의 뒤 장자서  그림자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그 그림자가 장자에 손을 얹는 동시에 사라져 그 대신에 하야미 토자에몬의 늠름한 몸이 방안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요시카츠 봄의 기분 좋은 따스함을 이 자랑스러운 만족과 함께 한사코 맛볼 수 있었을 테지. 하지만 현실은 핏기가 잘 도는 토자에몬의 두 뺨에 떠오른 풍부한 미소와 함께 거침 없이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물론 그걸 알아차리지 못 했다. 
 "아랫방이 꽤나 북적거리는군요."
 토자에몬은 그렇게 말하며 담배를 한 모금 빨았다.
 "오늘 당번은 덴에몬 경이니 잡담이 많이 오가는 걸 테지요. 카타오카도 그쪽으로 가더니 그대로 앉아 버렸어요."
 "어쩐지 늦는다 했어요."
 토자에몬은 담배 속에서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자 내내 붓을 쥐고 있던 오노데라 쥬나이가 무슨 생각인지 살짝 고개를 들었으나 다시 종이에 고개를 떨구고 글을 이어갔다. 아마 교토의 아내에게 보낼 편지를 쓰고 있는 걸 테지――쿠라노스케도 눈가의 주름을 잡고 웃으며 물었다.
 "뭐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던가요?"
 "아뇨, 그냥 잡담이나 나누는 거지요. 단지 방금 전 치카마츠가 진자부로의 이야기를 했을 때엔 덴에몬 경께서도 눈에 눈물을 머금은 채 들으셨는데 그 이외엔――아뇨, 그러고 보니 재밌는 이야기가 있군요. 저희가 키라 경을 친 이후로 에도에선 원수 갚기가 유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하하, 그건 생각지도 못했군요."
 츄자에몬은 괴이하단 얼굴로 토자에몬을 보았다. 상대는 이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어쩐지 굉장히 득의양양한 듯했다.
 "지금도 엇비슷한 이야기를 두세 개 듣고 왔는데 그중에서 우스운 건 미나미핫쵸보리의 미나토쵸 주변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듣자하니 일의 시작은 그 지역 쌀가게 주인이 욕탕에서 이웃 염색집 주인하고 싸웠다지요. 뭐 원인이야 물이 튀었나 마네 하는 별 볼 일 없는 일일 테지요. 그리고 그 끝엔 쌀집 주인이 염색집 주인한테 한참 얻어 맞았다 합니다. 그러자 쌀집의 도제 하나가 그걸 앙심에 품었는지 해가 지자 염색집 주인이 밖으로 나오는 걸 기다려 대뜸 갈고리로 염색집 주인의 어깨를 때렸다지 뭡니까. '주인의 복수다'하면서 저질렀다나요……"
 토자에몬은 웃으며 손짓 섞어 이렇게 말했다.
 "난폭하군요."
 "염색집 주인 쪽은 크게 다쳤다 합니다. 그럼에도 주위 평판은 일을 저지른 도제 쪽이 더 좋으니 참 신기하지요. 그 외에도 토리쵸 산쵸메서도 하나, 신코지마치 니쵸메서도 하나, 또 하나는 어디였던가요. 아무튼 곳곳에 있는 듯합니다. 그게 모두 우리 흉내라니 우습지 않습니까?"
 토자에몬과 츄자에몬은 얼굴을 마주하여 웃었다. 복수의 주먹이 에도 사람들에게 준 영향을 듣는 건 아무리 사사로운 일이라도 기분 좋을 게 분명하다. 단지 단 한 명, 쿠라노스케만큼은 이마에 살짝 손을 얹은 채로 내키지 않는 얼굴로 입을 다물고 있다――토자에몬의 이야기는 그의 만족에 작지만 묘한 구름을 드리웠다. 물론 그가 자신의 행동이 만든 여러 결과에 책임을 질 생각인 건 아니었다. 그들이 복수의 주먹을 든 이후로 에도 안에 원수 갚기가 유행해본들 그건 본래 그의 양심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마음에는 이제까지 느낀 봄의 따스함이 어느 정도 가신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그때의 그는 단순히 자신들이 한 일이 의외의 곳까지 영향을 준 데 살짝 놀란 것뿐이었다. 하지만 평소의 그라면 토자에몬이나 츄자에몬과 같이 웃고 말 일이었겠지. 하지만 그 사실은 한껏 만족해 있던 그의 마음에 불쾌한 씨를 뿌리게 되었다. 이건 아마 그의 만족이 암암리에 논리와 배치되어 그의 행동과 그 결과 전부를 긍정할 만큼 형편 좋은 성질을 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물론 당시의 그의 마음엔 이러한 해부적 생각은 조금도 담기지 않았다. 그는 단지 봄바람 아래서 한 줄기 차가움을 느껴 어쩐지 불쾌해졌을 뿐이다.
 하지만 쿠라노스케가 웃지 않은 것도 두 사람의 주의를 끌지는 않은 듯했다. 아니 사람 좋은 토자에몬은 자신이 이 야기에 관심이 가듯이 쿠라노스케 또한 관심이 있다 믿어 의심치 않았던 걸 테지. 그렇지 않다면 직접 아랫방을 찾아 당일 당직이었던 호소카와 가문 가신, 호리우치 덴에몬을 일부러 데리고 올 리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매사에 진지한 그는 츄자에몬을 돌아보고는 "덴에몬을 불러오죠"하고 말하며 곧장 후스마를 열고는 가볍게 아랫방으로 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척 보아도 무뚝뚝한 덴에몬과 함께 여전한 웃음을 머금고서 돌아왔다.
 "번거롭게 해서 어쩝니까."
 츄자에몬은 덴에몬을 보자 요시카츠를 대신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덴에몬의 소박하고 진솔한 성격이 그와 그들 사이를 오랜 친구 같은 온정으로 이어주었기 때문이다.
 "하야미 씨가 부디 와달라 하시기에 방해된다는 걸 알면서도 찾아뵙습니다."
 덴에몬은 자리에 앉고는 커다란 눈썹을 움직이며 햇살에 탄 뺨근육을 당장이라도 웃으려는 듯이 움직이더니 주위를 고스란히 둘러보았다. 그 시선을 따라 책을 읽던 자나 붓을 움직이는 자도 제각기 인사를 한다. 쿠라노스케 역시 인사를 했다. 단지 그 가운데 살짝 우스꽝스러웠던 게 읽다 만 태평기를 덮어두고 안경을 낀 채로 졸고 있던 호리베 야헤가 눈을 뜨마자자 황급히 안경을 벗고는 정중히 고개를 숙이는 모습이었다. 이에는 아무리 하자마 키헤이도 우스웠는지 고개를 돌린 채 괴로운 얼굴로 웃음을 참고 있었다.
 "덴에몬 경은 노인이 싫은지 자주 안 오시더군요."
 쿠라노스케는 평소와 달리 부드러운 기색으로 이렇게 말했다. 어느 정도 흐트러지긴 했으나 아직 그의 가슴 안쪽에는 또렷한 만족이 따스하게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저쪽에 붙잡혀서 그만 그대로 말이 이어져서요."
 "듣자하니 꽤나 재밌는 이야기가 나온 모양이더군요."
 츄자에몬도 옆에서 끼어들었다.
 "재밌는 이야기――라 하심은……"
 "온 에도가 원수 갚기 비슷한 걸 한다는 그 이야기 말입니다."
 토자에몬은 그렇게 말하고는 싱글싱글 웃으며 덴에몬과 쿠라노스케를 번갈아 보았다.
 "하아, 아뇨, 그 이야기 말인가요. 인정이란 게 참 묘하지요. 여러분의 충의를 느끼자 마을 백성들마저 그 흉내를 내고 싶어진 걸 테지요. 그 덕에 어느 정도는 하찮은 상하 풍속이 고쳐질지도 모릅니다. 왜, 쥬루리니 카부키니 보고 싶지 않은 것만 유행하는 시기니까요. 마침 잘 됐다 해야겠지요."
 또 쿠라노스케에게 재미 없는 방향으로 대화가 흐를 모양이었다. 때문에 그는 일부러 무거운 비하를 깔면서 교묘히 그 방향을 바꾸려 했다.
 "저희의 충의를 칭찬해주시는 건 감사합니다만 제 소견으로는 부끄러움이 앞서는군요."
 그렇게 말하며 주위를 바라보며
 "왜냐면 아코번에 사람도 많은 와중에 보다시피 여기 있는 건 모두 보잘 것 없는 신분이지요. 그야 처음에는 오쿠노 쇼겐 같은 반가시라도 상담을 받아 주셨습니다만 도중부터 견해를 바꾸시어 끝내 동맹을 벗어나셨으니 마음 같지 않았다고 밖에 할 수 없지요. 그 외에도 신토 겐시로, 카와무라 덴뵤에, 코야마 겐고자에몬 등은 하라 소에몬보다 상석이고 사사코 자에몬 등도 요시다 츄자에몬보다 신분은 높으나 모두 거사가 가까워지자 변심하였습니다. 개중에는 제 친족도 있지요. 그런 식으로 보면 부끄러운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지요."
 주위 공기는 쿠라노스케의 그 말과 함께 이제까지의 밝음마저 잃고서 불쑥 진지함을 둘렀다. 그런 의미서 그가 의도한 것처럼 대화 방향이 바뀌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바뀐 방향이 과연 쿠라노스케에게 유쾌했는가. 그건 또 별개의 문제였다.
 그의 술회를 듣자  먼저 하야미 토자에몬이 두 손으로 쥔 주먹을 두세 번 무릎 위에 문지르면서
 "그 자들은 모두 글러 먹은 녀석들이니까요. 누구 하나 무사의 품격에 올릴 가치가 없습니다."
 "그렇죠. 특히 타카타 군베이 따위는 짐승보다 못합니다."
 츄자에몬은 눈썹을 들어 올리며 찬동을 구하듯이 호리베 야헤를 보았다. 의협심이 있는 야헤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물러나는 아침에 그 녀석들을 보았을 때는 침을 뱉워줘도 시원찮지 싶었지요. 뻔뻔히 우리 앞에 나타난 걸로 모자라 바람을 이루어 큰 경사라며 떠들어댔으니까요."
 "타카타도 타카타지만 오야마다 쇼자에몬도 글러 먹은 얼간이지요."
 마세 큐다유가 누구에게랄 것 없이 말하자 하라 소에몬이나 오노데라 쥬나이도 역시 말을 거들어 등을 돌린 자들을 매도하기 시작했다. 과묵한 하자마 키헤이마저 입은 열지 않았을지언정 백발 머리를 끄덕이며 일동의 의견에 잔성의 뜻을 전했다.
 "어찌 되었든 여러분 같은 충신과 그러한 자들이 한 번에 있다니 생각도 못할 일입니다. 그러니 무사가 마을 백성에게까지 하는 것도 없이 남의 돈만 받아먹는단 욕을 듣는 것이지요. 오카바야시 모쿠노스케 경도 작년 배를 그으셨는데 역시나 주위 친지가 억지로 떠민 거라지요. 또 설령 그렇지 않더라도 그러한 경우에 이르면 그 오명을 피할 수는 없을 테지요. 하물며 다른 사람은 어떻습니까. 원수 갚기를 흉내 낼 정도로 의용심이 있는 에도이고 또 여러분께서 분노하시기도 하니 그러한 자들을 베려는 사람이 나타날지 모르는 일 아니겠습니까?"
 덴에몬은 남 일이 아닌 것처럼 성을 내며 그렇게 말했다. 이래서야 다른 누구보다 그부터가 먼저 베려 들지 모를 기세였다. 이에 선동된 요시다, 하라, 하야미즈, 호리베 등은 모두 일종의 흥분을 느낀 것처럼 사납게 난신적자를 매도했다――하지만 그 가운데 오이시 쿠라노스케만큼은 두 손을 무릎 위에 얹은 채로 더욱 지루하단 얼굴로 말수를 줄여가며 멍하니 화로만 바라보았다.
 그는 새로운 화제 속에서 변심한 자들을 폄하하는 대신 자신들의 충의가 더욱 칭찬 받는다는 새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또 그와 동시에 그의 가슴에 불던 본바람은 다시 온도를 잃어갔다. 물론 그가 등을 돌린 자들을 안타까워한 건 단순히 화제를 돌리기 위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 또한 그들의 변심을 아쉽고 불쾌했다. 하지만 그러한 불충의 사무라이를 연민할지언정 미워하지는 않았다. 인정이 등을 돌리는 것도 세상이 변하는 것도 맛봐 온 쿠라노스케이지 않은가. 그들의 변심 중 대다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만약 솔직히 말하는 게 용납된다면 마음이 아플 정도로 진솔했다. 따라서 그는 그들에게도 시종 관용의 태도를 보였다. 하물며 복수를 이룬 이제 와서는 그들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그저 연민 섞인 웃음만 남았다. 그러나 세간은 그들을 죽여도 시원찮지 않은 모양이다. 왜 자신들을 충성스러운 사무라이를 만드는데 그들을 짐승으로 만들어야 하는가. 우리와 그들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다――에도 사람들에게 준 묘한 영향을 불쾌해하지 않던 쿠라노스케는 이번에는 살짝 다른 방향서 등을 돌린 자들이 준 영향을 덴에몬으로 대표된 천하의 공론 속에서 발견했다. 그가 씁쓸한 표정을 짓는 것도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쿠라노스케의 불쾌함은 더욱 깊어질 운명을 앞두고 있었다.
 덴에몬은 그가 말을 않는 건 양심 덕이라 추측했던 걸 테지. 그의 인품에 감복한 이 소박하고 우직한 히고 사무라이는 그런 감정을 피력하기 위해 억지로 화제를 돌리고는 곧장 쿠라노스케의 충의를 성대하게 칭찬하기 시작했다.
 "지난 날에 어떤 박식한 이한테 들었는데 모로코시의 아무개란 사무라이는 숯을 삼키면서도 주인의 원수를 갚았다고 하지요. 하지만 그건 쿠라노스케 경처럼 마음에도 없는 방탕함을 겉꾸미는 것보다는 덜 괴로운 편일 테지요."
 그렇게 운을 뗀 덴에몬은 일 년 전 쿠라노스케가 했던 일을 길게 늘어 놓기 시작했다. 타카오나 아타고서 단풍놀이를 겉구며야 했던 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시마바라나 기온의 꽃놀이 연회도 고육계였던 그에게는 괴로웠던 게 분명하다……
 "그러고 보면 그 시절 교토에선 오이시는 넋 빠진 돌이란 우타도 유행했던 걸 들었지요. 그렇게나 천하를 속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얼마 전 아먀노 야자에몬 님께서 그 침착한 용기를 칭찬하신 것도 지극히 마땅한 일이지요."
 "아뇨, 그리 대단한 일은 아닙니다." 쿠라노스케는 마지못해 그렇게 대답했다.
 우쭐하지 않은 그 태도가 덴에몬으로선 어딘가 모자른 동시에 더욱 깊게만 보여서 이제까지 쿠라노스케를 보던 그는 평생을 교토서 일한 오노데라 나이쥬 쪽을 보고는 열심히 감복의 뜻을 늘어 놓기 시작했다. 그 아이 같은 모습이 일행 중에서도 눈치가 빠른 걸로 명성 높은 나이쥬는 우스운 동시에 귀엽게 보였던 걸 테지. 그는 순순히 덴에몬의 뜻을 받아주어 당시 쿠라노스케가 원수 가문의 첩자를 속이기 위해 법의를 두르고 마스야의 유우기리를 찾은 이야기를 자세히 들려주었다.
 "저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쿠라노스케가 당시엔 리게시키란 우타를 만든 적이 있었죠. 그게 또 꽤나 평가가 좋아서 모르는 이가 없었던 정도입니다. 그때 당시의 쿠라노스케의 풍속이 검게 물들인 법의 차림으로 그 기온의 벚꽃 속을 취한 채로 어슬렁어슬렁 걷는 것이었습니다. 리게시키란 우타가 유행하거나 쿠라노스케의 소행이 유명해진 것도 당연한 일이지요. 그러니 유우기리도 그렇고 우키하시도 그렇고 시마바라나 슈모쿠마치의 명성 높은 자들도 쿠라노스케라면 아래에 두지 말라 소란이었고요."
 쿠라노스케는 그런 쥬나이의 이야기를 거의 매도 당한 기분으로 씁쓸하게 들었다. 또 동시에 과거의 방탕했던 기억도 자연스레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로서는 신기할 정도로 색채가 선명한 기억이었다. 그는 그 기억 속에서 긴 촛불 빛을 보고 침향 냄새를 맡고 카가부시의 샤미센 소리를 들었다. 아니, 지금 나이쥬가 말한 리게시키의 '눈물 젖은 소매에 축 젖은 소매에 이슬처럼 적셔지는구나"하는 문구마저 춘궁에서 튀어나온 듯한 유우기리나 우키하시의 모습과 함께 고스란히 마음 속에 떠올랐다. 그는 이 기억 속에 출몰하는 갖은 방탕한 생활을 얼마나 딱 잘라 수용했으랴. 그리고 또 그 방탕한 생활 속에서 복수의 뜻을 전부 잊은 채 녹아내리는 순간을 얼마나 맛보았으랴. 그는 자신을 속이고 이 사실을 부정하기엔 너무나 솔직한 인간이었다. 물론 이 사실이 부도덕하단 것도 인간성에 밝은 그에게는 몽상마저 불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그의 모든 방탕을 충의를 다 하기 위한 수단으로 격찬 받는 건 불쾌한 동시에 죄의식이 들었다.
 이렇게 생각하던 쿠라노스케가 소위 방탕 고육계를 칭찬 받아 괴로운 표정을 짓는 건 이상할 게 없다. 그는 다시 타격을 받아 희미하게 남아 있던 봄바람이 서서히 그쳐 가는 걸 느꼈다. 그 후에 남은 건 모든 오해에 대한 반감과 그 오해를 예상치 못한 자신의 반감 같은 게 희미하게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든 복수의 주먹도, 그의 동지도 또 마지막으로 자신마저도 아마 이대로 제멋대로 칭찬을 이어가며 후대까지 전달하리라――그러한 불쾌한 사실과 마주하며 그는 불이 약해진 화로에 손을 뻦고는 덴에몬의 눈을 피해 힘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그로부터 몇 분 뒤의 일이다.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운 오이시 쿠라노스케는 홀로 툇마루의 기둥에 기대어 겨울 매화가 맺힌 늙은 나무가 정원의 이끼 사이서 하얗게 빛나는 꽃을 달고 있는 걸 바라보았다. 햇살은 옅어진지 오래여서 심어진 대나무 그늘막에선 벌써부터 황혼이 펼쳐져 있는 듯했다. 하지만 장자 안에선 여전히 재미난 목소리가 이어지고 있다. 그는 그걸 듣는 사이에 애수가 천천히 스며드는 걸 느꼈다. 이 희미한 매화 냄새에 끌려 시원찮은 마음 밑바닥에 스며드는 쓸쓸함은, 이 말로 다 못할 쓸쓸함은 대체 어디서 오는 걸까――쿠라노스케는 푸른 하늘에 그린 듯한 단단하고 차가운 꽃을 바라보면서 한사코 가만히 서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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