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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아쿠타가와 류노스케

신들의 웃음 -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by noh0058 2021. 12.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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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봄 저녁, Padre Organtino는 홀로 긴 아비토habito(법의) 자락을 끌면서 남만절 정원을 걷고 있었다.

 정원에는 소나무나 노송나무 사이서 장미니 감람이니 월계수 같은 서양 식물이 심어져 있었다. 특히 꽃피우기 시작한 장미는 나무들을 희미하게 만드는 저녁노을 속에서 옅은 단향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향기는 이 정원의 정숙함에 어쩐지 일본처럼 느껴지지 않는 신비한 매력을 곁들게 했다.
 오르간티노는 쓸쓸하게 모래가 붉어진 좁은 길을 걸으며 멍하니 추억에 잠겨 있었다. 로마의 대본산, 리스보아Lisboa, 리스본의 항구, 라베이카rabeca, 하베카 소리, 천도복숭아의 맛, 노래 "주, 나의 아니마(영혼)의 거울"――그러한 추억은 어느 틈엔가 이 서양 샤먼의 마음에 회향의 슬픔을 옮겨다 주었다. 그는 그 슬픔을 떨치기 위해 가만히 데우스(신)의 이름을 외웠다. 하지만 슬픔은 사라지지 않는 건 물론이요 전보다 한층 더 그의 가슴에 갑갑한 공기를 퍼트렸다.

 "이 나라의 풍경은 아름다워."
 오르간티노는 반성했다.
 "이 나라의 풍경은 아름다워. 날씨도 따듯하지. 사람은――저 누런 얼굴의 난쟁이들보다는 차라리 새까만 자들이 나을지 모르지. 하지만 이 또한 대부분의 기질은 친근해지기 쉽긴 해. 그뿐 아니라 요즘 들어선 신도도 몇 만을 넘을 정도지. 실제로 여기 이곳 수도 한 가운데에도 이런 사원이 자리해 있지 않나. 그렇게 보면 여기에 사는 건 설령 유쾌하지는 않더라도 불쾌하지는 않아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나는 도무지 우울함의 밑바닥에 빠지곤 하는군. 리스보아로 돌아가고 싶고 이 나라를 뜨고 싶을 때가 있어. 이건 향수의 슬픔 때문만일까? 아니, 나는 리스보아가 아니라도 이 나라를 떠날 수만 있다면 어떤 땅이라도 가고 싶어. 중국이든 타이든 인도든――즉 향수의 슬픔은 내 우울함의 전부가 아니지. 나는 단지 이 나라서 하루라도 빨리 도망치고 싶을 뿐이야. 하지만――하지만 이 나라의 풍경은 아름답지. 날씨도 따듯해……"

 오르간티노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때 그의 눈은 우연히 나무 뒤편의 이끼에 떨어진 얕은 흰색의 벚꽃을 보았다. 벚꽃! 오르간티노는 놀라서 어두컴컴한 나무 사이를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네다섯 그루의 종려나무 사이에 가지를 뻗은 사앵 하나가 꿈만 같은 꽃을 피우고 있었다.
 "주여, 지켜주소서!"
 오르간티노는 순간 강마의 십자를 그으려 했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이 저녁 어둠에 핀 벚꽃이 그렇게나 꺼림칙해 보였다. 꺼림칙하게――보다 정확히는 이 벚꽃이 어째서인지 그를 불안하게 하는 일본 그 자체로만 보였다. 하지만 그는 찰나의 순간 후, 그게 이상할 게 없는 단순한 벚꽃이었음을 발견하고는 부끄러운 듯 쓴웃음을 지으며 힘없는 걸음으로 온 길을 다시 거꾸로 걷기 시작했다.

       ×          ×          ×

 삼십 분 지나 그는 남만절 안에서 데우스를 향해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그곳에는 단지 원형 천장에 걸린 램프만 있을 뿐이었다. 그런 램프빛을 받는 프레스코 벽에는 산 미구엘San Miguel, 미카엘이 지옥의 악마와 모세의 시체를 두고 다투고 있었다. 하지만 용맹한 대천사는 물론이요 사나운 악마마저도 몽롱한 빛의 조절 탓인지 오늘밤 따라 평소보다 묘하게 우아해 보였다. 그건 어쩌면 제단 앞에 놓인 신선한 장미나 금작화의 향 덕인지도 몰랐다. 그는 그 제단 뒤에서 가만히 고개를 조아린 채 열심히 이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나무대애대비의 데우스여래시여! 저는 리스보아 항구를 나온 이후로 이 한 목숨을 당신께 바쳤습니다. 그러니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십자가의 위광을 빛내기 위해 한 걸음도 겁먹지 않고 나아갔습니다. 이는 물론 저 하나의 능력은 아닙니다. 모두 천지의 주님, 당신의 은혜 덕이 옵니다. 하지만 이 일본에 사는 사이 저는 제 사명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알기 시작했습니다. 이 나라에는 산에도 숲에도 혹은 집이 줄지은 마을에서도 무언가 신비한 힘이 잠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게 저도 모르는 사이에 제 사명을 방해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제가 요즘 들어 아무 이유도 없이 우울의 밑바닥에 떨어져 있을 리가 없습니다. 그럼 그 힘이란 무엇인가.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찌 되었든 그 힘은 마치 지하의 연못처럼 이 나라 전체에 퍼져 있습니다. 먼저 이 힘을 깨지 않으면 아아, 나무대애대비의 데우스여래시여! 잘못된 믿음에 빠진 일본인은 하라이소(천계)의 장엄함을 보는 일도 영원히 없을지 모릅니다. 저는 그 때문에 요 며칠 동안 번민에 번민을 거듭했습니다. 부디 당신의 종복인 오르간티노에게 용기와 인내를 내려주소서――"
 그때 오르간티노는 문득 닭 우는 소리가 들린 듯했다. 하지만 그에는 신경도 쓰지 않고 더욱이 이런 기도의 말을 이어갔다.
 "저는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이 나라의 산천에 잠든 힘과――아마 인간에게는 보이지 않을 혼령과 싸워야만 합니다. 주께서는 과거 홍해 밑바닥에 이집트의 군세를 잠들게 하셨지요. 이 나라의 혼령 또한 이집트 군세에 밀리지 않습니다. 부디 고대의 예언자들처럼 저도 이 혼령과 싸울………"
 기도의 말은 어느 틈엔가 그의 입술에서 사라져 버렸다. 이번에는 대뜸 제단 주변서 엄청난 닭 울음소리가 들린 것이다. 오르간티노는 의아하다는 양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자 그의 바로 뒤에는 하얀 꼬리가 축 처진 닭 한 마리가 제단 위에서 가슴을 편 채로 벌써 하룻밤이 지난 것처럼 울고 있지 않은가?
 오르간티노는 펄쩍 뛰어올라 아비토의 두 팔을 펼치며 황급히 이 닭을 쫓아내려 했다. 하지만 두 걸음 세 걸음 걷더니 "주여"하고 갈라지는 목소리로 외치고는 멍하니 멈춰 서고 말았다. 이 어두컴컴한 사원 안은 언제 어디서 들어 온 건지 무수한 닭으로 충만해 있었다――어떤 것은 하늘을 날고 또 어떤 것은 달리고 그의 시야는 닭벼슬의 바다에 빼곡히 파묻히고 말았다.
 "주여, 지켜주소서!"
 그는 또 십자가를 그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신기하게도 만력 같은 걸 사이에 둔 것처럼 조금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었다. 그러는 사이 사원 안에는 장작불과 비슷한 붉은빛이 출처도 알 수 없이 흘러 들어왔다. 오르간티노는 한참 신음을 하다 이 빛이 들기 시작함과 동시에 몽롱히 떠오른 그림자가 주위에 있음을 발견했다.
 그림자는 서서히 선명해졌다. 그건 하나같이 눈에 익지 않은 소박한 남녀의 한 무리였다. 그들은 모두 목덜미에 가는 끈에 매단 옥을 찬 채로 유쾌하게 웃고 있었다. 사원 안에 무리 지어 있던 무수한 닭은 그들의 모습이 확실해지자 이제까지 이상으로 한층 더 높게 몇 마리나 울기 시작했다. 동시에 사원 벽은――산 미구엘의 그림이 그려진 벽은 안개처럼 밤에 삼켜져 버렸다. 그 뒤에는――
 일본의 Bacchanalia바카날리아는  황당해하는 오르간티노의 앞에 신기루처럼 떠올랐다. 그는 붉은 장작불의 그림자서 고대 복장을 한 일본인들이 서로 술을 나누며 둥글게 둘러앉은 걸 보았다. 그 한가운데에는 여자 하나――일본서는 아직 보지 못한 당당한 체격의 여자 하나가 엎어 둔 커다란 통 위에서 미친 듯이 춤추는 걸 보았다. 통 뒤에는 이 또한 듬직한 남자 하나가 언덕이라도 되는 듯이 자리하여 비주기 나무 가지에 옥이나 거울 따위를 걸어둔 채 서있는 걸 보았다. 둘의 주위서는 수백 마리의 닭이 꽁지 깃이나 벼슬을 문지르며 끝없이 기쁘게 울고 있었다. 또 그 너머서는――오르간티노는 새삼스레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그 너머서는 밤 안갯속에 바위 집의 문인 듯한 방위 하나가 턱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통 위에 오른 여자는 한사코 춤을 멈추지 않았다. 그녀의 머리에 감긴 덩굴은 하늘하늘 하늘에 나부꼈다. 그녀의 목에 걸린 옥은 몇 번이나 우박처럼 울렸다. 그녀의 손에 들린 조릿대 가지는 종횡무진 바람을 휘둘렀다. 심지어 고스란히 드러난 가슴이라니! 붉은 장작불 속에서 요염하게 맨질맨질 떠오른 두 유방은 오르간티노의 눈에는 정욕 그 자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는 데우스를 찾으며 열심히 고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의 몸은 어떠한 신비한 저주 탓인지 움직이는 거 하나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환상의 남녀 위로 불쑥 침묵이 내려왔다. 통 위의 여자도 정신을 되찾은 것처럼 겨우 광란의 춤을 멈추었다. 아니, 서로 경쟁하듯 울던 닭마저도 이 순간은 목을 쭉 뻗은 채로 단숨에 조용해져버렸다. 그러자 그 침묵 속에서 아름다운 여자의 목소리가 어디선가 엄숙히 들려왔다.
 "내가 여기에 숨어 있으면 세상이 어두워지지 않던가? 그런데도 신들은 즐겁게 웃고 떠드는 거 같군."
 그 목소리가 밤하늘에 사라졌을 때, 통 위에 선 여자는 주위를 힐끔 보더니 의외일 정도로 정숙히 대답했다.
 "당신보다 대단한 새로운 신이 나타났기에 기뻐하던 참입니다."
 그 새로운 신이란 게 데우스를 가리키는 걸지 모른다――오르간티노는 잠시 그런 생각에 기운을 받으며 이 괴상한 변화에 살짝 흥미로운 시선을 주었다.
 침묵은 잠시간 이어졌다. 하지만 곧 닭무리가 일제히 울기 시작하더니 건너편서 밤안개를 가로막던 바위집의 문으로 보이는 바위 하나가 서서히 좌우로 열렸다. 그렇게 갈라진 곳에서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노을이 홍수처럼 쏟아져 넘쳤다.

 오르간티노는 소리치려 했다. 하지만 혀는 움직이지 않았다. 오르간티노는 도망 치려했다. 하지만 다리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는 단지 강한 광명 탓에 심한 현기증을 느꼈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수많은 남녀가 환희하는 목소리가 팽배히 하늘로 오르는 걸 들었다.
 "오히루메무치! 오히루메무치! 오히루메무치!"
 "새로운 신 따위는 없습니다. 새로운 신 따위는 없습니다."
 "당신에게 거스르는 자는 모두 죽고 맙니다."
 "보시지요, 어둠이 사라지는 것을."
 "온천지가 당신의 산이요, 숲이요, 강이요, 거리요, 바다입니다."
 "새로운 신은 없습니다. 모두가 당신의 종복입니다."
 "오히루메무치! 오히루메무치! 오히루메무치!"
 그런 목소리가 솟구치는 가운데 식은땀을 흘리는 오르간티노는 무언가 괴롭게 소리치고는 옆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밤이 삼경에 가까워졌을 적, 오르간티노는 겨우 정신을 되찾았다. 그는 아직도 귓가서 신들의 목소리가 울리는 듯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자 인기척 하나 없는 사원 안에는 둥근 천장에 걸린 램프빛이 아까와 마찬가지로 몽롱히 벽화만 비출 뿐이었다. 오르간티노는 신음을 하면서 천천히 제단 뒤편서 벗어났다. 그 환상에 어떠한 의미가 있는가. 그는 미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환상을 보여준 게 데우스가 아니란 것만은 확실했다
 "이 나라의 혼령과 싸우는 건……"
 오르간티노는 걸으면서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했다.
 "이 나라의 혼령과 싸우는 건 생각보다 어려운 듯하군. 이기는가 혹은 지는가――"
 그때 그의 귓가에 이런 속삭임이 닿았다.
 "진 거죠!"
 오르간티노는 꺼림칙하게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보았다. 하지만 그곳에는 여전히 어두운 장미나 금작화 이외에 인기척 같은 건 찾아 볼 수 없었다.

       ×          ×          ×

 오르간티노는 다음 날 저녁에도 남만절 정원을 걷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푸른 눈은 어딘가 기쁜 색을 두르고 있었다. 그건 오늘 하루 동안 일본 사무라이 서너 명이 기독교에 발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정원의 감람이나 월계수는 조용히 저녁 어둠을 머금고 있었다. 그 침묵을 흐트러 놓는 건 비둘기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하늘서 퍼덕이는 날개 소리뿐이었다. 장미향, 모래의 습기――모든 게 날개 달린 천사들이 "여자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찾아 내려온 고대의 저녁처럼만 평화로웠다.
 "역시 십자가의 위광 앞에서는 더러운 일본 혼령의 힘도 이기는 게 쉽지 않겠지. 하지만 어제 본 환상은 뭐지?――아니, 그건 환상에 지나지 않아. 악마는 성 안토니우스에게도 그런 환상을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 증거로 날이 밝자 한 번에 몇 명의 신도가 생겼지. 곧 이 나라서도 온갖 곳에 주님의 절이 세워질 거야."
 오르간티노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모래가 붉어진 좁은 길을 걸었다. 그러자 누군가가 등 뒤에서 가만히 어깨를 두드렸다. 그는 곧장 돌아보았다. 하지만 좁은 길을 둔 버즘나무의 어린잎에 희미하게 드리운 저녁노을만이 전부였다.
 "주여, 지켜주소서!"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면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어느 틈에 숨어 든 걸까. 그의 옆에는 어제 본 환상처럼 목에 옥을 찬 노인 하나가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 채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누구냐?"
 생각지 못한 등장에 오르간티노는 그만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저는――누구랄 게 없지요. 이 나라의 혼령 중 하나입니다."
 노인은 작게 웃어 보이며 친절히 대답했다.
 "자, 같이 걸을까요? 저는 잠시 이야기를 하기 위해 찾아 온 것이니까요."
 오르간티노는 십자를 그었다. 하지만 노인은 그 표식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저는 악마가 아니랍니다. 보시지요, 이 옥과 이 검을. 지옥의 불꽃에 구워진 거라면 이렇게 청렴하지 않을 테지요. 자, 이제 주문은 그만 외우셔도 됩니다."
 오르간티노는 도리 없이 불쾌하다는 양 팔짱을 낀 채 노인과 함께 걸었다.
 "당신은 천주교를 퍼트리고 있는 듯하군요――"
 노인은 조용히 이야기했다.
 "그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요. 하지만 데우스도 이 나라에 온 이상 마지막에는 질 수밖에 없답니다."
 "데우스는 전능한 주인이니 데우스에게――"
 오르간티노는 그렇게 말하다 문득 떠오른 것처럼 평소 이 나라 신자를 대할 때와 같이 정중한 말투를 썼다.
 "데우스에게 이기는 건 없을 터입니다."
 "실제로는 있지요. 들어보시죠. 저 먼 곳에서 이 나라로 전해진 건 비단 데우스만이 아닙니다. 공자, 맹자, 장자――그 외에도 중국 철학자들이 수없이 이 나라로 전래됐죠. 심지어 당시엔 이 나라가 겨우 만들어진 참이었답니다. 중국 철학자들은 가르침 이외에도 오나라의 비단이나 진나라의 옥 같은 걸 여럿 가져다주었지요. 아뇨, 그런 보석보다도 더 뛰어나고 영묘한 문자마저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국이 저희를 정복했던가요? 이를테면 문자를 보시지요. 문자는 저희를 정복하는 대신 저희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제가 과거에 알고 지내던 사람 중에 카키노모토노 히토마로란 시인이 있습니다. 그 남자가 쓴 칠석 우타는 지금도 이 나라에 남아 있으니 한 번 읽어 보시지요. 견우와 직녀는 그 안에서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 안에서 노래되는 연인은 어디까지나 히코보시와 타나바타츠메이지요. 그들의 머리맡에 울린 건 이 나라 강처럼 청초한 은하수 소리였습니다. 중국의 황하나 양쯔강에 닮은 은하의 파도 소리가 아니었던 거지요. 하지만 저는 우타보다도 문자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히토마로는 그 우타를 기록하기 위해 중국 문자를 사용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의미를 위한 게 아니라 발음을 위한 문자였죠. 라는 문자가 들어 온 이후로도 "후네"는 항상 "후네"였던 겁니다. 그렇지 않다면 저희는 중국어로 말했을지도 모르죠. 이는 물론 히토마로보다도 히토마로의 마음을 지킨 우리나라 신들의 힘입니다. 그뿐 아니라 중국 철학자들은 서예도 이 나라에 전수했죠. 쿠카이, 도후, 사리, 코제이――저는 항상 남몰래 그들을 찾았지요. 그들은 모두 중국의 묵적을 모방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붓 끝에는 서서히 새로운 아름다움이 만들어졌죠. 그들의 문자는 어느 틈엔가 왕희지도 아닐뿐더러 저수량도 아닌 일본인의 문자가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긴 게 꼭 문자만은 아니죠. 우리의 숨결은 바다바람처럼 늙은 유학자의 가르침마저도 부드럽게 풀어 놓았죠. 이 나라 사람들에게 물어 보시죠. 그들은 모두 맹자의 저서는 우리의 분노에 닿기 쉽기에 그걸 쌓은 배가 있다면 반드시 뒤집어야 한다고 믿고 있습니다. 시나토의 신은 아직 한 번도 그런 장난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신앙 속에서도 이 나라에 사는 우리의 힘을 희미하게나마 느낄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생각 안 하시나요?"
 오르간티노는 망연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나라의 역사에 능통하지 못한 그는 모처럼의 웅변도 절반 가량 이해할 수 없었다.
 "중국 철학자 다음으로 온 건 인도 왕자 석가모니지요――"
 노인은 말을 이어가며 길가의 장미를 꺾고는 기쁜 얼굴로 그 향을 맡았다. 하지만 장미는 꺾인 후에도 그 꽃을 남겨두었다. 단지 노인의 손에 놓인 꽃은 색이나 형태는 똑같아 보아도 어딘가 안개처럼 흐릿했다.
 "붓다의 운명도 마찬가지였죠. 하지만 이러한 걸 하나하나 나열하는 건 지루한 이야기를 늘릴 뿐일지 모르겠군요. 단지 주의를 바라는 게 본지수적이란 거지요. 그 가르침은 이 나라 사람에게 오히루메무치가 대일여래와 같은 인물이라 여겨지게 했습니다. 이는 오히루메무치가 이긴 걸까요? 혹은 대일여래가 이긴 걸까요? 가령 현재 이 나라 사람들은 오히루메무치는 몰라도 대일여래를 아는 자가 수없이 있을 테지요. 그럼에도 그들이 꿈에서 보는 대일여래는 인도 부처의 모습보다도 오히루메무치의 모습을 한 경우가 더 많지 않을까요? 저는 신란이나 니치렌과 함께 사라쌍수꽃의 그늘막을 걷고 있습니다. 그들이 굴희갈앙한 부처는 원광을 두른 흑인이 아닙니다. 부드러운 위엄에 충만한 죠구타이시의 형제지요――하지만 약속한 바가 있으니 그런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는 건 관두지요. 요컨대 제가 하고 싶은 말은 데우스도 이 나라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겁니다."
 "기다려보시죠. 그렇게 말씀하셔도――"
 오르간티노가 끼어들었다.
 "오늘만 해도 사무라이 두세 명이 한 번에 가르침에 귀의했습니다."
 "그야 몇 명이든 귀의할 테지요. 하지만 귀의한 게 전부라면 이 나라 사람들 대부분은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귀의하였지요. 하지만 우리의 힘은 파괴하는 힘만 말하는 게 아닙니다. 바꿔내는 힘이지요."
 노인은 장미꽃을 던졌다. 꽃은 손을 벗어나는 순간 곧장 저녁빛에 사라져 버렸다.
 "바꾸는 힘인가요? 하지만 그건 여러분에게만 해당되는 일은 아니지요. 어느 나라든――이를테면 그리스의 신들이라 여겨진 그 나라의 악마도――"
 "위대한 판은 죽었지요. 아니, 판도 언젠가는 돌아올지 모를까요. 어찌 됐든 저희는 지금도 이렇게 살아 있답니다."
 오르간티노는 신기하다는 양 노인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판을 아십니까?"
 "무얼, 서쪽 나라 다이묘의 아이들이 서양에서 가지고 왔다는 책에서 보았지요――그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설령 바꾸는 힘이 우리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도 역시나 방심해서는 안 됩니다. 아니, 오히려 그런 만큼 조심하라 하고 싶군요. 우리는 낡은 신이니까요. 그 그리스 신들처럼 세계의 여명을 봐온 신이니까요."
 "하지만 데우스께선 이기실 겁니다."
 오르간티노는 완고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하지만 노인은 그게 들리지 않는다는 양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저는 불과 네다섯 일 전에 서쪽 나라의 해변에 상륙한 그리스의 선원을 만났습니다. 그 남자는 신이 아니었지요. 단순한 인간에 지나지 않았어요. 저는 그 선원과 달밤의 바위 위에 앉아 여러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눈이 하나인 신에게 붙잡힌 이야기나 사람을 돼지로 부리는 여신 이야기, 목소리가 아름다운 인어 이야기――당신은 그 남자의 이름을 아십니까? 그 남자는 저와 만난 그 순간부터 이 나라 사람이 되었지요. 이제는 유리와카라 자칭한다고 합니다. 그러니 당신께서도 조심하시지요. 데우스도 꼭 이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천주교를 퍼트려도 반드시 이긴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노인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졌다.
 "어쩌면 데우스 본인도 이 나라 사람으로 바뀔지 모를 일입니다. 중국이나 인도도 그랬으니까요. 서양도 바뀔 수밖에 없지요. 저희는 나무 안에도 있습니다. 얕은 물줄기에도 있습니다. 장미꽃을 날리는 바람에도 있습니다. 사원의 벽에 남은 저녁노을에도 있습니다. 어디에나, 또 언제나 있지요. 조심하셔야 합니다. 조심하셔야 해요………"
 그런 목소리가 끊기는가 싶더니 노인의 모습도 저녁 어둠 속으로 그림자가 사라지듯이 사라져 버렸다. 그와 동시에 사원 탑에서는 눈살을 찌푸린 오르간티노의 위로 아베 마리아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          ×          ×

 남만절의 파드레 오르간티노는――아니, 오르간티노에만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다. 유유히 아비트 자락을 끈 콧대 높은 서양인은 황혼의 빛이 떠오른 가공의 월계수나 장미 속에서 한 쌍의 병풍으로 돌아갔다. 남만선이 입항하는 그림을 그린 삼 세기 이전의 오래된 병풍으로.
 잘 있거라, 파드레 오르간티노! 너는 이제 너의 동료와 일본의 해변가를 걸으며 금빛 노을에 깃발을 내건 커다란 남만선을 바라보고 있다. 데우스가 이기나 오히루메무치가 이기나――그건 지금도 간단히 판단할 수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윽고는 우리의 일상이 단정 지을 문제이다. 너는 그 과거의 해변가에서 조용히 우리를 지켜봐다오. 설령 너와 같은 병풍의 개를 끈 카피탄이나 양산을 쓴 흑인 아이와 함께 망각의 수면에 들어도 조용히 수평에 나타난 우리 검은배의 대포 소리는 반드시 옛된 그들의 꿈을 깰 때가 오게 하리라. 그 전까지는――잘 있거라, 파드레 오르간티노! 잘 있거라, 남만절의 우르간 바테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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